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6화-37권 (906/930)

유일한 실전 경험이 블루 드래곤?

월터나 다이아나 두 사람 중 한 명이 앞서가며 언데드 무리의 동태를 살피고, 나머지는 1Km쯤 뚝 떨어져서 그 뒤를 따라갔다.

다이아나나 월터의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라디아나 파벨 같은 마법사들의 경우 불시의 상황에 대처가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정도 거리면 월터나 다이아나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도 1분이면 후위와 합류할 수 있었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고 봐야 했다.

언데드들의 뒤를 쫓은 지 어언 일주일. 느릿한 언데드들의 이동속도로 봤을 때, 처음부터 장기전이 될 거라는 걸 월터 일행은 미리 예측하고 행동했다.

다이아나와 월터는 마법사들, 특히 그중에서도 체력이 약한 파벨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덕분에 일주일 밤낮으로 추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놈들의 뒤를 쫓아야 할까?”

다이아나의 시큰둥한 질문에 라디아는 파벨의 눈치를 힐끗 살펴본 다음 조심스럽게 반말로 대답했다. 아마 파벨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으리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 같아. 너무 느리게 이동하기에 나도 처음에는 얼마나 이 짓을 해야 하나 걱정 많이 했었는데, 뜻밖에 이동 속도가 그리 느린 건 아니야. 쉬지도 않고, 잠조차 자지 않고 이동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일주일이나 계속 이렇게 놈들의 꽁무니만 쫓아가려니 짜증이 나. 몸은 괜찮아?”

“온몸이 쑤셔! 녀석들이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낙타 위에서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기까지 말하던 라디아의 두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다급한 손짓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것 봐! 저게…….”

라디아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 그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는 다이아나.

그곳에는 엄청난 모래 구름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곧이어 모래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금속성의 물체! 얼핏 원기둥처럼 보였지만, 흐릿하게 앞쪽이 입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거대 웜(Worm)이었다. 

다이아나는 웜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서책을 통해 몇 번 접한 적이 있었다. 사막에서 만났으니 샌드 웜(Sand Worm)일 것이다.

웜 종류 중에서 샌드 웜이 가장 크다고 들었지만, 저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저 정도로 입이 커다랗다면 사람 서너 명 정도는 한입에 삼킬 수 있을 듯 보였다.

“월터는?”

샌드 웜이 솟구칠 때 뿜어낸 모래 먼지 때문에 앞서가던 월터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

낙타와 함께 놈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 샌드 웜의 머리 위쪽에서 검을 빼든 월터의 모습이 보였다. 샌드 웜이 땅속에서 솟구치는 그 순간 위로 뛰어오른 모양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몬스터의 기습에서는 살기를 느낄 수가 없다. 놈들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살기를 흘리면 사냥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런 불시의 공격에서 용케 빠져나간 걸 보면 과연 코린트의 근위기사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껏 솟아올랐던 샌드 웜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수직낙하를 시작하던 월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살짝 방향을 틀더니 샌드 웜의 입가 쪽으로 떨어져, 그쪽을 박차고 옆쪽으로 점프했다.

목표물이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옆으로 도망쳤다는 걸 눈치챈 샌드 웜이 아래로 푹 내려가는 듯싶더니, 곧이어 맹렬한 기세로 월터

를 뒤쫓기 시작했다. 엄청난 덩치를 생각한다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리저리 방향을 꺾으며 회피기동을 한다면 샌드 웜을 떨쳐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다이아나가 아니었다.

“도로니아, 나와!”

순간, 공간이 열리며 청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멋을 낸 거대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가슴 부위에 크라레스 제국 국가문장, 치레아 기사단 문장, 치레아 공작가 문장이 그려져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위장을 위해 문장들을 모두 붉은색으로 덧칠해 말끔하게 지워버린 상태였다.

“머리를 열어!”

다이아나는 타이탄 위로 뛰어오르며 라디아를 향해 외쳤다.

“둘은 여기에 있어. 내가 가볼게.”

