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가 조정석에 앉아 마나를 본격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케이론은 라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첫 주인보다 못한 인물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라이가 공급하는 마나는 아주 순수해서 전 주인보다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케이론은 그에 대한 의문을 라이에게 제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이론도 이제 겨우 두 번째 주인을 맞이했을 뿐이었기에 대부분의 주인들이 라이 정도의 등급인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자, 가자!”
외침과 동시에, 라이는 자신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타이탄이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들인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검을 복구하기 위해 마나를 흡수한 것이었다.
케이론은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쪽으로 움직이려던 라이는 마음을 바꿔 케이론의 몸을 빙글 돌려 앞쪽으로 걸어가게 했다. 바닥이 울퉁불퉁 한데다, 어둠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주위에 솟아있는 돌기들은 아주 단단해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
렌에 탑승했을 때처럼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타이탄과의 교감이라고 라이놀이 말해주었었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이긴 했지만, 타이탄의 눈을 통해서 보니 흐릿하긴 해도 약간은 구분할 수가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겠어.”
라이는 라이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그때 타이탄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었다면, 뜻하지 않은 타이탄이 생겼다고 해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몰랐을 테니 말이다.
만약 여기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조원들, 특히 조장에게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조원들은 아무도 가지지 못한 타이탄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다.
라이가 조정석에 앉아 마나를 본격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케이론은 라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첫 주인보다 못한 인물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라이가 공급하는 마나는 아주 순수해서 전 주인보다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케이론은 그에 대한 의문을 라이에게 제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이론도 이제 겨우 두 번째 주인을 맞이했을 뿐이었기에 대부분의 주인들이 라이 정도의 등급인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자, 가자!”
외침과 동시에, 라이는 자신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타이탄이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들인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검을 복구하기 위해 마나를 흡수한 것이었다.
케이론은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쪽으로 움직이려던 라이는 마음을 바꿔 케이론의 몸을 빙글 돌려 앞쪽으로 걸어가게 했다. 바닥이 울퉁불퉁 한데다, 어둠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주위에 솟아있는 돌기들은 아주 단단해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기
에 코를 움켜잡으면서도 혹시 뭔가 유용한 게 없나 시체의 몸을 뒤져봤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라이처럼 필요한 물품을 배낭에 넣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낙타나 말 같은 것에 싣고 이동하던 중 타이탄에 탑승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가지고 있는 짐이 없을 리가 없다.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와 시체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 그리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모를 짤막한 금속성 막대 하나, 시체 품속에서 꽤 비싸 보이는 단검 한 자루를 얻을 수 있었다.
반지나 막대 표면에는 상당히 복잡한 주문이 빽빽이 음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도구인 듯싶었다.
문제는 사막민족 복장 안쪽에 입고 있는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가죽갑옷이었다. 시체의 옷까지 벗겨 입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의 갑옷은 이미 샌드 웜의 이빨에 씹혀 너덜너덜한 상태였고, 마법진이 깨졌는지 마법도구로서의 기능이 멈춰버린지 오래다.
찝찝한 마음이 들지라도 시체의 가죽갑옷으로 갈아입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코를 찌르는 악취를 참아가며 간신히 가죽갑옷을 벗기다 보니 나중에는 후각이 마비되어 악취가 나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휴우, 겨우 벗겼네!”
가죽갑옷의 원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라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샌드 웜에게서 탈출하는 도중, 또 어떤 위험한 상황을 겪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쓸만해 보이는 가죽갑옷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벗겨낸 가죽갑옷에는 시체에서 흘러나온 액체와 오물이 잔뜩 묻어있었고, 지독한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이는 자신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새로 얻은 가죽갑옷으로 갈아입었다. 만약 탈출에 성공한다면, 그때 세척을 하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작 필요한 식량이나 물을 단 한 방울도 얻지 못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
케이론이 반응해주길 기대했기에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다 보니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이 생겼다.
라이놀 조장은 타이탄이 최강의 병기라고 했었다. 타이탄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껍고 튼튼한 철판들로 보호되는 조종석에 앉아 있으니 든든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이 타이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
라이는 타이탄을 움직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힘껏 휘둘렀다. 목표는 바닥에 돌출되어 있는 거대한 뼈들 중 하나.
캉!
검날이 깨질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지만, 번쩍하고 불꽃이 튄 것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검술을 써서 공격한 것보다도 훨씬 공격력이 약한 것처럼 느껴졌다.
“에게? 이게 뭐야?!”
손상됐던 검도, 그리고 웜의 뼈대도 곧바로 복구되어 버렸기에 방금 전 자신이 뭔가 하기는 했던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타이탄의 조정을 잘못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일까?
고심하던 라이는 타이탄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검을 쓰는 방법이 틀렸나? 생각보다 너무 위력이 약한 거 같은데…….”
『아니다, 전의 주인도 그렇게 했었다.』
“네 전 주인도 너를 활용하는 연습을 많이 했겠지? 어떤 연습이었어?”
『타이탄 간의 대전연습을 주로 했었다.』
“내게 보여줄 수 있어?”
