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4화 (904/930)

하루 동안 푹 휴식을 취한 월터 일행은 든든하게 식사까지 마친 후에야 행동을 시작했다.

오후 4시쯤이었기에 뜨거운 열기는 한풀 꺾인 시간이다.

모두들 멀찌감치 떨어져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월터 혼자 성으로 달려가 성문을 활짝 열었다.

성문을 열자마자 월터도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내빼버렸기에, 언데드들은 생명의 기척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한동안 돌아다녔음에도 생명체의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자, 수색을 포기한 언데드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와 동쪽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라디아의 말대로 자신들의 양식인 부정한 기운이 강한 곳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데드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동쪽이었다.

도시국가가 있는 동남쪽으로 갈 거라 예상했었는데…….

“어라? 동쪽으로 가네.”

“그렇다면 이 짓을 한 범인은 도시국가가 아니라는 소리네. 시체들이 알카사스 쪽으로 가는 거 보니, 범인은 알카사스가 틀림없어.”

월터의 말에 파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것들이 동쪽으로 간다고 해서 알카사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가 없어. 사막을 언데드 소굴로 만들어 놓으면 더 이상 사막을 통한 무역은 불가능해져. 그렇게 되면 그 이익은 고스란히 도시국가들이 차지하게 되지 않겠어? 그런 이유로 나는 도시국가가 이 사태의 범인일 거라 생각해.”

그러자 라디아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 만약 사막이 언데드 소굴이 되면 도시국가들도 무사할 수가 없거든. 그리고 그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드래곤들이 알게 되면 되레 드래곤들에게 멸망당할 수도 있어. 아니면 버림받거나.”

라디아의 주장에 파벨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으니까.

“맞아, 드래곤은 사악한 것을 싫어하니까.”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대적이 불가능한 마왕 강림을 지금껏 모두 해결한 것은 드래곤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지만, 드래곤이 사악한 것을 싫어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드래곤과 마왕이 싸우게 된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다 보니 드래곤은 사악한 것을 싫어한다고 사람들은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이아나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드래곤에게 영문도 모르고 묵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던 그 끔찍한 기억.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나누는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에 대한 추억담(?)을 우연히 엿듣기도 했었는데, 그건 공명정대하고 위대한 이라는 단어와는 아예 거리가 먼 존재였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 사실을 여기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동료지만 월터는 코린트 제국의 근위기사다. 적국의 기사에게 자신들의 수호룡(?)에 얽힌 뒷얘기를 들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타국에서는 모두들 치레아 공국이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줄 알고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라디아의 말이 맞아. 아직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야. 괜히 선입견을 가져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그런 다이아나의 말에 월터가 반박했다.

“섣부른 예단이 아니야, 셀리나. 기후 조건으로 봤을 때, 언데드가 발생하기에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는 사막에서 언데드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잖아. 만약 라디아의 말대로 이게 아티펙트로 인한 거라면, 그런 무시무시한 권능을 지닌 아티펙트의 가치 또한 엄청난 것이겠지? 그런 아티펙트를 한두 개도 아닌 대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나라는 이 근처에서 알카사스밖에 없어.”

물론, 이건 월터의 개인적인 감정이 듬뿍 실린 의견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알카사스와는 감정이 안좋았으니까.

“흐음…, 월터의 말대로 알카사스가 가장 의심스럽긴 하지. 이동 방향도 그렇고…….”

여기까지 말하던 다이아나는 다시 라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알카사스 정도면 이런 아티펙트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

라디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마법과는 계통이 아예 달라. 하지만 알카사스의 풍부한 재력이라면 어딘가에서 구입해 올 수는 있겠지.”

“이런 아티펙트를 만들 수 있는 국가는?”

“동쪽 대륙에서는 아르곤 제국…….”

라디아의 말에 월터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잠깐! 신성 아르곤 제국은 흑마법이 아니라 백마법이잖아.”

“그건 나도 잘 알아. 아르곤 제국이 얼마나 흑마법을 증오하고 있는지 말이야.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흑마법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과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도 아르곤이야.”