조정석에 앉자마자 도로니아와 일체가 되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며 눈앞으로 광대한 사막이 펼쳐진다. 탑승 전에 비해 눈높이가 월등하게 높다. 마치 자신이 거인이 된 듯한 느낌과 함께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양감까지.

다이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힘차게 소리쳤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도로니아의 거체가 월터를 향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다이아나가 홀로 달릴 때와 비슷한 시속 70Km라는 놀라운 속도로 질주하는 도로니아.

쿵쿵쿵쿵!!

도로니아는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잡아 왼손에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일반적인 타이탄들과 달리 도로니아는 검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쓸모없는 걸 왜 만들었냐며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다이아나는 도로니아를 조종해 본 후에야 검집의 용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이탄의 기본무장은 검과 방패다. 양쪽의 무게가 똑같다면 모르겠지만 형태도, 무게도, 사용법도 완전히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방패는 대략 7톤 내외, 검은 1톤 내외다. 좌우 무게 차가 6톤 이상 난다. 너무 심하게 좌우 무게 차가 나면 격렬한 동작을 감행할 때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그 때문에 좌·우측의 몸통 쪽 장갑판 일부의 두께를 가감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똑같이 무게를 보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 중에 타이탄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온전히 기사 개개인의 실력이었다.

그에 비해 도로니아는 오른손에 든 검의 무게 1톤, 왼손에 든 검집의 무게도 1톤이었다. 그리고 둘의 길이도 엇비슷하다. 그로 인해 도로니아는 타이탄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좌우 밸런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 손에는 검집,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양팔을 휘두르며 맹렬한 속도로 내달린다. 마치 쌍검을 든 사람처럼…….

일행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샌드 웜을 유인해 가던 월터는 뒤를 쫓아오는 타이탄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타이탄이긴 했지만, 그 주인이 누군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소유한 타이탄이리라.

월터는 적기사와 유사한 형태의 무장을 채택한 타이탄은 단장이 소유한 헬 프로네뿐인 줄 알았다. 그런 걸 보면 절정에 도달한 검객들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은 모양이다.

물론 약간씩 차이는 있다. 헬 프로네는 검 한 자루가 기본무장이었고, 적기사는 쌍검이다. 그리고 저 타이탄은 검과 봉(혹은 철퇴?)을 든 것처럼 보였다.

일반적으로 타이탄이 달릴 때는 앞쪽에 방패를 고정시킨 채, 오른손도 거의 안 움직인다.

그에 비해 저 타이탄은 양손을 크게 휘저으며 움직이고 있었기에 손에 든 무장이 어떤 것인지 언뜻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한쪽 손에 든 게 검집이라는 걸 알아본 월터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 무장으로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마주 달려온 월터가 도로니아를 건너뛰어 뒤로 달려간 순간, 도로니아의 코앞에 커다란 동굴 같은 게 모래 먼지를 뿜어 올리며 불쑥 솟아올랐다. 샌드 웜의 입이었다.

입안에는 수백, 수천 개도 더 되어 보이는 금속성의 이빨들이 빽빽이 솟아있었다. 무엇이든 저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잘게 분쇄되어 갈려버리리라.

보통은 저 살벌한 분쇄 지옥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용을 쓰겠지만, 도로니아는 달랐다.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장 샌드 웜의 입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모래 속을 고속 이동하는 샌드 웜을 공격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다이아나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끼기기긱!!

놈에게 삼켜지는 순간, 주위는 일순 짙은 암흑으로 변했다. 단 한 점의 빛도 없긴 했지만, 타이탄의 눈으로 보고 있었기에 수많은 이빨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인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샌드 웜의 이빨들이 타이탄의 장갑판을 긁는 소리이리라.

“도로니아, 견딜만해?”

