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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티어스는 승리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브로마네스에게 살며시 통신을 보냈다.
곧이어 브로마네스의 유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 내가 바질리스크 목 벤 거 봤냐?」
“내가 티 나는 행동 하지 말라고 했지?”
「뭐, 이 정도 가지고 티가 나겠냐? 그건 그렇고, 잔소리나 하려고 통신을 보낸 건가, 친구?」
“네가 준비해뒀다는 그래듀에이트는 지금 어디에 있냐?”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브로마네스는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놈이 아르티어스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장난질이 바로 들통날 게 뻔했으니까.
그것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러다 녀석에게 자신이 아르티어스가 아니라 브로마네스였다는 게 알려진다면, 자칫 실버 패거리에게 자신의 이름이 전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걸 잘 알기에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가 녀석을 만나고 싶다는 걸 이리저리 핑계를 둘러대며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걱정 마.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뒤따라오라고 지시해 뒀으니까.」
“따라오라고 시켰다고?”
「그래. 그나저나 지금 난 바빠서 이만 끊어야 되겠어. 나중에 또 통화하자고.」
“이봐…, 그러지 말고…….”
통신이 갑자기 끊겨버렸다.
“이런 망할 녀석!”
브로마네스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리자, 성질난 아르티어스는 주변을 색적 마법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하지만 이렇다 할 만한 기척은 발견되지 않았다. 상당히 조심성이 많은 놈인 모양이다.
좀 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다면 못 알아낼 건 아니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만뒀다.
그러다 자칫 실버 드래곤 패거리 쪽에서 눈치를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 멍청한 놈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긴 하는군. 하지만 저 멍청이가 추진해 놓은 일이라서 당최 믿음이 가야 말이지. 쯧쯧…….’
엄마가 그랬어. 여자는 근육이라고
월터는 다이아나 일행과 동행하기로 결정한 후, 미끼로서 선행시키고 있었던 서부지부장을 돌려보냈다.
더 이상 낚시질이나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전에 기습을 당했던 건 정보부 쪽 말대로 우연히 재수 없게 일어난 일이었던 모양이다.
낚시질을 그만둬야 했지만, 월터는 파벨은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이아나에게 소개했듯 파벨은 서쪽 대륙 사정에 밝았고, 서쪽 대륙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약간이나마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아나와 함께 온 상인들도 서쪽 대륙의 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된 통역을 해주고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훨씬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월터가 직접 상인들을 고용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했고.
그들은 42일에 걸친 강행군 끝에 서쪽 대륙에 도착했다.
그들만이라면 좀 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겠지만, 상인들과 함께 이동해야 했기에 그 이상의 시간 단축은 무리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저 멀리 국경 검문소가 보이자 여자들은 두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사막을 건너오며 거의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들 중 두 명이나 마법사였기에 청결을 위한 간단한 생활마법을 구사할 수 있어 그리 더러운 몰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다.
우선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오랜 여행에 지친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를 풀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고, 세 번째로는 제대로 된 푹신한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고 싶었다.
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곧장 근처 호텔로 달려가 방 두 개를 잡았다.
하나는 월터를 위한 커다란 더블 침대가 놓여있는 2인용 객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여자들을 위한 특실이었다.
특실이 아니라면 욕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특실을 선택한 것이다.
“일단 욕조에 물부터 채워주세요. 뜨거운 물로 가득!”
“예.”
라디아가 종업원과 얘기하고 있을 때, 다이아나는 파벨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월터와 같은 방을 쓰고 싶은 건 아니지?”
현재 직속 상관인 월터의 의중을 몰라 파벨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다이아나는 월터에게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넓고 푹신한 침대에서 혼자 편히 쉬는 게 월터에게도 좋겠지? 그럼 파벨은 우리가 빌려 갈게.”
월터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오랜만에 혼자서 뒹굴거리며 잘 수 있겠네.”
“우선 간단하게 목욕부터 하고, 그 다음에 밥 먹으러 가자.”
“알았어.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한 시간 후에 만나.”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월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막을 건너오며 딱딱한 빵조각과 육포만 질리도록 먹어 왔기에 이곳에서의 첫 식사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빨리는 안돼?”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가 목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빨리는 안돼.”
목욕 후에 어떤 걸 먹으러 갈 건지를 두고 꺅꺅거리며 흥분해서 떠들고 있는 여자들을 월터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겨우 사막 하나 건넌 거 가지고 뭘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사막 횡단이라는 고난을 통해 여자들끼리의 결속력이 무척이나 높아졌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두 사람에게 말도 못 걸던 파벨도 꽤나 대화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여자들이 우르르 특실로 몰려갔다.
특실 문을 여니, 작은 복도가 나오고 방문 4개가 나란히 보였다.
제일 안쪽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커다란 문이 메인 객실로 들어가는 문인 듯 보였다. 그리고 두 개는 고용인들이 사용할 작은 방의 문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여자들이 제일 먼저 열어본 건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래도 특실이었기에 나름 기대치라는 게 있었는데, 한 사람이 간신히 발을 뻗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욕조 하나와 요강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에게~, 특실이라면서 이게 뭐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다이아나에게 라디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독였다.
“사막에 붙어있는 국경지대 호텔 수준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그건 그래.”
욕실을 본 다이아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복도 끝 제일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이아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는 라디아를 향해 파벨이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나는…, 어느 방을 쓰면 돼?”
“여기 두 개 중에서 아무거나 써. 둘 다 하인들을 위한 방이니 구조는 똑같을 거야.”
