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언데드 쪽으로 특화된 마왕이 강림한 것일 수도 있지. 언데드가 나타난 위치도 딱 그렇잖아. 동쪽 대륙은 마도대전 이후, 흑마법사들을 완전히 박멸시켜 버렸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흑마법사들은 서쪽 대륙으로 도망치거나 사막에 숨어들었을 거고, 그 와중에 마왕이 강림한 거라고 한다면 앞뒤가 대충 맞아떨어지잖아?”
라디아는 파벨에게로 슬쩍 시선을 돌려 물었다.
“파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타당한 추리라고 생각해. 나도 아티펙트 따위로는 저런 거대한 존재까지 언데드로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파벨의 말에 라디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걱정은 샌드 웜이 과연 저것 하나뿐일 거냐 하는 거야.”
“하나가 아니라면?”
“좀 전의 샌드 웜의 크기를 생각해 봐. 나는 샌드 웜이 그렇게까지 크게 자란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어.”
라디아의 말에 파벨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아. 엄청나게 컸지. 이 커다란 타이탄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을 정도로…….”
“흠, 만약에 말이야. 그게 늙어서 죽은 샌드 웜이라면?”
비도 거의 오지 않는 사막의 특성상 금속성인 웜의 뼈가 산화되어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땅 위가 아니라 모래 속 깊은 곳에서 죽었을 테니, 산화되는 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샌드 웜이 그리 흔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늙어 죽은 개체의 뼈가 사막의 모래 속에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파벨은 온몸이 두려움에 떨려오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아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표정 보니 너도 같은 생각을 한 거 같은데, 왜 묻고 그래?”
“설마……?”
“이게 만약 마왕이 강림한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우리끼리 계속 사막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야. 코린트의 오너가 사막에서 행방불명됐다는 게 월터가 우리를 겁주기 위한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거
지.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샌드 웜이 모래 속으로 파고들기 전에 죽일 수 있었지만, 만약 타이탄을 삼킨 채 모래 속 깊이 들어가 버리면 샌드 웜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살아서 나올 수가 없어. 공기도 없는 모래 속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거든.”
도로니아의 운전석에 앉은 채 둘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다이아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나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
라디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잘 생각해 봐. 샌드 웜 뱃속에 들어가서 직접 싸운 경험을 토대로 말이야.”
잠시 생각해보던 다이아나가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월터와 상의해 봐야 할 거 같네.”
앞서가던 월터를 불러들여 상의한 끝에 그들은 작금의 상황을 각자 상부에 보고한 후,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
상부에서 자신들의 보고를 토대로 추후 명령이 내려오기까지 며칠 걸릴 테니, 그동안 지금처럼 언데드 무리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마왕이든 뭐든 결론은 그 후에 내려도 늦지 않으리라.
라디아와의 통신을 통해 보고를 듣던 치레아 기사단의 마법사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침 필리페 각하께서 당직이시니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곧이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마법사가 수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치레아 기사단의 수석마법사 필리페였다.
「초대형의 언데드 샌드 웜과 조우했다고?」
“예. 레이디께서 코린트 제국의 페레즈 백작과 함께 파괴했습니다.”
「즉시 전하께 보고 올리겠다. 그동안 귀관은 레이디를 잘 구슬려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도
록. 알겠나?」
“하지만 레이디께서 제 말을 들으실지……?”
「그건 귀관이 알아서 적절히 행동하라. 다시 한번 반복한다. 그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새로운 지시는 다음 정기 연락 시간에 내리겠다. 그럼 이만 끊겠다.」
라디아는 수정구를 잘 닦아 보관함에 넣으며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다이아나는 월터에게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월터는 이미 파벨을 통해 상부에 보고를 올렸고, 그쪽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월터는 다이아나처럼 직통 채널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알카사스 쪽 정보원을 통해서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코린트 쪽의 초장거리 통신망 채널을 열기에는 파벨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이아나에게 대답했다.
“결정은 네가 해. 다음 행동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려면 한 며칠 걸릴 거야.”
다이아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풍속을 가늠해본다. 바람이 약간 불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모래에 찍혀있는 발자국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기다리자.”
“다음 정기 연락 시간쯤에는 결론이 나올까?”
“흔적이 언제 없어질지 알 수가 없는데 태평하게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오늘 해 질 녘에 접속해서 물어볼 거야. 그때까지 결론이 나와 있지 않다면 움직이자. 만약, 바람이 조금이라도 강해지면 그 전에 출발할 수도 있어. 그리고 월터는 지금처럼 우리보다 앞서 나가서 언데드 무리부터 찾도록 해.”
“알았어.”