『외피가 갉히고 있을 뿐, 깊은 손상은 없다. 현재로선 방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보니 약간 불안했던 게 사실이지만, 도로니아의 대답을 들어보니 그럭저럭 견딜만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샌드 웜의 이빨에 손상되고 있는 도로니아 장갑판의 상처 수복에도 상당한 마나가 필요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다이아나는 검과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검집도 엄연한 무기다. 1톤짜리 쇳덩이니까.

검과 검집을 동시에 휘두르자 샌드 웜의 뼈들과 충돌하며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콰콰콰쾅!!

몇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도 샌드 웜의 측면 표면을 감싸고 있던 가장 굵고 튼튼했던 장갑판이 내압을 견디지 못하고 벌어지며 환한 빛이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제서야 다이아나는 샌드 웜의 몸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가 흐르는 생명체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로니아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건 모두 뼈뿐이었다. 웜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언데드였던 것이다.

“웜까지도 언데드였다니…….”

검과 검집이 부딪치는 충격에 밀려났던 뼈들이 곧이어 스르륵 제자리로 돌아가며 원상복구 되어 버린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게 만약 살아있는 샌드 웜이었다면, 이 일격에 생명이 왔다 갔다 했을 텐데…….

이런 죽지도 않는 괴물을 어떻게 죽이지?

“언데드의 약점 같은 거 아는 거 없어?”

다이아나의 물음에 간단한 대답이 돌아온다.

『모른다. 싸워본 적이 없다.』

도로니아의 첫 번째 주인은 초대 치레아 대공이었다. 카프로니아급 2기는 첫 주인을 너무 대단한 사람을 만난 탓에 성능에 비해 콧대만 높아져서, 그 이후 줄곧 용상(龍床) 뒤편에 세워져 장식품으로 쓰여 왔을 뿐이다. 생산가를 줄이기 위해 미스릴 코팅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초대 치레아 대공이 타이탄 운전 연습하는데 도로니아를 잠시 썼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지금껏 도로니아를 운용했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도로니아는 실전경험이 전무한 타이탄이 아닐까? 다이아나는 일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물론 다이아나가 도로니아를 몰고 다른 기사들의 타이탄과 연습전은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총력을 다해 목숨을 건 일전을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고급검술을 구사했다가는 아무리 튼튼한 타이탄에 탑승하고 있다고 해도 상대의 목숨이 위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실전경험이 없는데, 타이탄까지 그렇다니.

사람도 경험이 필요하듯, 타이탄도 마찬가지다. 공장에서 갓 출하된 타이탄은 문제가 많다. 제대로 싸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람처럼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주인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타이탄이 단순히 명령한 대로만 움직이는 기계 덩어리였다면 상관이 없지만, 자신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마법생명체였기에 이런 문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타이탄으로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절망적이었다.

‘아냐. 그건 아닐 거야.’

다이아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련 말고 실전경험은 없어?”

『있다.』

도로니아의 까칠한 대답에 다이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타이탄전을 해보긴 했구나.”

『아니다. 내 유일한 실전경험은 블루 드래곤과였다.』

과연 전설적인 영웅!

이런 타이탄으로 블루 드래곤과도 싸웠다니……. 하지만 그분이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원래 물어봐야 하는 건 고급검술을 구사해서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느냐 하는 거였지만, 드래곤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이아나의 관심은 급격히 그쪽으로 쏠려갔다.

“어떻게 운 좋게 도망치신 모양이지? 하기야 실력이 있으시니까.”

『도망친 게 아니다. 전 주인은 도중에 싸움을 멈췄다.』

도로니아의 말을 다이아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분이 강하다고 해도 드래곤과 싸웠다고?

다이아나가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만큼 드래곤은 절대적인 강자였으니까.

“멈췄다고? 드래곤이 그만둔 게 아니라?”

『처음에는 드래곤이 압도했었다. 웜급 드래곤의 브래스를 세 번이나 맞았으니 당연했다.』

세상에, 갓 출가한 어린 드래곤도 아니고 웜급 드래곤이라니.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타이탄의 말이 아니었다면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마법방어 주문이 빽빽이 새겨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조차 한순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그 브래스를 세 번이나 맞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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