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신의 은혜를 통해 계속 성장시키고 있는 만큼 조만간에 이름을 하사받는 자들의 숫자는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사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상급 언데드들은 모두 다 『성장의 방』에 넣어 집중적으로 육성시키고 있는 중이다.
방 중앙에 마신의 은혜를 놓고, 그걸 중심으로 상급 언데드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자신처럼 밖으로 돌아다니며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은 자아를 갖췄거나, 아니면 자아를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언데드뿐이다.
호위인 저 데스 나이트가 자신에게 할당된 것도, 그가 성장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으로부터 데스 나이트 생산의 중임을 맡은 것은 알파5였다.
초기에는 알파17도 그의 휘하에 배치되어 대륙 곳곳을 훑으며 그래듀에이트의 무덤을 찾아다녔었다.
영혼과 협상을 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건 흑마법사와 리치뿐이었기에, 비교적 한가한 리치들이 거기에 총동원되었었다.
하지만 포섭에 성공한 데스 나이트는 기대와 달리 너무 적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꾐에 넘어갈 만한 영혼들은 이미 마도전쟁 때 거의 다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알파17이 자신의 호위인 데스 나이트의 영혼을 만난 건 무명합장묘였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시체를 한곳에 합장시켜 놓은 커다란 묘였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응답이 있었다.
강한 영기를 지닌 영혼이었기에 알파17은 무척 기대를 했지만 만들어진 결과물은 형편없는 졸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데스 나이트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영혼으로 만들었고,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잡뼈들로 자신의 몸을 형성해 데스 나이트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데스 나이트들 중에서도 더욱 하급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육신이 분쇄됐음에도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었을 정도로 강한 집착과 원념(怨念)을 지니고 있던 영혼이다. 하지만 자신의 육신을 잃어버린 탓으로 그가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로 성장할 가능성은 영영 사라져 버린 셈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녀석이라 할 수 있었다.
호위인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던 알파17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거나, 가까운 시일 내에 이름을 하사받은 데스 나이트가 하나라도 나와야 할 텐데…….’
아직까지 주인에게 이름을 하사받은 상급 언데드는 모두 다 리치들뿐이다. 전력 균형을 생각한다면 이건 좀 문제가 있었다.
요즘 알파5는 더 이상 대륙을 떠돌며 그래듀에이트의 영혼들과 협상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는 협상에 응하지 않는 놈들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그것들의 유골을 가져와 마신의 은혜에 오염시켜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영혼이 빠지는 만큼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었지만,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때의 인연으로 알파5와는 만날 때마다 약간씩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파5에게 들은 말로는, 최근 그는 대륙에서 이름을 떨쳤던 전설적인 영웅들의 유골을 훔쳐와 그것들을 마신의 은혜로 오염시키고 있다고 했다.
영혼을 타락시키는 게 최고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결과물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물론 전설적인 영웅의 뼈라고 해서 다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영기가 옅어지게 되고, 주변 환경이 나쁘면 그건 더욱 가속화된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웅의 뼈가 데스 나이트로 만들기에는 최고의 재료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뼈를 수급하기가 힘들었다. 아직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은 영웅의 묘는 그만큼 경비가 철저하기에 도굴하기가 힘든 것이다.
코린트 제국의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과 크루마 제국의 지크리트 루엔 공작의 유골을 확보했으며, 조만간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의 유골도 입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알파5의 자랑에 알파17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본이 엄청난 만큼 얼마나 뛰어난 성능의 데스 나이트가 만들어질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자신의 호위인 데스 나이트와는 정반대의 경우다. 이쪽은 영혼만이……, 저쪽은 찬란한 유골만이 있는 셈이니까.
둘을 합쳐서 데스 나이트로 만들 수만 있다면 최고의 걸작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이미 한쪽이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모쪼록 훌륭한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군.》
노마법사의 절망
베이라 성의 외성지역을 장악한 홉킨스는 내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병영에 임시본부를 차렸다.
벽 곳곳에 얼룩져 있는 핏자국들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여기만큼 넓고 좋은 건물이 없었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병영이었던 만큼 다수 병력이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고,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농성하기도 좋았다. 그리고 내성과의 거리도 가까워 만약 내성의 적들이 밖으로 치고 나온다면 급히 구원하러 달려가기도 용이했다.
지휘본부로 정한 커다란 방 안에 앉아있던 홉킨스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걱정한 것에 비해 너무 수월하게 성문을 통과하여 외성지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부하들이 약탈해 놓은 최고급 술을 술잔 가득 부어 통쾌하게 들이켰다.
“크으, 기가 막힌 맛이네! 내가 언제 이런 비싼 술을 마셔보겠냐…….”
지휘본부 한쪽 구석에는 부하들이 홉킨스 몫으로 가져다 놓은 최고급 술들과 금은보화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점령한 외성지역을 약탈한 부하들이 관례에 따라 홉킨스의 몫으로 가져다가 놓은 것이다.
여기에 자리 잡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중이다.
베이라 성이 동서무역의 중심도시였던 만큼, 약탈품의 질과 양은 홉킨스와 부하들을 크게 만족시켜주고도 남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보물이 쌓여있을 게 뻔한 내성(內城)을 아직 점령하지 못한 게 아쉽기만 했다.
물론 지금까지 약탈한 보물들만으로도 당장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성 쪽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깝게 됐네…….”
이번 임무는 너무나도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했다.
