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3화 (923/930)

“어쨌거나 탈출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도달했어. 그런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라이는 조원들 중에서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신이 가장 먼저 당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당한 것을 본 조원들이 분명 이 괴물을 잡으려고 할 때 탈출하는 게 가장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젠장, 하지만 이놈이 그냥 모래 속에 처박혀 있다면 내게 탈출할 기회는 아예 안 온다는 얘기잖아.”

그래도 기대를 걸어볼 만한 건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한 조장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뿐이었다.

만약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샌드 웜이 또 다른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서 모래 위로 올라왔을 때뿐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뭔가 변화가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샌드 웜의 몸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울퉁불퉁 솟아있는 돌기들이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는 거야 변함없었지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확 기울어지는 게 느껴진 것이다. 분명 놈이 급히 방향을 꺾은 것이다.

라이는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기회가 생각보다 좀 더 빨리 찾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샌드 웜이 모래 속을 움직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하다.

물고기가 물을 삼켜 옆의 아가미를 통해 내뱉듯, 앞쪽의 모래를 입으로 삼켜 옆쪽으로 내뿜어 앞쪽에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 속으로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장갑판 같은 비늘들을 움직여 앞으로 나가기에 속도가 빠를 수가 없다.

지면 위로 올라간다면 상당히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긴 했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언데드가 된 상태에서도 샌드 웜은 본능대로 모래 속으로만 이동하고 있었다.

조장과 부조장이 샌드 웜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 부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그때 동료들이 도망친 것도 모르고 검의 세계에 빠져있던 라이가 마지막으로 놈의 뱃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고.

라이까지 잡아먹은 후, 샌드 웜은 또 다른 먹잇감을 물색하며 움직였지만, 이미 먹음직한 먹잇감들은 모두 전력으로 도망쳐 버린 후였다. 기사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탓에 뒤쪽으로 처져있는 용병들이나 사냥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말에 탄 용병들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식량이나 물 등을 싣고 있는 마차들은 속도가 느려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는 수송부대의 속도조차 샌드 웜이 이동하는 속도보다는 빠르다.

하지만 샌드 웜은 언데드였기에 며칠이고 간에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데 반해 마차부대는 그렇지가 못하다. 지금은 언데드들을 피해서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에는 가장 뒤에 처진 사람들부터 하나하나 샌드 웜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수송부대를 노리고 전속력으로 이동하고 있던 샌드 웜의 감각에 더욱 먹음직한 새로운 먹잇감이 포착되었다. 샌드 웜이 언데드로 다시 태어난 이래 이렇게까지 강한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먹잇감은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샌드 웜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샌드 웜의 촉각에 걸린 사람은 다름 아닌 브로마네스의 명령을 받고 그 뒤를 따르며 은밀히 호위하고 있던 올란도였다.

다른 언데드들은 샌드 웜만큼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도망치는 용병들의 뒤를 쫓아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샌드 웜은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브로마네스의 뒤를 쫓아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올란도를 포착하고는 그의 앞쪽으로 질러가 기습을 하려는 것이다.

링카 성에 도착한 올란도는 자신의 주인인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과 만날 수 있었다.

밤에 몰래 찾아온 드래곤은 자신이 현재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용병대가 베이라 성을 기습하기 위해 출동할 것임을 알려줬다.

올란도에게 주어진 임무는 먼 거리에서 주인 뒤를 따르며 보호하다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그때 나와서 도와달라는 것이다.

덧붙여 주의할 점도 전달되었다. 용병단 내에 마법사가 몇 명 있으니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급적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비밀리에 돕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해서 도와달라는 명령이었다.

올란도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임무였다. 아무리 유희 중이라고는 하지만 천하에 드래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하라니 하는 수밖에.

“나에게 위급 시 도와달라는 말을 한 거 보면,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그 뒤로 보여준 드래곤의 행태는 아무리 봐도 조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골드 드래곤임을 과시라도 하듯 눈에 확 띄는 화려한 긴 금발. 몬스터가 나타나면 앞장서서 목을 베며 실력 과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저러면

서 왜 자신에게 은밀히 도와달라고 한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편히 뒹굴뒹굴 놀고 있는 게 배가 아파 사막에서 고생이나 좀 하라고 부른 건가?”

