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9화 (909/930)

“미네르바 전하를 뵙게 해주세요.”

순간 마리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곧이어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은퇴하신 후 제법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분을 견제하는 놈들이 너무나도 많아. 귀관은 근위대장일세. 어설프게 움직이다 자칫 놈들이 의혹의 눈으로 보게 되면 상당히 피곤해져.”

지금까지는 자신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미네르바 전하가 혹시 곤란을 겪게 될까 두려워 그냥 침묵했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샤트란은 입술을 거칠게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적의 이목. 예, 그 말씀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있었죠.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미네르바 전하를 뵙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

“아무리 정적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제지간에 만나서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3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렸어요. 제발, 이번에는 거절하지는 말아주세요.”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샤트란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아 지오그네는 이윽고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 따라와. 대신, 마음 단단히 먹고.”

“정말 감사합니다.”

빛이 번쩍하며 두 사람이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 지오그네와 샤트란 페르였다.

공간이동으로 인한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곧이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암흑이 주위를 집어삼켰다. 

“라이트!”

순간 빛의 구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며 주위를 환히 밝혔다.

“여긴……, 어디죠?”

“지하궁전이야. 엘프리안 지하에 있는…….”

“엘프리안의 지하궁전이라고요? 그런데 왜 이곳에…….”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일단 조용히 따라와.”

플로레스의 지하궁전은 언제든지 황제와 그 측근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상당수의 하인과 하녀들이 배치되어 만반의 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완전히 죽어버린 공간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인지 의문이 생겼지만, 샤트란은 잠자코 마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설혹 마리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 해도, 마스터인 그녀는 충분히 위험에서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을 꾹 다문 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는 마리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샤트란의 표정이 뭘 생각했는지 점차 싸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설마……, 전하께서 이곳에 유폐(幽閉)되어 계신 겁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 여기에 전하께서 계신 건 아니니까.”

마리아의 대답에 샤트란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여기에는 왜……?”

“자네에게 만나게 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나게 해주고 싶은 게……? 사람이 아니라 ‘게’라고 했다. 그렇다면 물건이라는 소린데, 물건은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해야 맞다. 무엇보다 미네르바 전하를 만나게 해준다고 해놓고 뜬금없이 물건을 만나게 해준다라……?

샤트란의 미간이 점점 더 깊은 의문으로 찡그려지고 있을 때, 마리아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다 왔네. 여기야.”

마리아가 안내해 들어간 작은 공동 중앙에는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 서 있었다. 타이탄……. 샤트란은 눈앞의 이 타이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샤트란뿐만이 아니라, 크루마 제국의 거의 모든 기사들이 이 타이탄을 알고 있으리라. 그만큼 크루마 제국의 자긍심과 같은 유명한 타이탄이었으니까.

“어, 어째서 이게 여기에……?”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잠긴 지하공동의 중앙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타이탄은 헬 프로네였다. 최강의 기사만을 주인으로 선택한다는 고귀한 타이탄.

샤트란은 이 녀석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헬 프로네의 흉갑 중앙에는 쌍두의 그린 드래곤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크루마의 국가문장이다. 그리고 그 어떤 숫자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백의 유니콘 문장. 이게 그려진 타이탄은 황제 전용기와 총사령관용, 단 2기뿐이다. 그리고 견갑에는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샤트란은 자신도 모르게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마리아에게 싸늘하게 외쳤다.

“전하께선 어떻게 되신 거죠?”

마리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헬 프로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돌아가셨어. 엘프리안이 파괴될 때…….”

이미 오래전에 미네르바가 죽어버린 후라는 말에 샤트란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럴 수가…….”

샤트란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지하공동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까……? 스승님께 받은 은혜를 아직 단 하나도 보답하지 못했는데…….’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망연한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는 샤트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마리아는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급하게 엘프리안에 도착했을 때, 운 좋게도 헬 프로네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어. 갑자기 주인과의 소통이 끊어져 버린 탓에 이 녀석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거겠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포획해서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숨겨둔 거야. 당시 그 주위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제대로 된 시체는커녕 뼛조각 하나조차 찾을 수가 없었어. 브로마네스의 강맹한 브래스는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거든. 전하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헬 프로네와의 맹약이 깨진 것으로 봐서 돌아가신 건 틀림없어.”

마리아는 헬 프로네 밑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마법진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마법진이 없었다면 오래전에 공간을 열고 도망쳐 버렸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붙잡아 둘 수만은 없어. 헬 프로네는 새로운 주인을 원하니까.”

헬 프로네는 그 시야를 가리기 위한 미스릴 코팅을 하지 않은 탓에 주인을 정하는 기준이 아주 높았다.

