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다란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존재가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알카사스 왕실에서 어떻게든 원로원을 제압하고 싶어도 그 위치는 물론이고, 그 구성원조차 알아내지 못했기에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왕실은 완전히 밖에 다 드러나 있었고…….
밖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원로원 의장인 크리스티안 에스테반 단 한 명뿐이었다.
그의 존재가 왕실에 알려져 있는 것은, 국왕과 회담을 하여 담판을 지려면 원로원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야 했고 그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크리스티안 에스테반이었다. 그리고 그라면 왕실에서도 인정할 만큼 격에 맞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어떤 인물들이 원로원에 소속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를 만큼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었다.
“링카 변경백이 사막 무역로를 정벌하려는 건 모두들 아실 겁니다.”
왕실에서 원로원에 이번 전쟁의 전술에 대해 통보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정보부를 움켜쥐고 있는 원로원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만큼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건너뛰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도시국가 연합을 치기 위해 매복해 있던 변경백 직속 6개 사단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허어, 6만씩이나 되는 대병력이, 어찌 그럴 수가……? 그렇다면 뭔가 흔적이라도 남아있을
게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군요. 확실한 정보입니까?”
“현재 팔콘 기사단 분견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모든 용기사들을 투입해 확인 중이라고 합니다. 매복해 있던 주변 일대를 현재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까지는 그 어떤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마치 그쪽에 아무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정말 믿기 힘든 일이군요. 혹시 뭔가 징조라도 없었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설마…, 드래곤이 개입한 겁니까?”
정보부를 쥐고 있는 원로의 말에 회의장에 앉아있던 다른 원로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제각각 입을 열었다. 질문을 던지는 원로들의 말은 다 달랐지만 반응은 모두들 똑같았다. 그건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링카 성 마법탑의 보고에 따르면, 그 일대에 대규모 마법이 사용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드래곤이 그 짓을 했다면 자신이 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흔적을 남겨놨을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마법이 사용된 흔적은 물론이고, 시체조차 단 한 구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가장 상석에 앉아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에스테반 의장이 입을 열었다.
“왕실 쪽 동태는?”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변경백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이번 사태의 범인이 드래곤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몸을 사리는 것이겠지요.”
“흠, 그럼 링카 변경백 쪽은?”
“미지의 적에 대한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변경백의 힘만으로 방어가 가능할까?”
“드래곤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던 에스테반 의장은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 쪽에 지시는 내렸나?”
“이미 팔콘 기사단장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링카 영지에 은밀히 전개, 미지의 적습에 대비하라고 말입니다.”
“잘했군. 그럼 이제 미지의 적이 누구인지 알아낼 차례인가?”
에스테반 의장은 시선을 돌려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정보부를 책임지고 있는 원로였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놀랍게도 전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도시국가 연합 쪽으로 보낸 첩자들과의 연락이 모두 끊기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원흉인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흠, 그놈들만으로 이런 대담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 배후에 드래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로군.”
아무리 도시국가 연합의 뒤를 실버 드래곤이 봐주고 있다지만 그건 적국이 공격해 들어올 때의 얘기였다. 만약 뒤를 봐주는 실버 드래곤만 아니었다면 링카 변경백의 힘만으로도 도시국가 연합을 박살낼 수 있을 만큼 알카사스와 도시국가 연합과의 전력 차는 컸다.
그런데 그런 도시국가 연합이 아무 대책 없이 도발을 감행했을 리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드래곤의 협조 내지는 허가를 받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잠시 눈가를 찌푸리며 고심을 하던 에스테반 의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는 듯 침통한 표정의 노인에게 지시했다.
“드래곤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면 팔콘 기사단을 전진 배치하는 건 너무 위험해. 링카 변경백과 정보부를 움직여 콘도르 기사단을 전면에 내세우도록 하게.”
팔콘 기사단은 원로원 직속이지만, 콘도르 기사단은 왕실 직속이다. 그런 만큼 드래곤이 개입해 들어와 아군에 커다란 피해를 안긴다 해도, 그 책임을 슬쩍 왕실 쪽으로 뒤집어씌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의장님.”
✻ ✻ ✻
새벽녘에 베이라 성을 탈출한 페가수스 용병단은 무려 이틀 밤낮에 걸쳐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물론 처음에만 전속력으로 달렸을 뿐, 그다음부터는 말이 지쳐버려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흘째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홉킨스는 전 부대원들에게 잠시 휴식을 허용했다.
사막은 메마른 땅이었기에 대부대가 이동하면 모래 먼지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런 만큼 혹시 뒤쫓는 무리가 있다고 해도 곧바로 발견이 가능했다. 문제는 이쪽의 움직임도 적들이 포착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었지만.
수석대대장 스미스가 홉킨스에게 보고했다.
“다행히도 따라붙는 적의 추격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물 보급을 받을만한 데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젭니다.”
