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정말이야? 피한 게 아니라 맞았다고?”
『그렇다. 두 번째 맞았을 때 나는 소멸을 각오했다. 하지만 그 악조건에서도 전 주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약점을 찾았고, 마침내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 해결책이라는 게 뭐지?”
『뭐라 설명하기 힘들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전 주인의 능력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는 것뿐.』
도로니아의 말에 다이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약점을 찾아냈다고? 좋아! 나도 이놈의 약점을 찾아볼게! 드래곤에게도 약점이 있는데, 웜 따위에 약점이 없겠어?”
이번에는 그냥 휘두르지 않고 마나를 잔뜩 끌어모아 검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타이탄이 강철 검에 잘려나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나의 힘! 마나는 마나가 아니면 막지 못한다.
고급검술이 전개되기 위한 마나의 흐름을 경험하지 못한 타이탄의 경우에는 제대로 동작시키는 게 어렵지만, 다이아나는 처음부터 손쉽게 도로니아를 다룰 수가 있었다. 이미 다크가 도로니아에게 경험을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연습전을 할 때 아주 편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덕을 톡톡히 볼 수가 있었다.
콰콰콰쾅!!!
과연 상승의 검법을 전개하기 시작하자 샌드 웜의 금속성 뼈대들이 조각조각 잘려나가며 방금 전과 비슷한 상처가 만들어졌다. 웜의 몸체가 거의 절반쯤 잘려나갈 정도로 커다란 상처. 하지
만 기대와 달리 그런 상처조차도 곧 수복되어 버렸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기에 절망하려던 찰나,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박살난 뼈의 접합부가 매끄럽지 않고 엉성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고급검술을 전개하기 전과 달리 관절 접합 정도로 복구된 게 아니라 파괴되어 생명력을 잃은 뼈는 떨어져 나가고 주위에 있는 다른 뼈들이 움직여 그 자리를 메우는 식으로 수복되었기에 그런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도로니아! 할 수 있어! 아무리 언데드 웜이라지만 없애버릴 수 있어!”
입으로는 그렇게 소리치며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있었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일말의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우려와 달리 샌드 웜이 불사신이 아닌 건 다행이었지만, 뼈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생명을 가진 집합체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뼈를 다 산산조각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동안 자신의 마나가 과연 버텨줄까?
하지만 이때 미처 생각지 못했던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콰콰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샌드 웜의 옆면이 터져나가며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다.
물론 그 구멍 또한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사라져 버렸지만, 붉은색의 뭔가가 얼핏 보였다. 월터일 것이다. 코린트의 제2근위대가 적기사라는 붉은색의 타이탄을 쓴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적기사는 대제국의 근위타이탄인 만큼, 대륙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막강한 성능을 자랑한다고 들었다.
월터가 밖에서 협공해주고 있다는 것을 안 다이아나는 용기백배하여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언데드 웜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샌드 웜을 안팎에서 협공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이아나의 순간적인 기지 덕분이다.
샌드 웜의 목구멍 부근에 자리 잡은 도로니아가 목이 반쯤 잘려나갈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퍼붓자, 샌드 웜은 본능적으로 온몸을
맹렬한 기세로 꿈틀거려 적을 배제하려 했다. 살아서는 물론이고, 되살아난 후에도 이런 엄청난 타격은 당해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더군다나 땅을 파헤치는 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샌드 웜의 입과 목 부분이 계속 파괴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보니 제대로 모래 속으로 파고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샌드 웜이 모래 속으로 도망치지만 못하게 막는다면 없앨 수 있다.
다이아나는 샌드 웜의 몸 안에서, 월터는 몸 밖에서 강렬한 공격을 계속 퍼부었다.
샌드 웜은 처절하게 반항했지만, 몸 안과 밖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서서히 분해될 수밖에 없었다.
칼질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이아나가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샌드 웜의 몸체가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며 거대한 뼈 무더기로 바뀌어 버렸다.
언데드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다.
철커덩! 타이탄의 목이 뒤로 꺾이고 다이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월터가 타고 있는 적기사를 향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월터, 당신과 동료가 된 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어.”
