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9화 (919/930)

브로마네스의 물음에 그의 부하들이 대답했다.

“이걸 어떻게 옮길 방법이 없을까요? 중대장님.”

“저런 쓰레기, 가져가서 뭐 하려고?”

마치 똥을 쳐다보듯 거대전갈을 바라보는 브로마네스의 표정에 부하들은 자신들 상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레기라뇨. 이걸 링카 성까지 가져갈 수만 있다면 거금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맞아. 옮기는 건 힘들겠지만, 가져가기만 하면 거부가 될 수 있지.”

“저런 쓰레기로?”

브로마네스는 콧방귀를 뀌며 뼈가 무더기로 쌓여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그 단단한 등껍질 부위를 쾅 치며 말했다.

“봤냐? 이건 쓰레기야.”

놀랍게도 브로마네스의 주먹질에 전갈 껍질이 푹 파였다.

“언데드가 됐던 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죽기 전에야 강철 같았는지 모르지만 죽고 나면 이딴 쓰레기로 변해.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모두들 출발할 준비나 해.”

“에잇, 좋다 말았네.”

“어쩐지, 기사들이 그냥 떠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거대전갈에 달라붙어 있던 용병들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전위로 달려가고 있는 기사단원들 중에서 말에 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홉킨스가 말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음에도 라이놀은 정중히 거절했다. 단지 식량과 물만 지원받았다.

“앞서 달릴 테니 뒤에서 따라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앞서 달리고, 아르티어스와 호위들은 말에 탄 채 그 뒤를 쫓았다.

앞서 달리는 기사들의 속도가 그리 느린 것도 아니었음에도 누구 하나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들이 달리고 있는 땅이 탄탄한 대지도 아니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장면은 본 적도 없었던 아르티어스의 호위들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만 터트렸다. 

한 시간여를 달린 후,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라이놀의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들 모래 위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라이에게 접근했다.

“아직 어린듯한데 벌써 정규 기사단에 입단하다니, 대단한 실력인가 보구먼?”

부끄러움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라이가 대답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 좋다고 정규 기사단에 들어올 수는 없다. 고귀 귀족의 자제나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없지 않는 한. 

기사단과 동행하게 된 후, 그동안 아르티어스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근히 라이를 살펴봤었다.

드래곤인 그가 호비트의 정확한 연령대를 짐작하는 건 좀 힘든 게 사실이긴 했지만, 아들이 

환생했을 나이대는 아닌 듯했다. 17세 정도의 수컷 호비트라고 보기엔 키도 작고 덩치도 작다. 추정되는 나이대를 생각한다면 상당한 량의 마나를 단전에 축적하고 있는 게 이채롭기는 했지만, 뭐 기사단원이라면 그 정도는,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마나를 지니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간과하고 넘어간 게 있었으니, 라이의 단전에 축적된 마나는 전설적인 도가의 심법인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을 통해 모인 정순한 기운이었다. 일반적인 잡스러운 기운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막강한 기운인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라이가 호비트들이 말하는 명문 무가 출신으로,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기사단에 들어와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정규 기사단이라는 데가 운만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그래, 자네 고향은 어딘가?”

“다란스 출신입니다.”

뻔한 거짓말에 아르티어스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어투에 크라레스 억양이 짙게 배여있는 놈이 제도(帝都) 다란스 출신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음흉스럽게도 그 의문은 그냥 묻어둔 채 얘기를 계속 나눴다. 괜히 상대에게 경계심을 품게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절대적인 기억력을 지닌 드래곤이었기에 굳이 마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이런 대화 속의 모순들을 찾아내어 진실을 포착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아, 혹시 제 말투 때문에 오해하실 수 있는데 전 다란스 토박이 맞아요. 단지 어릴 때 유모(乳母)가 크라레스 출신이라 말투가 이렇게 된 겁니다. 같이 놀면서 성장한 유모의 아이들 영향도 컸구요.”

“아하, 그렇구먼. 어쩐지, 이런 곳에서 동향 사람을 만났나 싶어 무척 반가웠었는데, 아니었네. 실은 내가 크라레스 출신이거든.”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아르티어스와는 달리 라이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셨군요. 크라레스에 대해서는 유모를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고요.”

“뭐, 그렇긴 하지. 휴우, 어릴 때 뛰어놀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말토리오 산맥이 그립구먼.”

은근히 떠봤지만 라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크라레스에서 성장하지를 않았으니 그곳에서의 추억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걸 보고 아르티어스는 최종적으로 라이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해질녘이 되자, 라이놀은 용병대 지휘관 홉킨스와 논의했던 대로 행군을 멈췄다. 용병단은 계속 이동해 해지기 전에 기사단과 합류했다. 이동할 때라면 정찰을 위해 기사단이 선행하는 게 좋지만, 야숙을 할 때는 모두 함께 모여있는 편이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위가 탁 트여있는 데다, 시야를 막는 거라고는 군데군데 솟아있는 작은 관목들뿐. 기습을 당할 염려는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모두 안심하고 야숙 준비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자리 잡은 곳과 그리 멀지 않은 모래 밑에 링카 영지군 6만을 궤멸시켰던 바로 그 언데드 군단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차후에 있을 링카 영지와의 전투를 위해 알파17이 주둔시켜 놓은 언데드 군단이었다. 