베이라 성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는 후방으로부터 식량과 물을 보급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이동하게 될지조차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보급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병사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말이 버티지를 못할 겁니다.”
베이라 성에서 약탈한 수많은 금은보화들이 수레에 실려 있었기에 말이 지쳐 쓰러지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건 오로지 돈 때문이다.
물론 돈보다야 목숨이 중요하겠지만 만약 말을 버리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 부대 내에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랬기에 한참을 고심하던 홉킨스는 지도를 바라보다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15킬로 정도쯤 가면 작은 성읍이 하나 있다. 거기서 물을 보충받으면 되겠지. 무슨 문제는 없는지 미리 정찰조를 보내 철저히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파견했던 정찰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작은 성읍이라 딱히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한 홉킨스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은 작은 위험 따위는 감수할 만큼 식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홉킨스의 명령에 강행군을 한 덕분에 예정보다 조금 빨리 목적지인 작은 토성 인근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때 앞서 보냈던 정찰대가 돌아와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뭐냐?”
“인기척이 없어 성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이곳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네다섯 개의 토성을 쌓아두고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하면서 생활한다. 안 그래도 풀이 적은 사막에서 가축들을 키우자니 어쩔 수 없이 발달한 생활양식인 셈이다. 그렇기에 정찰대는 토성이 빈 곳인 줄 알고 들어갔던 모양이다.
곧이어 홉킨스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정찰대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성안이 언데드로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언데드?”
“예. 사람이건 동물이건 성안에 있는 건 모두 다 언데드였습니다.”
홉킨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잘못 본 거 아냐? 이렇게 건조한 지역에 언데드라니…….”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정찰대원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제 두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한 후 보고드리는 겁니다. 정히 못 믿으시겠다면 다른 정찰대원을 불러 물어보시죠?”
“젠장, 네 말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하도 어처구니없는 보고라 그런 거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홉킨스는 마법사인 펜달에게 조언을 청했다.
“사막에서 언데드가 나타나기도 하나?”
그러자 펜달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사막 같은 악조건에서 살아가는 데는 물과 식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언데드가 훨씬 유리한 게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여기서 물을 보급 받으려면 그 잡것들을 박살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군. 이봐, 스미스! 모두 전투 준비하라고 해! 그리고 부대원 중에서 언데드와의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가 있는지 알아보고.”
홉킨스의 지시에 22대대장 스미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하지만 홉킨스의 기대와 달리 언데드와의 실전경험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페가수스 용병단이 활동하고 있던 주 영역이 건조한 반사막지대인 알카사스였던 만큼, 그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뭐, 어쩔 수 없지. 저놈들을 제물로 실전경험을 쌓는 수밖에. 다행히도 녀석들은 토성 안에 갇혀 있는 상태다. 먼저 성벽 위를 장악하고, 놈들이 성벽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길들을 모두 차단해라.”
홉킨스의 명령에 부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가수스 용병단의 이름이 헛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빠르고 숙련된 움직임이었다.
그런 용병들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희희낙락 프라이스를 데리고 구경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보십쇼, 스승님. 이거 정말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구경거리니까요.”
사람은 물론이고 낙타, 양, 소, 닭 등등 성 내의 모든 동물들이 다 언데드가 되어 있었다.
살점이 짓물러 터져 허연 뼈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 끔찍스러운 고깃덩이들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성벽 아래로 몰려들었다. 눈알이 빠져 텅 빈 동공이었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성벽 위쪽을 향해 들고 있었다. 마치 성벽 위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끔찍한 모습에 프라이스는 하마터면 구토를 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을 가장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저, 저게 언데드라는 것인가?”
“예. 특이하게도 이런 건조한 지역에서 발생했네요.”
천 명이나 되는 대병력인 만큼, 작은 성벽 위로 다 올라갈 수는 없었다. 일부 병력이 만일을 대비하여 성문 쪽에 방어진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 활을 지니고 있는 용병들만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화살을 쏴라!”
명령에 따라 성벽 위 용병들의 손에서 수많은 화살이 날아갔고 무방비로 서 있던 언데드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버렸다.
홉킨스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짓는 것도 한순간, 그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사격 중지!”
놀랍게도 언데드들은 온몸에 화살이 잔뜩 박혔음에도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쓸데없는 화살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불화살을 쏘라고 할까요?”
옆에 서 있던 스미스 대대장이 슬쩍 제안을 해 왔지만 홉킨스는 인상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그게 효과가 있을까?”
고심을 하던 홉킨스는 마법사인 펜달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무래도 칼이나 휘두르는 자신들보다 그래도 공부를 많이 한 마법사가 조금이나마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뭔가 방법이 없겠나? 화살은 전혀 먹히지 않는 것 같아. 그럼 창칼도 별 효과가 없을 거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