그제서야 라디아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깨닫고 월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오, 그러니까 그 지식을 이용해서 이런 아티펙트를 제작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맞아. 그동안 축적된 방대한 지식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흑마법사들을 잡아다가 만들던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라디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동쪽 대륙에는 아르곤 제국 말고는 이 정도 아티펙트를 제작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나 나라가 없어. 마도대전 이후로 흑마법사들을 철저하게 없애버렸으니까. 하지만 서쪽 대륙은 얘기가 다르지. 내 생각에는 서쪽 대륙에서 이 아티펙트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커. 그리고 이런 아티펙트의 가격은 엄청나게 고가일 테니, 그걸 사들여서 여기에 사용한 건 아주 재정이 넉넉한 나라일 거라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겠지. 아니면 서쪽 대륙에서 엿 먹어라 하는 심보로 이런 사단을 벌인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계속 따라가 보자. 시체들이 어디로 가는 건지, 저것들의 뒤를 쫓다 보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겠어? 그놈의 아티펙트인지 뭔지…….”

월터 일행은 언데드들이 자신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멀찌감치 거리를 벌린 상태로 그 뒤를 쫓았다.

공격할 때는 제법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던 언데드들이었지만, 이동할 때는 아주 느릿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언데드가 어떤 건지 얘기는 들었지만, 어떻게 저런 상태로 움직일 수가 있는 거지? 부패 상태를 보면 근육은 오래전에 제 기능을 상실했을 텐데 말이야.”

파벨의 의문에 라디아가 대답해줬다. 다른 사람들은 언데드에 대해서 거의 그렇다 하더라 정도밖에 아는 게 없었으니까.

“부정한 기운(대개 흑마법)에 오염된 시체 혹은 뼈가 언데드가 되잖아? 근육이나 살점이 붙어있는 경우에는 좀비, 뼈만 남아있는 경우에는 스켈레톤이라고 부르지만 어쨌든 둘 다 언데드야. 결론은 언데드에게는 근육이 있든 없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저들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생명체로부터 뺏은 생명력과 부정한 기운이거든.”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우리들이 나타나자 움직이기 시작한 거구나? 우리들의 생명력을 뺏으려고.”

“그런 거지. 하지만 우리들이 사라졌으니, 저들은 또 다른 힘의 원천인 부정한 기운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 거야.”

“아까 성읍에는 부정한 기운이 없었을까?”

“있었으니 저것들이 생존하고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저들은 본능적으로 더욱 많은 부정한 기운을 원해. 아마 저들이 가고 있는 저쪽 방향에 뭔가가 있을 거야. 저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든 뭔가가…….”

파벨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는 태양을 힐끗 바라본 다음 중얼거렸다.

“최대한 빨리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 느릿느릿한 굼벵이 같은 것들을 쫓기 위해 이 뜨거운 태양 빛에 온몸이 익어가는 건 정말 싫어.”

월터의 기지로 하루 푹 쉬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 밀려드는 잠과 싸우며 시체들의 뒤를 쫓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언데드들의 저 느릿한 움직임으로 봤을 때, 이 미행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될지 알 수가 없었다.

베이라 성 기습 작전

페가수스 용병단은 낮에는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쉬고, 밤에만 이동했다.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해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은밀하게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홉킨스는 지도를 잘 살펴보고, 성읍 근처로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원주민과 접촉하게 되면 자신들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도록 무조건 죽여버리라는 명령까지 부하들에게 하달해 둔 상태였다.

다행이라면, 사막 성읍들은 서로 꽤 넓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건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자원의 양도 빈약할뿐더러, 성읍은 필연적으로 물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건설해야 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페가수스 용병단은 성읍과 성읍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막 깊숙이 숨어들어 갈 수가 있었다.

베이라 성은 과거 알카사스 부족연합에서 방어거점으로 만든 성들 중 하나로,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허접스럽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사막 성읍들과 달리 석벽으로 제대로 축조된 성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카사스 부족연합이 이 일대에서 철수할 때, 성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을 해체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만약 마법진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었다면 홉킨스는 절대로 이런 무모한 작전을 감행하지 않았으리라.

마법진으로 보호되는 막강한 성벽은 타이탄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뚫고 들어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베이라 성 인근에 도착한 홉킨스는 부하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한 후, 휘하 대대장들과 마법사들만을 거느리고 정찰을 나섰다.

그가 이번 작전에 지원받은 마법사는 모두 여섯 명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직속으로 한 명을 두고, 나머지는 각 대대장들에게 붙여 두고 있었다. 통신기로 쓰기 위해서.

아직 자신들에게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푹~ 놓고 있을 때 기습하면 손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는 홉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베이라 성의 경계 상태는 삼엄했다.

어떤 놈이 성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경계심이 많은 성격인 모양이다.

커다란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옆에 있는 작은 쪽문만이 열려있어 그곳으로만 사람과 가축들이 드나들고 있다.