자아가 없는 언데드들이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이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던 이유는, 그곳 지하에 마신의 은혜가 하나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강렬한 생명의 향이 풍겨오는 것이 아닌가.

본능적으로 생명력을 갈구하는 언데드들이었기에 대기하고 있으라는 알파17의 명령을 무시한 채 모래를 뚫고 하나둘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의 기습 공격

수많은 언데드의 갑작스러운 기습은 용병들이 곤히 잠든 한밤중에 일어났다.

“이, 이게 뭐냐?”

“적이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쏟아져 들어오는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언데드들! 사막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몬스터는 물론이고, 사자나 늑대 같은 맹수들, 그리고 영양이나 낙타 등과 같은 초식성 동물. 심지어는 쥐나 도마뱀처럼 아주 작은 것들까지 다종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언데드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다른 비슷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언데드가 된 지 오래되어 새하얀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들부터, 말라비틀어진 가죽과 썩어들어가는 고깃덩이가 뼈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까지 고루 섞여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언데드들이 한데 섞여서 노도와도 같이 밀려들다 보니 어떻게 감당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더군다나 한밤중이라 짙은 어둠 때문에 작은 언데드들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달 하나가 떠 있어 희미하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야를 확보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원형으로 방진을 짜라!”

“모두들 정신 차려!”

여기저기서 장교급 간부들이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이미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부하들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정예병으로 유명한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이었지만, 이런 대처가 힘든 상황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용병들의 공포는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무리 방패로 방진을 형성해도 그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오는 초소형 언데드들! 작은 언데드들이 깨문다고 해서 그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이미 바짝 말라붙어버린 뼈와 가죽만 남아있는 언데드에게는 시독(屍毒)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뭔가가 자신을 깨물게 되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공포에 질린 용병들이 방진에서 하나둘 이탈하며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리고 구멍이 뚫린 엉성한 방진으로는 대형급 언데드의 돌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이때, 기습 후 대처가 늦긴 했지만 빛 덩어리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주위를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수많은 언데드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 자신에게 작은 피해조차 입힐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공포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능력을 드러내 언데드들을 퇴치하면 전투가 끝난 뒤 결국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공식적으로 삼류 마법사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단이 전멸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아르티어스가 잠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전황은 순식간에 파멸로 치닫고 있었다. 숙영지를 습격해 들어온 언데드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하늘 위로 빛 덩어리가 날아올라 주위를 밝혀주자 조금씩 전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랜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용병들답게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부대별로 뭉쳐 대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홉킨스는 악을 쓰듯 소리치며 연신 명령을 내리기 바빴다. 

“연대 전 대원은 동쪽으로 탈출한다! 방진을 흐트러트리지 말고 천천히 이동해라. 정신 차려! 허무하게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이야!”

용병들이 방진을 형성한 채 후퇴를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호위병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렸다.

“나는 여기서 부대원들의 후퇴를 지원하겠다. 그러니 스승님을 잘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시게 해서는 안 돼.”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한 아르티어스의 명령에 그의 호위병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현재 연대에서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는 아르티어스 혼자밖에 없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빛 덩어리들로 인해 겨우 아군들이 용기백배하여 언데드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가 빠진다면 방금 전처럼 혼란밖에 남지 않게 된다는 걸 그들도 잘 아는 것이다.

“맡겨주십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스승님을 무사히 링카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르티어스가 프라이스를 아끼는 마음에 호위들을 떠나보낸 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적당히 마법을 쓰든, 아니면 이대로 유희를 쫑치고 집으로 돌아갈지를 결정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아르티어스가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 정도로 상황은 급속도로 전개되고 있었다.

엄청난 언데드들의 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용병단이 그럭저럭 생존하여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사단의 막강한 전력 덕분이었다.

극에 달한 마나의 힘이 응축된 검식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수북한 뼛조각만이 남았다.

언데드의 크기는 상관이 없었다. 커다란 자이언트 울프부터 시작해 손가락만 한 사막생쥐들까지, 모든 언데드들이 맞는 순간 가루가 되어버렸다.

라이놀을 비롯한 기사들이 라이로부터 배운 검술을 전력으로 전개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렇게나 강해졌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모두들 환희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

예전에는 정규기사들의 보조 노릇이나 하다 정찰조에서 생을 끝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 검술만 있다면, 자신들도 타이탄을 지급받는 정규기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검술의 위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기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용병들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가 벌어줘야 한다!”

잠시 후, 어두운 밤하늘에 둥근 구체 다섯 개가 둥실 떠오르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마법사가 구형의 빛 덩어리를 하늘에 띄운 것이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들은 미약한 달빛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마나를 운용하지 못하는 용병들은 그렇지가 않다. 어둠 속에서 언데드의 공격에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용병들은 빛 덩어리가 떠오른 후, 그제서야 급격히 안정을 되찾았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용병단이 아닌, 정예로 구성된 실력 있는 용병단이라고 하더니 그 이름값은 하는 모양이다.

“용병들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