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4화 (914/930)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펜달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본 기록에 의하면 저런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는 일반 날붙이로는 그 어떤 타격도 입힐 

수 없다고 하더군. 언데드에 가장 효과적인 건 성수(聖水)라고 들었어.”

“이런 젠장, 지금 여기서 그런 걸 어떻게 구해!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쯧쯧, 성질머리하고는.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어. 간단해. 뼈를 박살내면 될 거야. 언데드의 생명의 근원은 뼈에 있거든.”

“뼈?”

“그래, 뼈. 저 썩어빠진 살덩이는 아무 의미가 없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살덩이는 다 썩어서 떨어지고 뼈다귀만 남게 되지. 그게 언데드의 본모습인 거야.”

언데드와 대치한 이래 처음으로 홉킨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호…, 뼈를 부수면 된다 이거지?”

홉킨스는 스미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도끼나 둔기를 가진 병사들만 집합시켜.”

그때 펜달이 옆에서 조언했다.

“혹시 병사들 중에서 마법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집합시키게. 언데드에게는 마법무기가 아주 잘 먹히지.”

홉킨스의 지시에 따라 즉각 병사 차출이 이뤄졌다. 도끼나 철퇴, 망치 등 각종 둔기류를 지닌 병사들과 소수이기는 했지만 마법무기를 소유한 병사들이다.

“뼈를 산산이 부수기만 하면 죽일 수가 있다고 한다. 자, 공격!”

마법무기가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했지만, 기사들과 달리 마나를 그리 많이 보유하지 못한 용병들이 그걸 장시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마법무기를 든 병사보다 오히려 둔기를 지닌 병사들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머리통에 화살을 맞은 채로도 움직이던 언데드들이었지만 두개골이 박살이 난 후에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 외에 다른 뼈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정량 이상의 뼈가 박살이 나면 생명이 다하게 되는 모양이다.

언데드들에게 공격이 먹힌다는 것을 안 용병들은 용기백배하여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언데드들의 육체가 하나둘씩 박살이 났다. 썩은 체액과 살점들이 사방에 튀는 처참한 모습! 곧이어 그보다 더욱 끔찍한 악취가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우윽, 냄새!”

“크윽, 코가 썩어들어가는 것 같아! 이런 지독한 악취는 내 살다 살다 처음이다!”

“우웨에엑!”

처음에는 언데드들의 끔찍한 모습과 악취 때문에 비위가 상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온갖 전쟁터를 전전하며 피 튀기는 접전을 경험해 왔던 용병들이다. 이보다 더 끔찍한 전투도 수없이 경험했을 노련한 용병들이 저렇게 구역질을 해대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토를 해대는 용병들을 바라보던 펜달은 뭔가 떠올랐는지 다급히 홉킨스에게 외쳤다.

“병사들을 후퇴시키는 게 좋겠어. 빨리!”

전투가 순조롭게 잘 전개되고 있는데 후퇴하라는 펜달의 말에 홉킨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럴 이유가 있나?”

“이건 시독(屍毒)이야. 빨리 뒤로 물려!”

동물의 사체가 썩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들의 총칭이 시독이다. 흡입하면 즉사하는 맹독은 아니지만 해독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용병들이 격렬한 전투를 하는 중이라 가쁜 호흡을 타고 시독이 급속히 몸에 퍼지게 된다는 것도 문제였다.

“시독이라고? 이봐! 스미스! 병사들을 뒤로 퇴각시켜! 빨리!”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홉킨스는 머리를 움켜쥐며 절망했다.

언데드를 잡으려면 가까이 근접하여 둔기와 같은 무기로 놈들의 뼈를 박살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시독에 중독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데드들의 시독이 사라지고 백골만 남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정말 난감한 것이다.

저 망할 놈의 언데드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고 있는 홉킨스에게 펜달이 암울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헛수고하지 말고,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게 좋겠어.”

“무슨 소리야? 현재 보유 중인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잘 알면서…….”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런 말을 할까? 물론 병사들을 시독에 걸리든 말든 갈아 넣어서 언데드들을 박살낸다고 치자고. 그런데 저놈들을 봐. 사체에서 흘러내린 시독이 이미 우물을 오염시켜 버렸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나? 그러니 아무리 물이 급해도 미련을 버리자고.”

펜달의 조언에도 홉킨스는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우물을 바라봤다.

우물은 성 중앙의 공터에 있었기에 성벽 위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우물 위에 허접하게나마 뚜껑이 덮여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아직 우물이 오염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 그래도 우물 깊이가 있는데,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좋을 대로 하게.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거니까.”

홉킨스는 주위에 서 있는 대대장들과 마법사들을 빙 둘러보며 물었다.

“뭐, 좋은 의견 있는 사람 있나?”

모두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대장들과 마법사들을 쭉 훑어보던 홉킨스의 시선이 랄프 디겔에게서 멈췄다. 이 전에도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했었으니 어쩌면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하지만 애타는 그의 속마음과 달리 랄프 디겔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디겔은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익힌 잡다한 마법들이 상황에 딱딱 맞아떨어진 것이었을 뿐. 실망한 홉킨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저 가급적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뒤로 물러

선 것뿐이다. 하지만 홉킨스는 혹시나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디겔, 뭔가 방법이 없겠나?”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이쪽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전문 분야?”

