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1화 (921/930)

“여기는 어디지?”

칠흑과도 같은 어둠, 단 한 점의 미세한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커다란 쇠기둥에 가슴이 꿰뚫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헉!”

급히 가슴을 만져보는 라이, 그게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막에 오기 전 지급받았던 최고급 경갑옷의 가슴 부위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가슴 부위의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보자 맨살이 만져진다. 그리고 가슴 부위의 구멍은 손을 전부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 외에도 옷이 걸레가 될 정도로 수많은 상처들의 흔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살아났나?”

아무리 자신이 키메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재생력은 정말 적응이 안 된다. 어쩌면 불사신이 된……,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키메라들은 머리통을 자르면 죽었다. 그걸 보면 불사신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주변이 너무 어둡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다 보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는 괴물의 입속에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뱃속이지 않을까?

하지만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전혀 뱃속 같지가 않다. 마치 마차나 배 같은 것에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젠장, 뭐가 보여야…….”

라이는 등에 맨 배낭으로 손을 뻗어 작은 불꽃을 만드는 마법도구를 꺼냈다. 모닥불을 피우거나 할 때 쓰라고 지급받은 거였는데, 사용해 보니 여러모로 요긴한 마법도구였다.

마법도구나 컵 같은 건 배낭 옆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들어있었는데, 마법도구를 꺼내면서 

보니 아무래도 배낭의 감촉이 이상했다.

‘이렇게 납작하지 않았는데?’

손가락만큼 짤막한 막대형 마법도구를 들고 “화이어!”하고 시동어를 외치자 마나를 조금씩 빨아들이며 불꽃을 일으킨다. 촛불보다 작은 불꽃이었지만 코앞조차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급히 배낭을 벗어보니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안에 들어있던 물건은 하나도 없다. 물통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 꾸러미조차 남아있는 게 없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은 남아있다는 것 정도.

샌드 웜에게 삼켜지는 과정에서 검은 잃어버렸기에, 단검이나마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마도구가 내뿜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라이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금속 덩어리들이 수도 없이 울룩불룩 불규칙하게 솟아올라 있고, 그것들은 모두 단순한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샌드 웜이 살아있을 때는 근육과 연결되어 움직이던 뼈대들이었겠지만, 언데드가 되어 뼈대만이 홀로 움직이다 보니 뭔가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물론, 생명체의 구조 따위는 알 리가 없었던 라이의 눈에는 이 모든 게 괴이하고 신기하게만 보였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자신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돌기들로 뒤덮여 있는 탓에 돌기 뒤편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 뒤를 하나하나 살펴봐야 하나?’

라이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쓸데없는 짓이다. 만약 적이 저 어둠 속에 숨어있었다면, 자신이 기절해 있을 때 공격해서 끝장을 내버렸을 테니까. 좋게 생각하자. 이 안으로 들어오려면 저 무시무시한 이빨들을 통과해야 한다. 키메라가 된 자신이야 이렇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살아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밖

에 있던 수많은 언데드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이는 자신 외에 두 명을 샌드 웜이 더 삼켜버렸다는 걸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주변을 수색하기보다는 탈출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는 먼저 단검을 꺼내 단단히 움켜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을 가해봤다. 이곳도 금속질로 된 뼈대로 되어있긴 했지만, 어쩌면 이빨보다는 약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카캉!!

순간 불꽃이 번쩍이며 미세한 흠집이 나긴 했지만 놀랍게도 곧이어 흔적도 없이 복구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이면 몸체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구멍을 뚫을 수 없다면, 이미 있는 구멍을 통해 탈출하면 된다. 

앞쪽에 있는 구멍은 자신이 끌려 들어온 목구멍일 것이다. 어스름한 불빛의 도움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니, 목구멍일 것이라 짐작되는 구멍이 하나 있을 뿐, 그 외에는 단단하게 닫혀있다. 그 틈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간다고 해도 구멍 저쪽은 무시무시한 이빨들로 뒤덮여 있는 지옥이다.

“앞쪽은 안돼.”

진저리를 친 라이는 시커먼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쪽에 비해서 뒤쪽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샌드 웜도 살아있을 때는 먹고 그 찌꺼기를 배설했을 테고, 그러자면 항문이 뚫려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라이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쌀 한 톨, 물 한 방울 남아있는 게 없었으니까.

샌드 웜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지 울룩불룩 솟아올라 있는 구조물들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는 벽면 전체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건 기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구조물들 중에서 작은 건 라이의 키 정도였지만, 간혹 라이의 몇 배나 될 정도로 커다란 것들도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뒤쪽으로 이동해야 

하다 보니,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신기하네…….”

자신이 지금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초대형 언데드 뱃속에 들어가, 그 안을 이렇게 구경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라이는 만약 자신이 키메라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안에서 살아 들어올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과연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일 뿐.

이때, 어둠 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샌드 웜의 뱃속 기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더군다나 꼼짝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더욱 이질적이었다.

“저게 뭐지?”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눈에 익은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5미터쯤 되는 거체였는데, 샌드 웜의 이빨에 갈린 탓인지 표면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중에 몇몇 부분은 속의 1차 장갑까지 보일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타이탄이다! 설마, 이놈이 타이탄까지 삼켰을 줄이야…….”

라이는 타이탄의 위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거기 혹시 살아있는 사람 있나요? 이봐요!”