적기사의 목이 위로 들리며 월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또한 적기사의 조정석에 앉은 채로 말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셀리나.”
“그거 적기사지? 정말 엄청나게 강해 보이네.”
다이아나의 칭찬에 월터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과 함께 자신의 타이탄에 대한 자부심이 떠오른다.
“내 건 만들어진 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최강급에 들어가는 타이탄이야. 하지만 의외네. 셀리나 같은 강자가 그런 타이탄을 사용하고 있을 거라고는……. 그거 카프록시아급의 변형이지?”
“응.”
월터는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물었다.
“출력이 더 높은 론다이크급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꽤 된 거로 알고 있는데, 치레아에는 아직 공급되지 않은 건가?”
월터가 궁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레스는 크루마의 제도(帝都) (신)엘프리안이 브로마네스에게 파괴된 직후, 크루마에 압력을 가해 에프리온급(1.7)에 사용된 엑스시온의 설계도를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크루마는 크라레스 뒤에 아르티어스라는 막강한 골드 드래곤이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 보니 제대로 반항도 못 하고 설계도를 강탈당해야만 했다.
이미 (구)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든 전적이 있는 아르티어스다 보니 크루마 황실이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크라레스는 그 설계도를 이용하여 론다이크 시리즈를 생산하여, 카프록시아 시리즈를 대체해가는 중이었다.
론다이크급의 원형인 론다이크는 근위대에 20기 납품하는 것으로 생산을 종료했다.
그 후, 루빈스키 공작의 요청에 맞춰 제작한 론다이크II 20기가 스바시에 기사단에 납품되었고, 그다음부터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게 외형을 간략화시킨 론다이크III를 양산하기 시작하여 전량 중앙기사단에 공급하고 있는 중이었다.
월터가 말한 건 바로 대량생산되어 공급되고 있는 론다이크III였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도로니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엑스시온의 출력 따위로 도로니아를 평가하면 안 돼. 도로니아는 초대 치레아 대공께서 형태를 직접 주문하셨고, 사용하셨던 최고의 명품이야. 전체적인 밸런스에 있어서 이것보다 뛰어난 타이탄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여기까지 말하던 다이아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보니 월터의 적기사 쪽이 밸런스가 더 뛰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과 검집보다는 쌍검 쪽이 더욱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룰 테니까.
“호오, 이게 초대 치레아 대공께서 사용하셨던 타이탄이었나? 이상하네. 그분께선 청기사를 사용하신 거로 알고 있었는데…….”
다크가 청기사를 끌고 제도 코린티아까지 쳐들어와 제2근위대와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박살냈던 건 코린트에서도 전설로 전해지는 얘기였다.
“아빠가 이어받은 안드로메다를 사용하시기 전에는 이 도로니아를 쓰셨다고 해.”
현 치레아 대공과 그 부인이 둘 다 청기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월터에게 스스럼없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도로니아라……? 무장이 참 독특하네. 지금까지 검집을 가진 타이탄은 처음 봤어.”
지금은 전투가 끝난 상황이라 검을 검집 속에 넣어 왼쪽 허리에 매달아 놓았다.
월터는 검집을 가지고 있는 타이탄은 처음 봤다. 물론, 타이탄에 검집 비슷한 게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허리에 검을 꼽아둘 수 있는 구조물일 뿐이다. 부무장으로 창이나 도끼 따위를 쓰는 경우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무거운 검집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을까? 적기사처럼 쌍검으로 하는 게 훨씬 효율이 좋을 건데?
의아해하는 월터의 생각을 대충 짐작하겠다는 듯 다이아나가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나는 이걸 초대 치레아 대공께서 사용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쓰고 있는 중이니까. 아빠가 치레아 기사단의 타이탄을 계속 드라쿤으로 고집하고 계신 것도 같은 이유지.”
드라쿤은 초대 치레아 대공의 주문에 따라 그의 개인기사단을 위해 제작된 카프록시아의 변형 모델이다.
골드 드래곤의 머리 모양과 비슷하게 제작된, 긴 뿔이 두 개 붙은 두상을 지닌 황금색의 타이탄이었는데, 카프록시아 시리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었다.
