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일행이 사막 횡단을 시작한 뒤 여덟 번째 만난 성읍.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그들은 성 밖에 위치한 외지인을 위한 숙소에 짐을 푼 다음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소모된 물자를 보충하고, 성내 분위기를 탐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이보쇼! 누구 없소? 경비병!”
월터는 물론이고 파벨이 사막 부족의 언어로 경비병을 불러 봤지만, 성벽 위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이미 해가 뜬지 오래라 주위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활동할 만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뜨거운 정오라 해도 성벽 주위를 경계하기 위한 경비병 한두 명은 반드시 있었다.
“사람이 없는 빈 성인가?”
사막 부족은 기본적으로 유목을 통해 식량을 자급자족한다. 때문에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아무리 풀이 수북이 자라 있다 해도 가축들을 풀어 놓으면 한 달도 채 지나기도 전에 주변은 풀 한 포기 찾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리기에, 사막 여기저기에 이런 성읍을 몇 개씩이나 지어놓고 계속 옮겨 다니며 생활한다.
그렇기에 주민이 없는 텅 빈 성읍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 여행자는 성 밖에 위치한 숙소에서 묵고, 떠날 때 적당히 돈을 놓고 가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월터의 감이 그를 성벽 위로 올라가게 했다.
얼마 전에 봤던 그냥 파묻으면 언데드가 된다고 해서 시체의 목을 자르던 사람들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월터는 가볍게 뛰어오르는 것만으로도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성벽 위로 올라간 월터의 두 눈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성 안쪽에 수도 없이 쓰러져 있는 가축들의 사체들을 봤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에 사체들은 미라처럼 바짝 말라붙어 가고 있었지만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인지 성벽 안은 사체가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 방향이 월터의 앞쪽이 아닌 등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기에 사체가 썩어가는 냄새를 성벽 아래에서 맡지 못했던 것이다.
월터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자,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벨이 큰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뭔가 있어?”
월터는 대답 대신 아래로 내려가 살짝 파벨을 껴안고 다시금 성벽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꺄악! 뭐, 뭐 하시는 거예요?”
깜짝 놀란 파벨이 새된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그녀는 월터와 함께 성벽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체들이 즐비하게 쓰러져있는 참혹한 광경을.
성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이해가 빠를 거 같아서…….”
“이, 이건 뭐죠? 어떻게 이런 끔찍한…….”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이때, 아래쪽에 있던 다이아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 성안의 참혹한 광경을 보자마자 그녀 역시 월터의 뒤를 따라 성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잠깐! 같이 가, 월터!”
월터의 이름을 부르며 땅바닥에 채 내려서기도 전에 다이아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부패되어 가고 있던 가축들의 사체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던 것이다.
일어선 가축들의 사체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떤 사체는 부패가 너무 진행되어 눈알이 빠져 텅 빈 눈구덩이만 있기도 했고, 또 어떤 사체는 다리가 두어 개 떨어져 나가 일어서지 못하고 땅바닥을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가축들의 사체 종류는 다양했다. 양들과 염소, 낙타, 말…….
사막 부족들이 키우던 모든 가축들의 사체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월터와 다이아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 순간, 월터의 검이 부드럽게 검집을 빠져나왔다.
화려한 칼부림과 함께 피떡이 되어 반대편으로 터져나가듯 흩어지는 가축의 사체들! 그와 함께 가죽 속에 농축되어 있던 악취가 터져 나오며 지금껏 맡아보지 못했던 끔찍스런 악취가 코를 찌른다.
“컥!!”
월터를 돕기 위해 칼을 뽑으려던 다이아나는 급히 숨을 멈추고 재빨리 성벽 위로 도망쳐 버렸다.
너무 지독한 악취 때문에 사체들을 분쇄할 마음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월터가 이 정도 사체들 정도로 곤란해지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욱!!”
참혹한 광경과 지독한 악취에 파벨은 성벽 위에서 연신 구역질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망연한 표정으로 성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월터 혼자만이 성벽 아래에 남아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월터! 잠깐만! 차라리 성문을 열어두는 건 어때?”
한참 칼부림을 하고 있던 월터는 라디아의 말에 성벽 위로 도약해 올라와 물었다.
“성문을 열어주자니, 그건 무슨 말이야?”