더구나 역대 주인들의 실력이 대단했던 만큼, 웬만한 실력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샤트란에게 시선을 맞추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 생각은 자네가 이 헬 프로네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줬으면 해. 당분간은 전하의 대역을 부

탁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젠가 우리 제국이 반석 위로 올라서게 된다면 그때는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발표할 수 있게 되겠지. 그때까지 우리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폐하를 위해서, 그리고 전하를 위해서…….”

‘브로마네스, 이 썩을 도마뱀 새끼!’

샤트란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 망할 레드 드래곤이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미네르바 전하를 죽였을 거라고는 지금까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지내왔었다. 그저 그 전과 같이 제도가 파괴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용히 은거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일을 수행했기에, 크루마 제국은 그 어떤 혼란도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만약 주위 강대국들이 미네르바의 죽음을 포착했다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으리라.

새삼 미네르바 전하가 크루마 제국에 얼마나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조국에게서 받은 은혜까지도.

“알겠습니다. 감히 전하의 대역을 맡기에는 미천한 능력의 저이지만 조국을 위해, 존경하는 전하를 위해 제 이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샤트란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브로마네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말이겠지?”

물론 불가능할 거라는 건 잘 안다. 상대는 웜급의 막강한 드래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냥 포기하고 살아갈 생각을 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어야 혹시라도 실낱같은 빈틈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런 끈기가 있었기에 샤트란이 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고.

“제 살아생전에 가능할지 알 수는 없지만, 놈의 둥지가 가까이 있는 만큼 가능성이라도 엿보고 싶어요. 물론, 섣불리 손을 쓸 생각은 없어요. 플로레스마저 잿더미가 되는 걸 원하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나 역시 목숨을 걸고 적극 도와줄게.”

샤트란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브로마네스의 둥지 내 침실로 들어가는 비밀통로가 하나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네르바의 명을 받아 레어 건설을 총괄했던 게 바로 마리아였으니까.

미네르바는 과거 그린 드래곤을 사냥했듯, 브로마네스도 사냥할 계략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공물을 바친다는 미명 하에 그의 동정까지 살펴볼 수 있었으니 언젠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조언 하나 할게. 상대는 최전성기의 웜급 드래곤이야.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비늘에 흠집조차 내기도 힘들 거야. 혹시 미네르바 전하였다면 몰라도, 현재 자네 실력으로는 기회를 잡는다 해도 어림도 없다고 생각해야 될 거야.”

그 말에 샤트란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대답했다.

“부하들을 혹독하게 단련시키고, 저 또한 수련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런 헛된 희망조차 꿈꾸지 못한다면 제가 너무 비참해지니까요.”

“그래, 자네의 의지가 그렇게 굳건하다면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나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

사막의 참극

참극은 병사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일어났다.

알카사스 왕국의 링카 영지에서 출발한 6만에 달하는 대병력, 왕국의 서쪽 관문을 책임지고 있는 링카 변경백이 공을 들여 키운 정예병이다.

도시국가에서 파병한 구원병이 매복지까지 도달하려면 며칠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쪽으로 정찰병들을 촘촘하게 깔아놓은 후,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푹~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다.

한낮에는 갑옷조차 입기 힘들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해가 진 후에는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차갑게 기온이 식는다. 그런 상황이니 체력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도시국가의 구원병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에 아무런 전투 준비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그것도 수많은 언데드의 기습을 당한 것이다.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갑옷조차 다 벗은 상태에서 당한 기습이었기에 그건 정말 악몽과도 같았다.

갑옷을 입는 건 생각조차 못 하고 모두들 무기만 주워 들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패를 든 사람조차 거의 없었을 정도였으니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 리 없었다.

놀랍게도 전투는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종료되었다.

사막 전체가 피로 물들었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들이 모래 위를 나뒹굴었다.

《단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크하하핫!》

수많은 사막 몬스터의 사체로 이뤄진 언데드 집단을 지휘하고 있는 해골인간.

사람의 귀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지만, 언데드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병사들을 학살했다.

걸레짝이 된 낡은 옷 사이로 말라붙은 살점과 뼈가 살짝살짝 보인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 집단을 지휘하고 있는 것만 봐도 저급한 스켈레톤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슴뼈 중간에 둥실 떠 있는 시커먼 색의 구체(球體)! 스켈레톤이 진화를 거듭해 엘더(Elder)급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보유한 죽음의 기운을 한군데로 끌어모아 다크 베슬(Dark Vessel)을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다크 베슬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해골인간은 스켈레톤의 정점 중 하나라는 리치(Lich)였다. 그것도 주인으로부터 특별히 ‘알파17’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아주 고등한 리치였다.

구분을 위해서 주인이 편의상 대충 붙여준 이름이긴 했지만, 주인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은 리치들은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시키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멍청한 하급 언데드들과의 확실한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부정한 기운을 몸속에 축적하며 성장해, 이윽고 자아(自我)를 획득하여 독립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때, 거대전갈을 마치 말이라도 되는 듯 타고 해골인간 하나가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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