높게 솟은 망루에는 꽤 많은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성문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 보루(堡壘)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들어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렇듯 삼엄한 경계 태세로 봤을 때 보루가 비어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썩을! 주변이 이렇게 탁 트여있는데, 누가 쳐들어온다고 경계 태세가 이렇게 좋아?”

사실, 베이라 성의 경계 태세가 강화되어 있는 건 알카사스와는 전혀 무관했다. 최근 들어 사막 쪽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보니 그 때문에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홉킨스 일행이 알 리가 없다 보니, 자신들 때문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라 성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수석대대장 스미스가 입을 열었다.

“저런 상태라면 기습은 불가능합니다, 연대장님.”

홉킨스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수립한 작전은 적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하여 성문에다 아이템을 설치한 뒤 폭파시켜 문을 뚫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성벽 위에서 쏴대는 공격에 기습하는 부하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위험이 있긴 했지만, 적이 방심하고 있다면 그리 큰 피해 없이 점령이 가능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경계 태세가 너무 달랐다. 저 정도로 경계가 철저하다면, 아무리 전격적으로 기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개활지를 건너 성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당할 가능성이 컸다.

설혹,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작전을 성공시켜 성문을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할 게 뻔했다.

페가수스 용병단의 병력은 고작 천 명 남짓, 성문 하나 점령하겠다고 무리하다 병력 손실이 커지면 오히려 이쪽이 베이라 성의 반격에 전멸당할 가능성이 컸다.

“대상(隊商)으로 위장해서 접근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참을 고심하던 미하엘이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계책 하나를 제안해 봤지만 다른 대대장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들의 행색을 좀 봐라. 과연 상인으로 위장이 가능한 몰골들인지……?”

“뭔가 팔 만한 상품으로 위장할 만한 물건도 없잖아.”

“천 명이나 되는 중무장한 떼거리가 나타났는데, 너 같으면 상인이라고 믿겠냐?”

대대장들의 말을 듣고 있던 홉킨스의 시선이 좋은 생각이 없냐는 듯 마법사들로 향했다.

마법사들의 두뇌가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마법사들인 만큼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나 마법으로 이 난관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홉킨스는 자신의 직속마법사인 펜달을 향해 입을 열었다.

“펜달,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펜달은 홉킨스보다 열 살쯤 나이가 많은 마법사였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마법사들 중에서 그가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홉킨스의 직속 통신기로 선택되었다.

경험 많고 노련한 마법사인 만큼 홉킨스는 펜달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청하고 있었다.

“아주 튼튼하게 잘 축성해 놓은 성곽이야. 유일한 단점이라면 방어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공성병기는 가져오지 않은 걸로 아는데, 뭔가 준비해온 게 있나?”

이동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공성병기를 보지 못했기에 묻는 것이다.

펜달의 질문에 홉킨스는 씨익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작전을 위해 단장님께 말해서 특별히 웜 킬러(Worm Killer)를 받아왔지.”

웜 킬러는 샌드 웜(Sand Worm)이나 록 웜(Rock Worm) 같은 초대형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폭발형 마법아이템이다.

웜 종류의 몬스터는 외갑이 금속성으로 워낙 단단해서 전투도끼로 찍어도 흠집조차 내기 힘들었다. 거기에다가 웜 종류는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숨을 수도 있었기에 집중공격을 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된 게 바로 웜 킬러였다.

웜에게 먹일 수만 있다면, 강력한 폭발력으로 웜을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튼튼한 금속성 외피를 몸에 두르고 있다 해도 몸 안에서 터져나오는 폭발에 버틸 수는 없을 테니까.

홉킨스가 웜 킬러를 가져온 이유는 뻔했다. 그 강력한 폭발력을 이용해 성문을 파괴하고 들어가겠다는 것이리라.

“흠, 적에게 들키지 않고 성문 앞까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가 관건이로군.”

“바로 그거야. 뭔가 방법이 없겠나?”

펜달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난감한 듯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베이라 성 주변은 탁 트인 평지다.

사막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관목들과 억센 풀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을 뿐이다.

성 위로 높게 솟아있는 전망탑에서 바라보면 10킬로미터 밖의 움직임까지도 훤히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두 명도 아니고 천 명이 움직이는 걸 숨겨야 하는데, 통신기로나 쓰이고 있는 저급 마법사들의 능력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물론 천 명이 동시에 움직이지 않고 극소수의 공격조만 투입한다면 침투, 폭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파괴된 성문을 적들이 복구하게 된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모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고심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대책 회의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사막 저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뭔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눈에 확 띄는 붉은 머리카락, 단장에게서 얘기를 들었던 바로 그 마법사였다. 가급적 그를 쓰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를 외면하기에는 힘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홉킨스는 그를 불렀다.