그 말에 홉킨스는 자신이 기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언데드 퇴치를 전문으로 하는 건 마법사가 아니라 신관이다. 문제는 용병단에 흘러들어온 신관의 실력이라는 게 뻔하다는 것이었지만.

홉킨스는 얼른 신관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모두들 종군 중에 수고들 많으시오. 혹시 효과적으로 언데드를 퇴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신관분은 없으시오?”

홉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선뜻 앞으로 나서는 신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관들 중에서 언데드와의 전투가 가능한 것은 성기사와 같이 전문적인 전투 교육을 받은 신관들뿐이다. 용병대에 속해 있을 정도의 신관이면 그 능력이야 뻔한 것이고. 더군다나 알카사스처럼 건조한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언데드를 볼 일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정보조차 아예 깜깜했다.

식수는 다 떨어져 가고, 말을 버리자니 힘들게 약탈한 금은보화를 버려야 하니 홉킨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좌중에 있는 모든 대대장과 마법사들,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휘부 안은 암울한 기운이 무겁게 가라앉아 모든 사람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아르티어스만이 내심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을 뿐.

제가 삼류마법사다 보니

“끄응…, 이거 정말 난감하군. 방법이 전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말을 포기하고…….”

이때, 아르티어스의 뒤쪽에 서 있던 늙은 마법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리오 프라이스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방법이 없으면 식수를 포기하고 이대로 떠날 것만 같았다. 그러면 얼마나 험난한 고난이 자신의 앞에 닥쳐올지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마실 물이 없어 갈증에 시달리는 건 둘째 치고, 말이 죽어버린다면 그다음부터는 저 열사의 사막을 걸어서 건너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용병단원이 아님에도 염치 불고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방법이 있소.”

“저 사람은 누구지……?”

홉킨스의 시선을 받은 펜달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주 빨랐다.

“디겔의 스승이야. 부대가 출동하기 전에 단장께서 데려가도 좋다고 허락하셨지.”

펜달의 말에 홉킨스는 가볍게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아, 랄프 디겔의 스승이셨군요. 부대원이 워낙 많다 보니 합류하셨던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 방금 전에 방법이 있다고 하셨는데, 허언은 아니시겠죠?”

홉킨스의 물음에 프라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물론일세. 내 용병단을 따라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지금껏 모험을 꿈꾸며 여러 지식들을 섭렵했었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건 전투신관이겠지만, 신관이 없을 때는 화염마법으로 태워버리면 간단히 해결된다네.”

그 말에 홉킨스는 반색하며 황급히 되물었다.

“화염마법이라……? 스승께서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불가능했다. 작은 성이긴 했지만, 저 안에 있는 모든 언데드를 화염마법으로 불사르는 건 그의 능력 밖이었다.

“나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이곳의 모든 마법사가 힘을 합친다면 가능할 거 같은데…….”

그러면서 그는 힐끗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감추고 있다는 것도. 도와주지? 하지만 간절한 그의 바람과 달리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겨버린다. 그럼에도 리오 프라이스는 계속 아르티어스를 쳐다봤다. 주위의 그 누구라도 뭔가 있을 거라는 의구심이 생기도록.

당연히 그 광경을 홉킨스도 봤다. 스승의 저 애절한 눈길이 뭘 뜻하는 것일까? 통신기 역할로 온 디겔이지만 기막힌 마법 응용으로 성 점령 시 큰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제자를 잘 아는 건 그 스승일 테니 애절한 저 눈빛으로 미루어 추측해 본다면?

“디겔,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채 답하기도 전에 펜달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는 당치도 않다는 듯 딱 잘라 외쳤다.

“물론 불가능하지! 나도 할 수 없는 걸 저따위 삼류 마법사가 할 수 있을 리가 있겠나? 연대 내의 모든 마법사가 달라붙어 화염구를 퍼부어도 저렇게 많은 언데드들을 불사르는 건 불가능해!”

펜달의 말은 물론 맞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는 그걸 핑계로 귀찮은 일에서 벗어나 슬그머니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허접한 실력의 마법사놈이 자신에게 삼류 마법사 운운해대자 살짝 기분이 나쁜 것이다. 아주 몹시…….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증폭마법진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펜달 님의 말마따나 제가 삼·류·마·법·사라 제 능력으로는 이렇게 많은 인원과 함께 마법진을 가동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혹시 마법진의 중심에 펜달 님이 서주신다면, 미력하나마 마법진을 그릴 수는 있습니다.”

“흠, 마법진을 그릴 수는 있는데 그걸 가동시키지 못한다니, 그럴 수도 있나?”

홉킨스의 의문 섞인 시선에 아르티어스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리는 것과 가동시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죠. 뭐라 할까……, 효율의 문제랄까요? 저 같은 경우, 평소에는 대자연의 마나를 끌어당기는 흡수 마법진의 도움을 받습니다만…….”

아르티어스는 짐짓 주변을 쓱 훑어보는 척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 이런 날씨라면, 저 혼자서도 넉넉잡고 2주일 정도면 저 안의 언데드들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홉킨스도 용병단 내에서 떠도는 얘기를 들은 게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디겔이라는 신입 마법사가 대지 마법진을 구동하여 땅속에 숨은 고블린들을 압살시키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 걸 보면 마법진을 그리는 실력은 상당한 수준인 모양이다.

몸에 지닌 마력이 뒷받침하지 못해 연구소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용병단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라고 그는 이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