브로마네스가 그를 부른 건 이곳 사막지대가 실버 드래곤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올란도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별 탈 없이 흘러가는 듯하던 주인 놈의 유희가 갑자기 이상하게 꼬인 건 수많은 언데드의 출현 이후부터였다.

작은 토성에 언데드 떼가 득실거리더니, 이제는 거대한 언데드 전갈까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언데드 거대전갈을 어떻게 하지 못해 쩔쩔매는 걸 보고 올란도는 이제 자신이 나설 때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곧이어 알카사스의 정규 기사들이 나타나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이 용병단에 합류하자 올란도는 쌍방간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험에 처했을 때 빠르게 돕기는 힘들어지겠지만,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이 가세했는데 말이다.

물론 제대로 된 기사분대는 아니고 정찰조이기는 했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할 듯 보였다. 이제 며칠만 더 가면 링카 성이었으니까.

“젠장, 이 지긋지긋한 임무도 이제 다 끝나가는군.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임무였어.”

물을 구하기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건조식량만 씹으며 은밀히 따라다니는 게 더욱 큰 고역이었다.

자신의 주인은 은밀히 뒤를 쫓으라는 주문을 내렸다. 더구나 용병단에는 마법사들까지 있다. 그 때문에 올란도는 감히 불을 피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지금까지 뒤따라온 것이다.

이 모든 게 숨을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삭막한 사막 지역이다 보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기사단이 합류했기에 한숨 놨더니, 최악의 사태는 바로 그날 밤에 벌어졌다.

설마하니 저렇게 엄청난 언데드 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용병단을 기습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섣불리 뛰어나가지 않고 일단 지켜만 보았다. 아무리 언데드 떼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문제 될 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데드 떼를 전멸시키는 것이라면 몰라도, 용병단의 후퇴를 엄호하며 함께 퇴각하는 정도라면 기사들만의 힘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걸 노골적으로 즐기는 자신의 주인도 분명 한몫 끼어 도울 테고 말이다.

올란도는 용병단이 불빛을 밝히며 사막을 질주하는 걸 보고는 정상적인 후퇴라고 판단했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용병단과 그와의 사이에는 언데드 떼가 위치하고 있어 은밀히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올란도는 용병단과의 거리를 좀 더 멀리 벌렸다. 그래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해치워도, 그래듀에이트나 마법사에게 들키지 않을 테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샌드 웜이 나타나 용병단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젠장, 링카 성에 도착하면 시원한 맥주부터 마실 거야. 지하실에서 갓 꺼낸 차가운 맥주로 꺼칠해진 목구멍을 깔끔하게 씻어내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올란도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강렬한 공포심을 느꼈다. 뭔가 위험한 존재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올란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지체하지 않고 낙타 등에서 벌떡 일어나 힘껏 위로 도약했다.

그 순간 자신이 타고 있던 낙타 주위로 뭔가 둥근 벽 같은 것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게 보였다. 자신의 위기 감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헉! 저게 뭐지?”

솟아오르며 낙타를 집어삼켰던 벽의 윗면이 빠르게 닫히는 것을 보고서야 올란도는 그게 샌드 웜,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샌드 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막에 샌드 웜이라는 초대형 몬스터가 서식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클 줄은 몰랐다.

샌드 웜의 기습공격을 간신히 회피한 올란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싸울까? 아니면 굳이 싸울 필요 없이 도망칠까.

저 덩치라면 속도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을 테니 뒤쫓아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먹잇감을 놓친 샌드 웜이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아마 올란도를 놓치게 되면 그다음은 이동속도가 느린 용병단의 뒤를 쫓아갈 가능성이 가장 컸다.

“어쩔 수 없지. 저놈이 만약 용병단을 따라가 분탕질을 치게 되면 그 망할 놈의 도마뱀이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아.”