다이아나가 바람에 민감한 건, 언데드들이 남긴 발자국이 바람에 쓸려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크루마 제국의 제도 (구)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 아르티어스의 브래스에 박살 나버린 후, 미네르바 켄타로아 공작은 전력을 다해 (신)엘프리안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엘프리안 마저도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에게 가루가 되어버리자 사람들은 엘프리안의 터가 재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 새로운 자리에 제도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플로레스였는데, 코린트 군이 플로레스로 진격해 들어오려면 먼저 브로마네스의 영토를 지나야 한다는 것도 그곳이 제도로 선택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플로레스 또한 건설하는데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신)엘프리안 때의 경험에 미루어 지하궁전의 건설에 더욱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엘프리안이 막강한 웜급 드래곤의 브래스를 두 번이나 덮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지하궁전 쪽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그들은 주목했다. 그래서 플로레스의 지하궁전은 더욱 깊게,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사시에 황족과 제국 수뇌부가 최대한 빨리 지하궁전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이동마법진을 갖추는 데 공을 들였다.
플로레스가 준공된 후, 황제는 제국 전체에 신제도 완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축제를 선포하고 새로운 궁전에서 7일 밤낮에 걸쳐 연회를 열어 축하했다.
대륙의 수많은 국가에서 축하 사절을 파견해 온 것은 물론이고, 국내의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는 귀족이라면 연회에 참석해 인맥을 넓히기 위해 뛰어다녔다.
미네르바는 (신)엘프리안이 파괴되던 날, 자신으로 인해 두 번씩이나 제도가 파괴되었음을 사죄하며 두 번째 은거에 들어갔다.
물론 그녀가 은거했다고 해서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와 충성을 얻고 있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이번에는 또 무슨 술수를 부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 ✻
크루마 제국의 제도 (구)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 아르티어스의 브래스에 박살 나버린 후, 미네르바 켄타로아 공작은 전력을 다해 (신)엘프리안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엘프리안 마저도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에게 가루가 되어버리자 사람들은 엘프리안의 터가 재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 새로운 자리에 제도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플로레스였는데, 코린트 군이 플로레스로 진격해 들어오려면 먼저 브로마네스의 영토를 지나야 한다는 것도 그곳이 제도로 선택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플로레스 또한 건설하는데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신)엘프리안 때의 경험에 미루어 지하궁전의 건설에 더욱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엘프리안이 막강한 웜급 드래곤의 브래스를 두 번이나 덮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지하궁전 쪽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그들은 주목했다. 그래서 플로레스의 지하궁전은 더욱 깊게,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사시에 황족과 제국 수뇌부가 최대한 빨리 지하궁전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이동마법진을 갖추는 데 공을 들였다.
플로레스가 준공된 후, 황제는 제국 전체에 신제도 완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축제를 선포하고 새로운 궁전에서 7일 밤낮에 걸쳐 연회를 열어 축하했다.
대륙의 수많은 국가에서 축하 사절을 파견해 온 것은 물론이고, 국내의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는 귀족이라면 연회에 참석해 인맥을 넓히기 위해 뛰어다녔다.
미네르바는 (신)엘프리안이 파괴되던 날, 자신으로 인해 두 번씩이나 제도가 파괴되었음을 사죄하며 두 번째 은거에 들어갔다.
물론 그녀가 은거했다고 해서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와 충성을 얻고 있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이번에는 또 무슨 술수를 부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에게 파괴되었을 때도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죄하고 은거에 들어갔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잠시 은거했을 때 멋도 모르고 국정을 장악하려고 했던 고위귀족들은, 그녀가 다시금 권력을 잡던 그날 싸그리 숙청당해 버렸던 전례가 있다 보니 이번에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크루마 주변국들도 마찬가지였다. 크루마가 위기에 몰리게 되면 그녀가 결국 밖으로 뛰쳐나올 것임을 모두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크루마에 남아있는 마스터는 그녀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싫어도 은거를 깨고 밖으로 나와 전군을 이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국들은 그녀가 밖으로 나올 핑곗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예 시비를 걸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은거한 형태로는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은거는 세인들의 예상을 깨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마스터들이 10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외모를 자랑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벌써 노쇠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가만히 칩거하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궁금하게 여기며 몸을 사리는 가운데 하루하루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세인들은 플로레스가 완공되었을 때, 미네르바가 슬그머니 권력의 전면으로 뛰쳐나올 줄 알았다. 복귀 명분으로 삼기에 최고의 이벤트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7일 밤낮 동안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미네르바의 오랜 칩거에 크게 실망한 사람들 중 하나가 근위대장인 샤트란 페르였다.
제국전쟁을 치르며 마스터급의 부족을 실감한 미네르바는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었다.
미네르바에게서 무공의 진수를 아낌없이 전수받았던 그녀였기에 미네르바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사령관님, 근위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드시라고 해라.”
부관의 안내를 받으며 사령관실로 들어간 샤트란은 크루마 전군 총사령관 마리아 지오그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사령관님.”
“어서 와. 자, 이쪽으로…….”
오랜 세월 친분을 쌓아온 사이다. 더군다나 그린 드래곤 사냥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에 투입된 동지이기도 했다.
잠시 그동안의 밀린 안부를 묻느라 시간을 보낸 샤트란은 마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용건을 꺼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뵌 건 사령관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예요.”
“뭐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