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음을 틈탄 기습이긴 했지만, 오늘 밤은 야습하기에 그리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두 개의 달 중에 큰 달이 밤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홉킨스는 위장에 더욱 만전을 기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시작해!”
홉킨스의 지시에 따라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구사하여 용병들의 앞을 어두운 사막의 환영으로 가려 버렸다.
마법으로 가릴 수 있는 면적에 한계가 있기에 될 수 있으면 종대를 유지하여, 환영마법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용병들에게는 저급 환영마법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아르티어스가 사용한 건 5싸이클급이었다.
이 정도라면 성 앞 10미터까지 접근해 들어가도 경계병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됐습니다.”
홉킨스는 긴장 어린 시선으로 저 멀리 보이는 성벽 위를 바라봤다.
성벽 위 여기저기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리 밤중이라고 하지만 달빛까지 훤히 비추고 있는 상황이라 이 많은 병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바로 경계병들의 시야에 잡힐 것이다.
홉킨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흑갈색의 조잡한 환상.
이 환상이 성벽 위의 경비병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홉킨스로서는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이것만 믿고 전진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디겔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굳힌 홉킨스는 손을 번쩍 들었다가 앞으로 쭉 내뻗으며 낮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진격!”
그의 명령에 따라 각 대대장들이 부하들을 이끌며 앞으로 나섰다.
“각 중대 전진! 최대한 소음을 줄여라. 각 중대장들은 환영 밖으로 대원들이 나가지 않도록 잘 살펴봐라!”
환영마법의 중심축인 아르티어스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감에 따라 환영도 앞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그 환영 뒤에 숨어 숨조차 죽이고 전진을 시작했다.
성벽 위에 경계병들이 득실거렸기에 만약 발각이라도 되는 순간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아무리 환영마법으로 앞을 가리고 간다고는 하지만 이건 보통 용기를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 주변이 모래 사막인 만큼, 발소리가 날 걱정이 없어 좋았다.
환영마법으로 이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 때문에 용병들은 모두 방패로 자신의 앞을 철저히 가리며 걸었다.
발각됨과 동시에 성 위에서 우박처럼 화살비가 쏟아지게 될 거라는 걸 모두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천천히 접근하다 보니 어느덧 100여 미터 앞까지 다가섰다.
용병들 모두 바짝 긴장한 탓인지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성벽 위 여기저기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기에, 경계를 서고 있는 적병들의 표정까지도 훤히 보였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아직 이쪽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100미터 정도의 거리라면 돌격해 들어가도 충분하다.
하지만 홉킨스는 섣부른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여기서 돌격해 봐야 곧바로 성벽에 가로막히게 되기에 그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돌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홉킨스는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더욱 거리를 좁혀나갔다.
아르티어스가 50여 미터까지는 괜찮다고 했으니, 좀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발 그리고 또 한발…….
어느 순간 홉킨스의 손이 위로 번쩍 들렸다.
그 수신호에 따라 부하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부대별로 돌격 진형을 갖추었다.
달빛이 밝은 상황에서 이토록 성벽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홉킨스의 시선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르티어스의 마법적 능력만으로도 홉킨스가 수립할 수 있는 작전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크흐흣, 앞으로 가능하면 옆에 꼭 끼고 다녀야겠군. 뺀질빼질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재능이 있어. 에구, 귀여운 놈.’
홉킨스는 시선을 돌려 최선두에서 자신의 수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공격조를 바라봤다.
공격조를 이끄는 건, 가장 위험한 이번 임무를 자원한 신참 중대장이었다.
얼마 전에 붉은전갈 용병단의 연대장을 벴다고 하는 놀라운 무용의 소유자였기에, 그가 눈여겨보고 있는 부하들 중 하나였다.
홉킨스는 손으로 그 중대장을 가리킨 후 성문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시작하라는 신호다.
공격을 개시하라는 신호를 받은 브로마네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천천히 앞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 중 경험이 풍부한 네 명만을 성문 파괴 임무에 차출시켰다.
은밀하게 접근해야 하는 만큼, 부하들 전원을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의 실력을 뻔히 알고 있는 브로마네스였기에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성벽 위쪽에서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르고 있는 부하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운데, 경비병들이 아직 자신들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부하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적들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포복을 해서 움직이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서서 천천히 움직이는 쪽이 오히려 적들의 시야에 잡히는 면적이 적다.
성벽과의 거리가 가까우니만큼, 적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포착하기만 한다면 바로 죽은 목숨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고 거침없이 걸어가는 브로마네스의 담대함에 뒤따르는 부하들 모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르티어스의 마법 실력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오해였다.
아르티어스가 펼친 환영마법은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성벽 10미터 정도까지는 접근해도 적들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모두의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일 정도로 긴장해서 바라보는 가운데, 공격조는 성문 앞 20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좀 더 성벽 가까이 접근했으면 좋겠지만, 저급 환영마법으로 그 이상 가겠다고 우기는 건 아르티어스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정도 거리까지 온 것만 해도 저급 환영마법으로는 너무 과할 정도였다.