라이의 부탁에 케이론은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왼쪽 방패를 머리 앞에 바짝 올려 방어를
하는 한편, 오른손에 든 검으로 공격 자세를 잡는다.
『이렇게 방패를 올려 상대의 공격을 막으면서, 오른손의 검으로 공격한다. 바닥이 고르지 못해 자세를 잡기 힘들지만, 이런 방식으로 검을 휘둘러 공격했었다.』
그러면서 케이론은 적을 공격하는 방식을 몇 가지인가 보여줬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너와 나는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어. 이를테면 네 시각을 통해서 이렇듯 어두운 밖을 볼 수 있듯이, 너 또한 내 시각을 공유한다고 말이야.”
『정확하다.』
“그 정신적 공유는 계속 이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자신의 타이탄을 평상시에는 공간 저편에 들어가게 했다가 필요할 때만 밖으로 꺼낼 수 있다던데?”
『그렇다.』
“그렇다면 공간 저편으로 간 이후에도 나하고 연결되어 있는 거지? 내 말은,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네가 인지할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불렀을 때 응답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네.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네. 그렇다면 너는 전 주인이 너와 함께하지 않을 때, 뭘 했는지도 잘 알고 있겠네?”
『전 주인의 일상은 아주 단조로웠다. 매일 똑같은 일들을 반복했었지.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샤이하드라는 신에게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때때로 동료들과 검술대련을 하기도 했고.』
“전혀 도움이 안 돼…….”
너무 뜬구름 잡는 듯한 설명이었기에 내심 실망하던 라이는 혹시나 싶어 케이론에게 다시 물었다.
“너를 만든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알아?”
『나를 만든 나라?』
“네 주인이 살았던 나라말이야.”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나라라는 게 뭔가?』
“나라! 국가, 몰라?”
『모른다.』
“이거 나보다도 더 무식한 녀석일세.”
타이탄이란 마법 생명체에 있어 모국(母國)이라는 개념은 물론,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살아왔다면 전 주인들에게 뭐라도 들은 게 있을 게 아닌가.
혹시 생각보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나? 아니면 주인들과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과묵한 타입인가?
“지금까지 주인은 몇 명이나 섬겼어?”
『섬긴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너하고 계약을 맺은 사람 숫자 말이야.”
『네가 두 번째 계약자다.』
케이론은 어휘력도 부족한 데다 상식 또한 상당히 부족했다. 자신 외에 주인이 한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대답에 라이는 케이론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타이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 만들어진 지는…, 아니 태어난 지는 얼마나 됐지?”
『모른다.』
좀 더 얘기를 나눠보니 타이탄은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마법 생명체에게 시간이라는 건 무의미한 개념이리라.
“아, 정말……. 너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많은 걸 가르쳐야겠군.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내가 속한 나라는 마도왕국이라고 불리는 알카사스 왕국이야. 듣기로는 제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데. 그런데도 스스로 왕국이라고 부르는 건, 무역을 하는 상대 나라에 조금이라도 약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하더군. 코린트나 크루마처럼 강대국의 악평이 자자해서는 무역을 하기가 힘드니까 말이야.”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모르는 말이 너무 많다.』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해줄게. 지금은 그저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
지금 자신의 말 상대라고는 오직 이 타이탄뿐이었다. 얘기를 해보니 워낙에 무식했기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안 좋은 현 상황을 잊어버려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좋았다.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보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잡아먹힌 이후로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게 분명하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는 타이탄의 눈을 통해 보는 게 약간 좋긴 했지만, 그래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다.
라이는 케이론에게 머리를 열어달라고 한 다음, 마도구의 불빛을 이용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촛불보다 작은 불빛이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샌드 웜의 몸속 움직임을 장시간 관찰하고 있다 보니, 그 움직임에 규칙적인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둘투둘 솟아올라 있는 샌드 웜의 뼈대들은 마치 시계추처럼 제자리에서 앞뒤로만 움직인다. 그리고 솟아올라 있는 뼈대들 간의 간격이 규칙적으로 줄어들었다가 늘었다가 한다. 샌드 웜의 제일 뒷부분에서 보고 있자니 그 움직임의 파형이 몸 전체에 걸쳐 리드미컬하게 진행된다. 간격이 줄어들었다가 늘었다가 하는 게 저 앞쪽에서부터 시작해서 뒤쪽으로 빠른 속도로 물결친다.
그런 단조로운 움직임을 계속 보고 있자니 졸음이 슬슬 쏟아진다. 하지만 잠들면 안 된다. 지금 샌드 웜은 동료들을 먹잇감으로 쫓아가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자신의 생각이 최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라이는 그때 외에는 이곳을 탈출할 기회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탈출은 항문으로
라이는 타이탄을 이끌고 샌드 웜의 가장 뒤쪽에 도착했다. 샌드 웜의 장갑판들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한곳에 작은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그 구멍이 항문일 가능성이 컸다.
“찾았다!”
하지만 항문을 찾은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항문을 뚫고 밖으로 나갔을 때 깊은 모래 속이라면 그대로 죽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