“자네, 랄프 디겔이라고 했나?”

그러자 천천히 시선을 돌려 홉킨스를 바라보는 사내, 마치 조각을 한 듯한 아름다운 얼굴이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자네 표정을 보니 뭔가 방법이 있어 보이는군.”

여유로운 표정의 랄프 디겔을 보자 어쩌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홉킨스는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대답에 홉킨스는 하마터면 발작할 뻔했다.

감히 지금처럼 중요한 회의 중에 딴생각이라니! 딴 놈 같았으면 가죽을 벗겨 뜨거운 사막 위에 던져놨겠지만, 그는 애써 참았다. 단장의 당부가 떠오른 탓이다.

홉킨스는 화를 억누르며 방금 전에 했던 얘기를 반복해 아르티어스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분노어린 눈빛으로 아르티어스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자네라면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중요한 회의 중에 딴생각을 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 안 그런가?”

당장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홉킨스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는 것을 좌중의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분노한 홉킨스 앞에서도 디겔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뭔가 대책이 있는 걸까?

아르티어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쓱 넘기며 홉킨스를 향해 말했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아르티어스의 태연한 말투에 속이 뒤집힌 건 다른 마법사들이었다.

그들도 디겔이 대지마법 쪽 전문이라는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상태였다.

대지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분야였다. 그런 되먹지도 않은 마법으로 고블린 킬러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것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데, 그 조그만 명성을 믿고 저렇게 오만하게 나오다니.

이렇게 되면 여기 있는 지휘관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펜달이 다른 모든 마법사를 대표해서 아르티어스를 향해 이죽거렸다.

“흥! 자네는 그까짓 알량한 대지마법으로 저 단단한 성벽을 부술 수 있다는 건가?”

아르티어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내 능력으로 성벽을 부술 수는 없지요. 그것도 저렇게 튼튼한 성벽은 말이죠.”

아르티어스의 말에 뭔가 느낀 듯 홉킨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부술 수는 없다고 했지만, 뭔가 방법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그럼 성벽까지 들키지 않고 지하 터널이라도 팔 수 있다는 건가?”

“아닙니다. 이럴 때는 대지마법보다 환영(幻影)마법이 쓸만하죠. 그걸로 경계병들의 시야를 가리면 되니까요.”

환영마법은 대지마법보다도 더 인기가 없는 마법이었다.

남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환영을 만들기도 어려웠고, 그 정도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너무나도 신통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딴 마법을 익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자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병사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천 명이란 말이야.”

아르티어스를 매섭게 꾸짖은 펜달은 홉킨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거침없이 단언했다.

“저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하지만 홉킨스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방법이 있다며 대안을 말한 마법사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환영마법으로 그게 가능하긴 한가? 펜달의 말대로 천 명씩이나 되는 대병력을 감춰야 하는데?”

“훤한 대낮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야음을 틈타 움직인다면 그리 고난도의 환영마법이 아니더라도 경계병들의 눈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성벽에서 사오십 미터 근처까지 접근한다면 혹 발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티어스의 말에 충분히 가능성을 엿본 홉킨스의 분노는 이미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회의 중에 딴짓을 해도 될 만큼의 유능한 마법사였으니까.

홉킨스는 아르티어스의 두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물론이지. 그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어도 충분해. 부탁하네. 자네 어깨에 이번 작전의 성패가 달려있으니 말일세.”

“참. 대원들에게 가급적 금속성 빛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검정 천으로 몸을 감고, 병장기는 그을음을 묻혀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하고 말입니다. 환영마법은 적의 시야만 혼란시킬 수 있을 뿐, 소리는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소리가 날 만한 것들은 최대한 막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핫핫, 걱정하지 말게. 내가 지금껏 야습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도록 확실하게 준비하지. 그럼 자네만 믿겠네. 이봐, 뭐 하고들 있나! 빨리빨리 대원들에게 방금 들은 대로 철저하게 준비를 시켜!”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펜달은 아르티어스에게 으르렁거렸다.

“만약 실패하기만 해봐. 이 바닥에는 아예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마.”

아르티어스는 맞받아치는 대신 어깨만 으쓱한 다음 홉킨스 연대장 일행을 뒤따라 걸어가 버렸다.

저런 송사리하고는 싸울 의욕조차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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