몇 번이고 커다랗게 외쳐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마 탑승했던 기사는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사는 탈출하고, 타이탄만 샌드 웜의 뱃속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라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타이탄의 기본적인 작동기작을 생각하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이탄이 상처를 입기 시작하면, 그 상처를 수복하기 위해 마나를 급속히 뺏기기 시작하고 그

런 이유 때문에 탑승자가 타이탄보다 먼저 사망한다는 걸 라이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타이탄까지 저렇게 됐을 정도인데, 과연 탈출이 가능할까?”

박살난 타이탄을 보자 점점 더 회의감이 싹터왔지만, 라이는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도왕국 알카사스의 정규기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더 뒤쪽으로 들어가자 타이탄이 하나 더 보였다. 방금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타이탄이었는데, 이건 이전과 달리 상처 하나 없는 아주 새것이었다.

“이렇게 생긴 타이탄이었구나. 굉장히 멋있게 생겼네.”

좀 전의 타이탄은 이빨에 갈린 듯한 수많은 흠집들 탓에 가슴에 그려진 문장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타이탄은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처럼 아주 깨끗했다.

“이게 어느 나라 문장이지?”

기사가 되면 각 나라의 문장들에 대한 특별 교육을 받는다. 타이탄에는 소속 국가를 뜻하는 문장과 기사단 문장, 그리고 탑승자 가문의 문장이 기본적으로 그려진다. 그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문장들을 기억해야 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정찰조 소속 기사가 각 나라의 문장을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몸통에 12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시커먼 황소 문장.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저런 국가 문장은 본 적이 없다.

문제는 그 외에 다른 문장은 그 어디에도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교육받은 거와 다른 거야?”

그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봤던 타이탄인 쟈디렌은 가슴 중앙에 국가문장 하나만이 그려져 있었다. 소속 기사단도, 주인도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그 외에 다른 문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쟈디렌에 그려져 있던 것

과는 뭔가 화법이 다르다고 할까, 디자인이 다르다고 할까, 아무튼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국 국적의 타이탄이라는 느낌이다.

샌드 웜의 뱃속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황소 문장의 타이탄은 멋있었다. 쟈디렌과는 급이 다른 멋진 모습!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타이탄에 더욱 가깝게 다가갔다. 그리고 불빛을 들어 올려 황홀한 듯 타이탄을 구경했다. 언제 이렇듯 타이탄을 자세히 구경할 기회가 있겠는가. 방금 전에 온통 이빨에 갈린 듯한 볼품없는 타이탄을 본 뒤에 봐서 그런지 작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의 타이탄이 더 멋지게 느껴졌다.

“쟈디렌하고는 비교가 되지를 않네.”

덩치도 쟈디렌보다 월등하게 컸다. 그리고 외형도 훨씬 더 강인하게 보인다. 아래위로 길쭉한 형태의 거대한 타원형 방패는 왼손에 부착되어 있었지만,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든 게 없었다. 아마도 삼켜지는 과정에서 무기는 놓쳐버린 모양이다.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헉!!”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라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음색. 이곳이 샌드 웜의 뱃속이라서 그런지 묘하게 울리고 있긴 했지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맞다. 그때, 라이놀 조장 덕분에 겪어봤던 상황이었지. 하지만, 그래도 설마 하며 라이는 중얼거렸다.

“설마……, 타이탄 네가 말한 건가?”

『그대는 나와 맹약을 맺기를 원하는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대는 자격을 갖추고 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나와 맹약을 맺기를 원하는가?』

라이는 작금의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타이탄의 가치가 워낙 엄청나다 보니 그 주인이 되려면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 겨우 된다고 라이놀에게서 들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주인이 된다니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훈련을 하면서 봤던 타이탄의 모습에 언젠가 자신도 그 주인이 될 수 있기를 얼마나 소망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그 기회가 자신에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그리고 타이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지 않겠는가.

순간 라이의 가슴속은 희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네 이름은 뭐지?”

『케이론.』

라이는 예전에 라이놀에게 배운 대로 천천히 의지를 담아 말했다.

“케이론, 너하고 주종계약을 맺고 싶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케이론이다. 그대의 이름은?』

“내 이름은 라이, 라이 위너스야. 앞으로 잘 부탁해.”

맹약을 맺은 케이론은 현재 등을 기대고 반쯤 누워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예전에 탑승해 봤던 쟈디렌은 탑승할 때 머리통이 뒤쪽으로 젖혀졌었다. 케이론의 머리통도 그런 식으로 열린다고 가정하면, 저런 자세로는 머리가 뒤로 젖혀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부축해서 저 큰 쇳덩이를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케이론, 일어설 수 있어? 아니면 그 자세로 머리를 열어줄 수 있어?”

그 말에 케이론은 천천히 양손을 아래로 뻗어 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상체를 앞으로 일으켰다. 그리고는 머리통을 뒤로 젖혀 탑승석을 드러냈다.

라이는 희망과 기대감에 차 조종석에 올라탔다. 쟈디렌보다 훨씬 더 고성능인 타이탄이라 그런지 탑승석도 많이 다르다. 이런 부분에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던 라이로서는 쟈디렌의 조정석과 뭐가 다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라이가 탑승하자 머리가 제자리로 돌아가며 탑승석을 완벽한 밀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쟈디

렌에 탑승했을 때처럼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타이탄과의 교감이라고 라이놀이 말해주었었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이긴 했지만, 타이탄의 눈을 통해서 보니 흐릿하긴 해도 약간은 구분할 수가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겠어.”

라이는 라이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그때 타이탄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었다면, 뜻하지 않은 타이탄이 생겼다고 해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몰랐을 테니 말이다. 

만약 여기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조원들, 특히 조장에게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조원들은 아무도 가지지 못한 타이탄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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