“하기야, 초대 치레아 대공과 인연을 맺었다는 골드 드래곤이 뒤를 봐주는 한, 뭘 해도 상관없긴 하지.”
신형 타이탄 20기를 새로 받는 것보다는 골드 드래곤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편이 월등하게 유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 아빠의 언행으로 봤을 때, 골드 드래곤에게 아부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으니까.
“글쎄…, 아빠가 드라쿤을 고집하시는 게 치레아 공국의 수호룡인 골드 드래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초대 대공님과의 추억 때문이 아닐까? 아빠가 처음 지급받으셨던 타이탄이 드라쿤이었다고 들었고…….”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니, 치레아에 대한 건 네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겠지. 방금 전에 출력 어쩌구 하며 한 내 말은 실수였으니까 잊어줘.”
“알았어. 사실 별 신경도 안 써.”
그 말과 함께 다이아나는 활짝 웃었다.
미네르바의 오랜 칩거
샌드 웜과의 격전이 끝난 후, 두 사람은 타이탄을 공간 속으로 되돌리는 대신 그대로 탑승한 채 이동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운 좋게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다음 공격도 이렇게 운이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타이탄을 꺼내 탑승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타이탄에게 가장 위험할 때가 기사가 탑승하지 않았을 때였다. 마나 공급원이 없기에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공격은 물론이고 방어조차 불가능하다.
공간을 열고 나오는 타이탄을 노리고 적이 공격을 퍼붓는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뻔히 알고 있는 이상, 타이탄에 탑승한 채로 이동하는 게 낫다. 대마법주문으로 보호되는 타이탄은 움직이는 요새처럼 안전했으니까.
이번에도 진형은 똑같았다. 1킬로미터쯤 앞에서 월터가 적기사를 타고 걸어가고, 그 뒤에서 다이아나와 두 마법사가 따라간다.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거대한 붉은 타이탄을 보며 라디아가 중얼거렸다.
“과연 코린트의 근위기사네. 정말 대단하지 않아?”
곧이어 다이아나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탄이 좋아서 그런 거야. 들리는 소문으로는 2.0은 확실히 상회하는 엑스시온이 장착되어 있다고 하더라.”
그러자 도로니아가 다이아나의 말을 정정해준다.
『저 타이탄의 엑스시온은 2.3이다.』
“도로니아가 그러는데, 2.3이래.”
2.3이라는 말에 라디아는 혀를 내둘렸다. 청기사를 제외하고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최고 출력의
엑스시온이었으니까.
“2.3이라고? 과연 코린트 제국. 세계 최강이란 찬사를 받는 이유가 다 있었네.”
“그런 코린트를 상대로 우리나라는 승리를 얻어낸 거라고. 정말 자랑스런 조국이지.”
사실, 1차 제국전쟁에서라면 몰라도 2차 제국전쟁에서 크라레스 제국은 패했다. 하지만 연이어 전개된 마도대전으로 인해 2차 제국전쟁에 대한 각국의 해석이 조금씩 달라졌다.
각자 자기 나라에 유리하도록 살짝살짝 역사를 왜곡해 놓은 것이다.
특히 크라레스의 경우 모든 안 좋았던 부분은 다 마왕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피해자인 것처럼 포장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2차 제국전쟁을 일으켰고, 또 치욕스러운 패배까지 당했기에 각국에 배상해야 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전쟁 배상금에 제국이 붕괴되었을 가능성까지 있었다.
아마 다크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크라레스의 역사는 그때 끝났으리라.
다이아나의 말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파벨은 한 마디 참견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의 신분을 생각해 그냥 꿀꺽 삼켰다. 신분 차를 떠나서 소심한 파벨이 상대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도 힘들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옆에서 파벨의 찡그려진 얼굴을 본 라디아가 급히 화제를 바꿨다. 전쟁 당사자였던 코린트인을 옆에 두고 떠들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이토록 거대한 샌드 웜까지 언데드로 만든 걸 보면 어쩌면 아티펙트가 사용된 게 아니라, 마왕이 강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