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 대군이 사라지게 만든 마법이 포착된 게 어젯밤이라 했어. 만약 드래곤이 개입했다면 그 즉시 이쪽으로 왔을 거야. 우리는 여기서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지만, 드래곤은 자유자재로 쓸 수 있거든.”
펜달의 설명에 홉킨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지. 아마 자네 추측이 맞는 거 같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냐. 당장 전 대대장들 불러들여. 그리고 약탈하러 나간 녀석들도 빨리 복귀하라고 전달해.”
홉킨스의 지시를 받은 미하엘은 약탈 나간 대대장들을 소집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리오 프라이스는 다 늙어가지고 괜히 모험을 떠났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상상해 왔었던 모험과 실제 모험은 완전히 달랐다.
모험을 시작한 이래 그가 마법을 써서 적을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오로지 말 타고 강행군만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베이라 성을 기습하기 위해 달려갈 때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뭔가가 있었다. 간혹가다 진귀한 몬스터의 사체를 구경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고기의 맛도 볼 수가 있었다. 지금껏 상상만 해왔던 모험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기에 더욱 각별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프라이스가 환상에서 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모험 한번 해보지 않은 연구실 마법사였다. 그가 꿈꿔온 전투는, 앞에서는 거대한 타이탄들끼리 격전이 벌어지고 뒤에서는 마법사들이 치명적이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법을 적을 향해 난사하는 그런 것이었다. 실로 장엄하지만 피를 볼 일은 없는, 그런 멋진 전투였다.
하지만 그런 상상과 달리 실전은 전혀 달랐다.
연대 내의 마법사는 자신을 포함한다 해도 고작 일곱 명. 그들 모두 통신기로서 참전한 것이었을 뿐, 화력지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벌어진 병사들 간의 전투는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전장에 흐르는 흥건한 피와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 프라이스는 그 끔찍함에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고,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현실의 전투는 낭만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처절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전투에 참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프라이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아르티어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스승님, 자 가시죠. 사방에 전리품이 널려있습니다. 전투의 꽃은 전리품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드시는 거 있으시면 모두 다 챙기십쇼.”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와 거기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물들!
짙은 피 냄새에 현기증과 함께 속이 메슥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쭈그려 앉아 구토라도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서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애써 참고 있던 중이었다.
치열했던 전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다음부터 시작된 것은 잔인한 약탈이었다.
용병들은 저항하는 부자와 그의 사병들을 학살하고, 닥치는 대로 뺏고 있었다.
가진 게 별로 없는 일반 시민들은 용병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부자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약탈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살육에 미친 용병들은 겁에 질린 일반 시민들조차 잔인하게 죽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특히나 반반한 미모의 여성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허리춤을 풀고 달려들었다.
사방에 넘쳐흐르는 핏물과 처절한 비명,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체들까지.
얼마 전까지 평온한 삶을 살던 프라이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아, 아니……. 나는 괜찮네.”
프라이스의 심정이 어떤지는 그의 표정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속을 살살 긁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요.”
프라이스는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걱정 말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럼 저는 실례하겠습니다. 무역로의 중심도시니, 정말 괜찮은 게 많거든요.”
하지만 이런 광란의 약탈 행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숙소에 들어박혀 귀를 막고 있기를 며칠, 오랜 행군의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아르티어스의 부하인 매튜가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르신,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미 어르신께서 드실 식량과 식수는 충분히 말에 실어뒀으니 개인 짐만 챙겨서 빨리 나오십쇼.”
“고맙구먼. 그런데 아직 내성조차 함락하지 않았는데 어디로 출발한다는 건가? 설마 또 다른 적이라도 출현한 건가?”
프라이스의 물음에 매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고, 즉시 출발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입니다. 제자분께서도 이미 준비하고 계시고요.”
베이라 성을 기습하기 위해서 진격할 때는, 자신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밤에만 은밀하게 이동했고 낮에는 쉴 수가 있었다.
낮에는 살이 익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사막이었지만, 아르티어스가 마법으로 깊게 판 모래 구멍 속은 의외로 쾌적하여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물론 아르티어스 자신이 쉴 곳을 판 김에 노마법사에게 그 옆에서 쉴 수 있도록 해준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베이라 성에서 벗어나 링카 성의 본부로 회군할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대한 빨리 후퇴하는 것만이 살길이었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당연히 허약한 노인의 몸이 그런 강행군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 도대체 언제 쉴 수 있는 게야? 아이고 허리야…….”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프라이스는 자신의 제자 흉내를 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 환상적인 모험을 할 수 있게 해주어 너~무 고맙네. 아마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걸세.”