브로마네스가 방패를 천천히 머리 위로 올리자 뒤따르던 부하들도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방패를 들어 머리 위로 올렸다. 이제 곧이어 돌격 명령이 떨어질 것이니까.
“돌격!”
이제부터는 적이 눈치채기 전에 성문 앞에 바짝 달라붙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부하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든 채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라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앗! 저, 저거 뭐야?”
“누군가 성문 앞에 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성벽 위 경계병들이 뒤늦게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환영마법에 감춰진 윤곽인 데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이 적의 공격이라는 것을 확신한 건 브로마네스와 그 부하들이 성문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이후였다.
성문 위에 설치해 놓은 쇠종이 요란한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땡땡땡땡땡.
“적이다!”
“쏴라!”
콰콰콰쾅!
경비병들이 접근해 오는 적들을 향해 다급히 화살을 날리기도 전에 엄청난 폭발음이 울리며 성문이 산산조각 터져나갔다.
베이라 성 경비병들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
성문이 박살 나자마자 마치 땅 밑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수많은 적들이 뚫린 성문을 향해 달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대의 최선두에 서 있던 미하엘이 칼을 뽑아 들고 휘하 대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대대 돌격!”
“우와아아!!”
35대대를 선두로 해서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은 모두 성안으로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선두에는 공명심에 눈이 먼 브로마네스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애검을 마구 휘두르며 호탕하게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핫, 다 죽었어!!”
“적이다!”
“누가 공격해 온 것이냐?”
외성(外城) 쪽 경비병들이 부르짖은 적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내성(內城)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은 규정대로 재빨리 내성 성문부터 바로 닫았다.
내성 안에 거주하고 있는 성주와 그 가족들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외성벽이 일반인들을 외적이나 몬스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벽이라면, 내성벽은 성내의 핵심 인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벽이다.
외성벽에 비해 훨씬 더 두께와 강도가 뛰어났고, 정예병력이 배치되어 있어 점령하기가 한층 까다롭다.
홉킨스로부터 지시를 받은 미하엘은 휘하 대대를 이끌고 미친 듯이 내성을 향해 돌격했다.
선두에서 브로마네스가 놀라운 무용을 발휘하며 뚫고 나갔지만, 아쉽게도 내성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혀버린 후였다.
“젠장!”
35대대 병력만으로 공성전은 아예 불가능했다. 게다가 공성장비조차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미하엘은 내성을 공격하는 시늉도 해보지 못하고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부하들을 후퇴시킬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대신 내성의 병력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걸 대비해서 튼튼하게 바리케이드를 쌓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35대대가 내성 입구를 확실히 틀어막고 있는 동안, 다른 대대들은 흩어져 외성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들을 소탕해 나갔다.
외성에는 거의 3천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지만, 전혀 상상치도 못한 급작스런 야습에 제대로 무기조차 들지 못하고 뛰쳐나오다 제대로 저항다운 저항조차 못 해보고 하나둘씩 각개 격파당해 버렸다.
일부 주민들 중에서 용병들을 향해 무기들 들고 적의를 드러내는 자들도 몇몇 있긴 했지만, 용병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짓밟아버렸다.
그들의 행동을 어설프게 처리했다가 자칫 주민들 전체가 일어선다면 큰일이었기에, 아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잔인하게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알카사스 왕국의 10대 용병단에 꼽히는 만큼,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의 전투력은 놀라웠다.
베이라 성의 외성 주둔군을 싹 쓸어버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홉킨스는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외성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고, 급한 대로 자신의 직속인 스미스의 22대대만을 이끌고 미하엘이 있는 내성 쪽으로 달려왔다.
일단 내성에서 적병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35대대의 미하엘 대대장을 치하한 후 내성 쪽을 자세히 살펴본 홉킨스는 혀를 내둘렀다.
예상보다 훨씬 더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안에 적병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아냈나?”
홉킨스의 질문에 미하엘이 즉각 대답했다.
“포로들을 심문해 본 결과, 내성 주둔군은 약 2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2천이라…….”
지금처럼 전격적인 기습이라면 몰라도, 정면대결로는 천하의 페가수스 용병단이라고 할지라도 점령은 거의 불가능했다.
공성장비도 전혀 없고, 병력의 수도 적병이 2배 이상 많다. 게다가 적들은 내성벽에 의지하여 싸울 수 있으니 몇 배나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홉킨스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지 태연한 표정이었다.
원래 이번 전투에서 용병단이 맡은 임무가 바로 베이라 성의 성주를 압박해 도시국가 연합에 구원을 요청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굳이 내성을 점령한다고 피를 흘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홉킨스는 미하엘과 스미스를 보고 지시했다.
“일단 여기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어라. 그러면 다른 대대가 교대하러 올 거야. 그들에게 수비 임무를 넘긴 뒤 자네들도 알아서 한몫 두둑이 챙기도록 하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기 힘들다는 거 명심하고.”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있을 내성을 털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지만, 점령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미련은 빨리 털어버리고,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했다. 철수하라는 변경백 쪽의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으흐흐! 지금 당장 부호들의 저택부터 수색하기 시작하라고 해! 빨리!”
『<묵향> 3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