“그럼 내가 바깥쪽 방을 쓸게.”
“그렇게 해.”
파벨은 일부러 바깥 출입문에 가까운 방을 선택했다.
모두들 그녀에게 잘해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벨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할 리 없었다.
일행 중에서 평민인 건 그녀 혼자뿐이었으니까.
여기까지 함께 여행하며 다이아나와 라디아를 통해 얻어들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라디아는 치레아 기사단 소속 마법사인 모양이다.
치레아 기사단의 명성으로 봤을 때, 그녀의 실력이 궁정마법사급일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파벨은 그런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하인들을 위한 방은 정말 작았다. 작은 옷장 그리고 일인용 침대 두 개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이 오히려 그녀에게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누구의 눈치조차 보지 않으며 이렇게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보는 게 얼마만 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상관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의해 시작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행. 그리고 끔찍하리만큼 힘겨웠던 사막 횡단은 사무실에서 주로 임무를 수행해 왔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나마 일행들이 격의 없이 편안하게 그녀를 대해줬기에 여기까지 어떻게든 참고 버티며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파벨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후드가 달린 검정색 로브를 벗어 맞은편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의 상체를 꽉 죄고 있던 가죽갑옷까지도 벗어던졌다.
그러자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아 살 것 같았던 그녀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때,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문 앞을 지나간다. 아마 욕조에 물을 넣으려고 온 종업원들의 발소리인 모양이다.
자신은 두 사람이 목욕을 마친 후에나 들어가게 될 테니 물은 거의 식어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목욕을 다 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테니, 잠깐 눈 좀 붙일까?’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편안한 시간이다.
모두 자신에게 잘 대해 준다고는 하나, 의식 깊숙한 곳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파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있게 되니 그동안 쌓여왔던 긴장이 풀리며 사르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막 횡단을, 그것도 강행군을 막 끝낸 자신의 몸은 극심한 피로를 호소해 오고 있었다.
여기까지 뒤처지지 않고 따라온 것만 해도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것도 다 강행군을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피로를 풀어줬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파벨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는 그녀를 라디아가 제지했다.
“괜찮아. 그냥 편안히 누워있어.”
그렇다고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파벨은 일단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파벨을 라디아가 당혹스러운 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그동안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파벨에 대해 아직도 너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되어서 말이지. 이렇게 관능적인 옷차림을 좋아할 거라고는…….”
파벨은 라디아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벨은 깨달았다. 자신이 로브는 물론이고, 가죽갑옷까지 다 벗어버렸다는 것을.
덕분에 파벨이 안에 입고 있었던 가죽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가죽옷은 정보부에서 미인계를 위해 특수 주문제작한 옷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입고 있는 가죽옷이 그렇게 농염(濃艶)한 형태는 아니다. 너무 과도한 노출은 상대에게 오히려 경각심을 안겨줄 수 있기에 노출은 최소화하였다.
대신 고급스런 디자인에 은근히 몸매를 드러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옷이 그녀가 입기에는 치수가 좀 작다는 것.
그 때문에 은근한 강조가 조금 심한 강조로 바뀌어 있었다.
가죽 특유의 밀착감으로 인해 그녀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가슴 윗부분은 터질 듯 솟아올라 있었다.
지금껏 함께 여행하며 로브를 외투 겸 이불 삼아 줄곧 껴입고 생활했었기에 안에 뭘 입고 있는지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파벨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따로 챙겨온 옷이 없었기에 파벨은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 하… 하…, 내가 좀 야했나?”
“흠,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라디아는 다 알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몰랐어. 파벨이 월터를 유혹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 줄은…….”
“에? 그건 무슨 말씀……?”
당황한 탓에 존댓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자 곧바로 엄한 질책이 가해진다.
“반말로 해.”
“미안. 조심할게.”
파벨이 황당해하건 말건 라디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가 봤을 때 앙큼하게도 시치미 떼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저만한 남자 만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그것도 사막을 횡단하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근데 이거 어떻게 하지? 기대 많이 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우리들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아버렸네.”
라디아의 말에 파벨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으려니 얘기가 복잡해진다.
월터를 유혹하기 위해 이런 옷을 입고 있다? 아니면 내 원래 취향이 이런 걸 좋아한다?
둘 다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남자를 유혹하기 딱 좋은 그런 야시시한 옷이었으니까.
잠시 고심하던 파벨은 억지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느니 그냥 상대방이 오해하도록 놔두기로 하였다.
어차피 이번 임무만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얼굴 볼 일 없을 테니까.
파벨은 최대한 평상심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파르르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그렇게까지 방해된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호호호, 그렇다면 다행이고. 참, 내가 온 용건은 파벨이 먼저 씻으라고. 레이디께선 뜨거운 물에 목욕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 여기 특실을 일부러 잡으신 건 나를 위해서 그런 거지.”
라디아가 「레이디께선」이라는 말을 했지만 파벨은 감히 조심하라며 질책하지 못했다. 그저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디아 먼저 씻어. 그다음에 내가 들어갈게.”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씻을게.”
“신경 써줘서 고마워.”
“뭘, 우린 죽음의 사막을 함께 건너온 동료잖아.”
그러면서 유쾌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는 라디아.
분명 방금 봤던 자신의 야한 옷에 대한 얘기가 다이아나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물론 라디아가 더욱 자극적으로 살을 듬뿍 붙여서. 그리고 그 얘기는 다이아나를 통해 월터의 귀에까지 들어갈 게 뻔했다.
‘젠장할. 앞으로 다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보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싶은 파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