마치 꿈에서 나올까 겁난다는 듯 끔찍한 표정으로 말하는 리오 프라이스.
그런 노마법사의 표정을 아르티어스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속마음은 어쨌건 그의 말투는 아주 정중했다. 그 점이 프라이스를 더욱 불쾌하게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좋은 추억이 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스승님.”
“모처럼 자네가 모험에 데려와 줬지만, 내게는 여기까진가 보구먼.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더 이상 오래 있다가는 자네의 짐이 될 거 같아서 말일세.”
프라이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집으로 돌아가시다뇨? 이 깊은 사막 한가운데서 어떻게 혼자 돌아가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마법 실력을 너무 형편없이 보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나빠진 프라이스는 약간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공간이동 마법이 있잖은가. 내 실력이 비록 자네에 비해 미천하긴 하네만, 링카 성까지는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네. 그러니 어서 링카 성 인근의 공개 좌표만 알려주게.”
링카 성에서는 공간이동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걸 이용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뜻이리라.
드디어 아르티어스가 지금까지 숨겨왔던 걸 말할 때가 됐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겉으로는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간이동이라니요? 모험을 그렇게 꿈꾸셨으면서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프라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뭘 모른다는 건가?”
“스승님께서는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지역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알카사스 왕국 전역이 그런 공간이동 불가 지역이었으니까.
국가에서 건설해 놓은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일반인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마법사의 공간이동은 역장왜곡을 통해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 알카사스였다.
인근에서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코린트 제국이 공간이동하여 기습 공격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알카사스 왕국에서는 역장왜곡망을 가동하기 전에 마법사 길드를 통해 전 대륙의 마법사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었다. 그래야 엉뚱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알카사스 왕국 내에서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가?”
“쯧쯧, 알카사스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도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기 때문이죠.”
“서, 설마 그럴 리가……?”
아르티어스의 말에 프라이스의 표정에는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이 망할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스승님께서는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불모의 대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곰곰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모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던 리오 프라이스가 그런 얘기를 들어봤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가 읽은 모험담 중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공간을 다룬 얘기는 없었다. 그런 곳에는 마법사가 아예 모험을 하러 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리오 프라이스도 이곳 사막에서 공간이동 마법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걸 사전에 알았다면 절대로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구먼.”
“대륙 간 무역을 방해하기 위해 실버 드래곤들이 장난질을 쳐놓은 탓에 이곳 사막지대에서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습
니다. 그래서 저는 스승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모르고 계실 줄이야.”
“……?”
프라이스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아르티어스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손까지 내저으며 변명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알카사스 왕국 전역에 설치되어 있는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역장 체계도 이곳 사막을 참고해서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하더군요.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다면 근처 다른 마법사들을 붙잡고 물어보십쇼. 제 말이 거짓말인지.”
리오 프라이스로서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이 끔찍한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 아르티어스의 말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으니까.
지금껏 프라이스가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은 언제든 공간이동 마법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희망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남은 건 처절한 절망뿐이다.
그래서인지 프라이스의 얼굴은 이미 한껏 일그러져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허~, 이런 난감할 데가……. 그렇다면 공간이동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르티어스는 광소를 터뜨리고 싶었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며 짐짓 미안한 척 고개를 숙였다.
“예, 스승님. 어쩔 수 없이 좀 더 모험을 하셔야겠습니다. 모험에 있어서 초보이신 스승님께 처음부터 이런 힘든 모험을 하게 해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설마, 우리 페가수스 용병단이 이렇게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게 될 거라고는 이 제자,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어,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는가. 멋모르고 따라온 내 잘못인 것을.”
아르티어스의 사죄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프라이스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중히 사죄하는 그 말조차 왠지 거슬렸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리오 프라이스를 놀려먹은 뒤, 아르티어스는 다시금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 처음에는 부정한 기운이 남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북쪽으로 꽤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북쪽 저 먼 곳에서도 부정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처음에 생각했었던 가설이 무너진다. 그는 이 부정한 기운에 실버 드래곤이 어떤 형식으로든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 시작이 저 북쪽이었고, 그 부정한 기운이 점차 아래쪽으로 퍼져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일이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구만. 정말 마왕이라도 강림한 건가?”
황실과 원로원의 암투
마도왕국 알카사스에서 국왕과 동등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원로원(元老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