모든 대대장들이 부하들을 닦달하여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그 때문에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앉아있는 건 방금 전까지 내성에 대한 경계 임무를 하다 56대대와 교대하고 돌아온 35대대장 미하엘뿐이었다.
미하엘을 제외한 35대대원들은 모두 눈이 벌게져 약탈하러 달려가 버린 상태다.
“내성 쪽의 동향은 어때?”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아마 구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죠.”
보고를 하면서 미하엘은 탁자 위에 놓인 술을 한 잔 따랐다. 짙은 황금빛 액체가 영롱하다. 마시기 전에 향을 음미해 보는 미하엘. 그와 동시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각한 것보다 강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일 것 없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교대를 한 이상 약탈 외에 더 이상 할 일도 없었다. 그는 두세 잔 더 마신 다음, 방에 들어가서 푹 잘 생각이었다. 이미 약탈품은 충분히 챙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미하엘의 보고에 홉킨스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딱한 녀석들. 구원군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하엘은 술잔에 술을 한잔 더 따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안타깝군요.”
잠시 히히덕거리며 웃던 홉킨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미하엘에게 말했다.
“이러면 어떨까? 병력 일부를 성 앞에서 횃불을 잔뜩 피워 마치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미는 거야. 그러면 구원병이 온 줄 알고 놈들이 내성 밖으로 뛰쳐나오면 곧바로 기습해서 작살을 내는 거지. 어때?”
“흐흐, 기가 막힌 계책입니다, 연대장님.”
겨우 천 명 남짓한 홉킨스의 부하들만 가지고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미는 건 쉽지 않겠지만,
술 한잔한 김에 기분이 좋아진 홉킨스와 미하엘에게 있어서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로 그 계획을 실행할 것도 아니었고…….
사실, 내성까지 털 필요도 없었다. 금은보화가 쌓이고 있는 속도로 짐작하건대 며칠 더 지나고 나면 외성의 보물들만으로도 링카까지 어떻게 옮길지를 고민해야 할 수준이 될 거라고 추정될 정도였다.
홉킨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약탈물들을 바라봤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약탈물을 챙긴 건 자신이 용병 생활을 한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이때,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놈이 나타났다.
“크, 큰일 났어!”
문을 벌컥 열고 급히 들어온 사람은 바로 마법사 펜달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주민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어?”
다급한 펜달의 안색을 보며 홉킨스는 반란을 생각했다. 약탈을 당하던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반항을 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건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다.
펜달이 당황할 정도로 커다란 반란. 적의 잔존병력이 포함되거나, 부호들의 사병들이 결집된 대규모 병력이 반기를 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들 약탈하느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니, 재수 없으면 큰 피해를 당할 우려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지를 순간적으로 고심하고 있는 홉킨스에게 펜달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변경백 쪽에서 지금 당장 작전을 중지하고 회군하라는 지시를 보내왔어.”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도로 쌓이고 있는 약탈물을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부호들이 집 구석구석에 은밀하게 감춰놓은 보물들을 찾아내는 거야 시간상 포기한다고 해도, 대략적이나마 뒤지는데도 최소한 삼사일은
더 필요했다. 이게 어떻게 얻은 절호의 기회인데…….
“미친 새끼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무시해버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뭔가 심상치 않아. 통신 말미에 도시연합 쪽에서 보낸 지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출동했던 6개 사단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대. 그러니 최대한 빨리 회군해서 안전한 지역으로 탈출하래.”
그 말에 홉킨스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펜달을 노려봤다. 이놈이 미친 건가?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드넓은 사막 안에서 병사 한둘 없어지는 거야 그럴 수 있다손 쳐도, 6만씩이나 되는 대병력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아무 흔적도 없이?
“혹시 너 술 마셨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대충 장단을 맞춰주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연대장에게, 펜달은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어젯밤에 엄청난 마법이 발동된 걸 링카 성의 마법탑에서 포착했다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요격부대의 마법사들과 통신을 시도했는데, 전혀 연락이 되지를 않더래.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용기사들을 투입해 매복지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였어.”
용기사는 밤에는 날 수가 없으니, 해지기 전에 수색을 종료하고 링카 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링카 성 영주는 결단을 내려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고.
하지만 홉킨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창한 마법이 발동되었다고 해도 6만씩이나 되는 대병력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게 말이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홉킨스에게 펜달이 다급히 말했다.
“병사들이 없어진 탓에 지금 당장 도시연합 쪽에서 밀려오고 있을 적병을 막을 병력이 없다는 게 문제야. 안 그래?”
펜달의 지적에 그제서야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홉킨스.
링카 영지군이 행방불명된 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런 젠장! 그럼 큰일이잖아.”
홉킨스는 급히 지도를 꺼내 살펴봤다.
자신들이 외성을 점령했을 때, 도시국가 연합의 구원군이 출발했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있을까?
무엇보다 링카 성 마법탑에서 포착했다는 마법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링카 성에서조차 포착이 가능했을 정도라고 했으니 엄청난 대마법이 사용됐다고 봐야 한다. 그랬기에 6만이라는 대병력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일 게다.
시쳇더미를 찾고 못 찾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미하엘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설마 드래곤이 개입한 게 아닐까요?”
정신없이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홉킨스를 대신해서 펜달이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인간의 힘으로 6만을 날려 버릴 마법사가 존재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드래곤이 언제 들이닥칠지…….”
펜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만약 드래곤이 우리를 박살낼 생각이었다면, 벌써 이곳으로 왔을 테니까.”
펜달의 말에 홉킨스는 정신을 차린 듯했다. 창백했던 핏기가 살짝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