가축들의 사체들은 월터가 갑자기 자신들의 앞에서 사라지자 일행들이 서 있는 성벽 아래쪽으로 모여들었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지만, 사체들은 계단 쪽으로는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월터 일행이 서 있는 성벽 바로 밑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체들의 썩어 문드러진 눈으로 월터 일행을 보고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생명의 기운에 반응해 공격해 왔었던 모양이다.
생명의 기운은 부정한 기운만큼이나 언데드들이 아주 좋아하는 양식이었으니까.
그때쯤 되자 성안에 있는 집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의 시체들이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와 가축 사체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역시 이 끔찍한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집 속으로 도망쳐 숨어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리라.
사람의 시체…, 좀비라 불리는 그들 역시 월터 일행이 서 있는 성벽 아래에서 가축들의 사체들처럼 우왕좌왕하고 있는 걸 보면, 지성은 없는 모양이다.
한참 언데드들을 바라보던 라디아가 월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야. 건조한 사막은 부정한 기운이 모이기에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거든.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저것들을 성 밖으로 풀어놓는 거지.”
“풀어놓다니?”
“성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자신들의 양식이 되는 부정한 기운이 더욱 짙은 곳을 찾아갈 거야. 만약 이곳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거라면 여기에 남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정한 기운이 더욱 강한 곳을 향해 이동을 시작하겠지.”
“그럼 라디아는 부정한 기운의 근원이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얼마 전에 지나쳤던 성읍을 생각해 봐. 그곳에서는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며 목을 자르고 있었잖아. 그곳에 비해 여기는 완전히 시체판이고 말이야. 이 괴이한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라디아는 고개를 돌려 남쪽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성문을 열어주면 시체들이 저쪽을 향해 이동할 가능성이 커.”
언데드들을 싹 다 소탕한 다음 성안을 조사해 볼까 생각했던 월터였지만, 라디아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한참을 구역질하던 파벨은 자신 혼자 겁에 질려 못난 꼴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입가를 대충 닦은 후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온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최대한 숨기려고 했겠지만, 월터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파벨을 힐끗 바라본 월터는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일단 충분히 휴식부터 취한 후에 성문을 열기로 하자. 저놈들이 얼마나 멀리 갈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여기까지 말하던 월터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급히 말을 덧붙였다.
“참, 저런 언데드들이 활동하기 좋아하는 시간대가 따로 있나? 언데드들은 음침하고 습기 찬 그런 환경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었던 거 같은데…….”
“그런 건 없는 걸로 알고 있어. 그리고 음침하고 습기 찬 환경이라는 것도, 그런 곳이 부정한 기운이 모이기 쉬운 곳이기에 그런 것이고. 부정한 기운만 있다면, 여기처럼 열사의 사막이라도 언데드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흠, 그렇다면 라디아는 이 참극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설마 마왕이라도 강림하려는 건가?”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젓던 라디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것보다는 누군가가 몹쓸 장난을 치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강력한 신성력(神聖力)을 지닌 아티펙트(Artifact)를 통해 광대한 성역(聖域)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라디아의 말에 월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의문을 제기했다.
“신성력?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정한 기운이?”
월터의 의문에 파벨이 옆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백마법과 흑마법 역시 한 갈래에서 갈라진 거예요.”
“또! 또! 존댓말!”
다이아나의 지적에 파벨은 찔끔해 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 죄송……. 아, 아니 미안해.”
“파벨은 우리가 함께 다니기로 한 조건을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아. 조심해. 그건 그렇고 계속 말해 봐.”
“백마법과 흑마법은 둘 다 신적 존재로부터 그 능력을 받아 권능을 행사하는 거야. 한쪽은 신, 또 한쪽은 마신. 대상만 다를 뿐이지 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사용한다는 건 똑같아.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마법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법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거야.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마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거든.”
“그, 그랬군……. 몰랐어.”
월터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신성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가 그토록 막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탄에만 탑승하면 젬병이었던 거구나. 그리고 아르곤에서 마법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타이탄을 제작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러니까 백마법으로 가능하다고 하면 흑마법으로도 가능할 거라는 얘기지?”
“이렇게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성역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엄청난 아티펙트가 필요한 걸까?”
“꼭 한 개라는 법은 없지. 어쨌거나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나도 그쪽으로는 더 이상 아는 것도 없고 말이야.”
“그래, 우선 식사부터 하자고. 이번 추적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알 수가 없으니, 든든하게 먹어놓고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