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바짝 긴장해서 의심 어린 눈길로 이곳저곳을 정탐했지만, 아무리 봐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보내는 족족 첩자들이 행방불명된 곳이었건만, 서쪽 대륙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무래도 잘못 짚은 거 같아.”
월터의 말에 다이아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잘못 짚었다니…,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래. 느낌이.”
월터가 이런 특수작전에 대한 경험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사한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다이아나는 선뜻 그의 의견에 동조하기 힘들었다.
“느낌은 무슨? 겨우 2주일 정도밖에 정탐하지 않았는데 무슨 느낌 타령이야. 최소한 한 달은 조사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야지. 게다가 우리는 아직 왕도 쪽은 둘러보지도 않은 상태잖아. 내일 바로 왕도로 떠나자고.”
그때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었던 파벨이 끼어들었다. 그동안 함께 지낸 것만 해도 벌써 2개월이 다 되어갔다. 덕분에 심약한 그녀 역시 자신의 의견을 타진할 수 있을 정도로 반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난 월터의 의견에 동감이야.”
다이아나 일행은 첫 만남에 보여줬던 파벨의 어리숙한 모습에 월터와 같은 뛰어난 기사가 왜 저런 멍청한 계집을 데리고 다니나? 하는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월터가 파벨을 데리고 온 게 단지 마법 실력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숫기 없는 파벨이 어렵게 말을 꺼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다이아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설마, 파벨도 느낌이라고 얼버무릴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나 진짜 실망할 거야.”
살짝 비꼬며 놀리는 듯한 다이아나의 말투에 소심한 파벨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듯 그녀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레이디 다이아나.”
“레이디 다이아나라고 부르지 말랬지?”
“죄, 죄송해요. 셀리나 님.”
“존칭인 「요」나 「님」도 다 빼고. 이러면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 힘들겠는데. 월터, 얘는 그냥 돌려보내지?”
“미, 미안, 셀리나.”
다이아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그렇게 말하면 돼. 계속 말해 봐.”
“아, 알다시피 내 전공은 정보 분석이야. 정보부에 입사한 이래 지금껏 그것만 해왔어.”
그녀의 소심한 성격 탓에 정보 분석과 통신 외에 다른 일을 맡길 수가 없었기에 취해진 조치였지만, 그 덕분에 그녀는 정보 분석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안 그래도 두뇌가 뛰어난 사람만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만큼, 그녀의 분석력은 월터와 같은 사람 수십 명이 투입된다 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외국에서 숨어들어오는 첩자들을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없애고 있는 걸 보면 뭔가 큰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런 일이라면 전쟁 외에 뭐가 있을까? 이런 건 몇 군데만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면 돼. 이곳의 용병길드, 몇몇 유력 상인들, 그리고 요충지에 위치한 성채나 요새에 주둔 중인 병력 상황…….”
사막에 접해있는 국가들 중에서 동쪽 대륙으로의 침공을 획책할 만큼 강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있다면 그만한 능력을 지닌 대국이 사막에 접해있는 어떤 나라와 손을 잡은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 나라가 혼자 몰래 군사력을 비축하는 거라면 몰라도 여러 나라가 연합하게 되면 비밀유지는 몇 배나 어려워진다.
거기에 자국의 대규모 병력을 사막에 접해있는 다른 나라로 이동시키는 것이라면 비밀유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소국에서 대국의 대병력이 자국을 그냥 통과해 지나간다는 말을 믿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뭔가 불협화음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데, 이곳에는 그 어떤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추론을 말한 파벨은 천천히, 하지만 힘있게 고개를 들어 다이아나를 바라보며 결론을 말했다.
“여기는 절대로 아니야.”
그 말에 다이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를 살펴보자는 거지?”
다이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파벨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도, 도시국가 연합…….”
다이아나는 힐끗 라디아 콜린스의 눈치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똑똑한 그녀의 생각도 자신과 같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인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건 다이아나도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도시국가 연합을 살펴보자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거기는 알카사스는 커녕, 무역로를 제압할 군사력조차 없어.”
월터도 다이아나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그는 여기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그렇다고 범인이 도시국가 연합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셀리나의 말이 맞아. 도시국가 연합 따위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대제국과 비등한 군사력을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두 사람의 반대 의견에도 파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살펴볼 만한 곳은 거기뿐이라고 생각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쏘아붙이듯 튀어나온 다이아나의 질문에 파벨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냥 대답을 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기에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야.”
항구라는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라디아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그래! 항구를 생각하지 못했네. 항구를 통해서라면 대규모 병력은 물론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손쉽게 수송할 수 있지. 그것도 주변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월터는 파벨의 의견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야, 파벨. 남쪽 바다는 드래곤이 설치는 탓에 병력 이동이 아예 불가능해.”
월터의 반박에 대신 대답해 준 것은 라디아였다.
“월터의 말도 맞긴 해. 하지만 그건 서쪽 대륙의 국가가 도시국가를 침공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일 때의 일이지. 만약 그 침공 세력이 도시국가들이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말에 월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도시국가들이 주가 되고, 서쪽의 몇몇 나라들이 그들을 도와 지원군을 파견해주는 경우를 말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드래곤이 간섭할 가능성이 없어지지. 그들은 도시국가들과 한편이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디아의 말을 듣고 있던 월터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듯하긴 한데, 라디아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몇 가지 있어. 우선 드래곤 탓에 알카사스가 마음껏 군사력을 투입할 수 없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무역로를 통째로 뺏기게 된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도시국가들이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 해도 알카사스에 비할 수는 없어. 그들이 드래곤에게 1톤의 황금을 줬다면, 알카사스는 그 열 배, 아니 백배라도 건네줄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잠시 말을 멈춘 월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만 눈감아준다면 알카사스의 전력은 도시국가 따위는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설혹 도시국가 연합이 어떻게 줄타기를 잘해서 무역로를 삼키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끌어들인 외세에 역으로 잡아먹힐 가능성이 다분하지. 알카사스를 제압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외세를 도시국가 연합이 통제할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거든. 그건 도시국가의 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래서 월터는 도시국가 연합이 이 일과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로군.”
월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이아나는 그렇지 않았다.
“월터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도시국가들 외에 딱히 의심이 가는 국가도 없는 만큼 지금은 파벨의 의견대로 도시국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다이아나의 제안에 라디아도 찬성했다.
“나도 파벨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이야.”
“월터의 생각은 어때?”
모두의 시선이 월터에게로 쏠렸다.
분명 도시국가로 가는 게 헛걸음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다이아나까지 이렇게 나오니 월터로서도 더 이상 반대를 하기도 그랬다.
게다가 다른 뚜렷한 대안도 없었고 말이다.
월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삼 대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 도시국가로 가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