용병단원들 몇 명 정도 잡아먹히는 거야 자신이 신경 쓸 일도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게 망할 놈의 드래곤의 신경을 거슬렸을 때의 후폭풍이 두려운 것이다.

얼마 전에 자신을 뒤따르며 은밀히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별 헛소리를 다 한다며 내심 비웃었었다. 드래곤이 뭐 무서울 게 있어서 자신을 호위하라고 명령한단 말인가.

하지만 초대형 샌드 웜을 직접 만나보니 비웃었던 예전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저런 거대 몬스터를 죽이려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만 할 테니까.

올란도는 멀리 도망치는 용병단 쪽을 힐끗 바라봤다. 자신과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때마침 밤이었다. 더군다나 용병단은 수많은 언데드 떼를 피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타이탄을 꺼낸다 해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이 녀석을 다시 불러오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는데…….”

올란도는 일단 전속력으로 달려 샌드 웜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 타이탄이 공간을 열고 나오는 데 약간이나마 시간이 필요했고, 자신이 탑승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샌드 웜의 공격을 받는다면 답이 없는 것이다.

타이탄을 불러내 간신히 탑승하는 데까지 성공한 올란도는 급히 타이탄의 검부터 뽑아 들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며,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저런 괴물은 타이탄 없이 상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라미루스.”

『…….』

너무 오랫동안 불러내지 않아서 그런지 삐져버린 모양이다.

대답도 않고 있는 라미루스를 향해 올란도는 능청스레 말했다.

“오랜만에 손 한번 같이 맞춰 보자고. 너를 불러낼 수밖에 없는 손색없는 상대니까.”

✻        ✻        ✻

라이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잠을 쫓아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타이탄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그냥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그냥 잠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케이론, 네 전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어?”

『잘 모르겠다. 마나의 품질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성격은 어땠어?”

『성격이라는 게 뭐냐?』

케이론의 되물음에 라이는 타이탄과 자신의 생각의 벽이 무지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품성? 뭐, 그런 거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 잘해준다든지 하는 거.”

다른 사람이라고 한 말을 케이론은 다른 타이탄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가 주인의 의식과 연결되어 주인이 하는 일을 옆에서 구경하는 건 가능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주인이 뭘 하는지 알 수

는 없었다. 그가 주인과 제대로 소통한 것은 다른 타이탄과의 전투 때뿐이었다.

『다른 타이탄과의 모의전 실력이 썩 좋지는 못했었다. 나로서는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주인이 미숙하다는 게……. 너는 어떠냐?』

케이론의 질문에 라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은 그 미숙하다는 평가의 전 주인보다 훨씬 더한 생초보였으니까.

“그, 그러니까…,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

『……?』

더 이상 할 말도 없던 차에, 단조로운 움직임만 지속하던 샌드 웜의 움직임이 갑자기 급변했다. 리드미컬하게 간격이 늘었다 줄었다 하던 뼈대 전체가 급격히 간격을 줄인 것이다.

샌드 웜의 앞쪽 머리 부분이 뒤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고 느껴진 그 순간, 다닥다닥 붙었던 모든 뼈대들이 확 벌어지며 샌드 웜의 머리 부분이 위쪽으로 튕겨 나가듯 멀어진다. 보나 마나 뭔가를 공격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이야! 머리 닫아!”

그렇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뭔가를 공격했다는 건, 지금 샌드 웜의 머리 부분이 지상 위로 튀어 나가 있다는 소리였다. 시간이 없다. 공격이 끝나면 샌드 웜은 곧바로 지하로 파고 들어가게 된다. 그 전에 반드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머리가 제대로 닫히기도 전에 라이는 케이론에게 지시부터 내렸다.

“저기를 벌리고 나가야 해! 케이론, 힘 좀 써 봐. 할 수 있겠어? 빨리 움직여!”

항문 쪽 장갑판에 달려들어 손으로 힘껏 밀었다.

다행히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건 샌드 웜이 일부러 항문 쪽을 열어준 것이었다.

샌드 웜도 자신의 뱃속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들어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강한 생기를 뿜어대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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