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6화 (926/930)

라이놀의 보고서에 따르면 라이가 검술 전수에 매우 협조적이라고 되어 있었다. 고급검술의 유출이라니, 그런 특수성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잘못 짚었나?’

아무리 살펴봐도 수상쩍은 부분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샌드 웜의 입속에서 멀쩡히 살아 나왔다는 건 말이 되지를 않는다. 처음부터 그가 언데드 세력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의심하기에는 라이의 기록은 너무 깨끗했다.

그의 아버지는 크라레스의 귀족이고, 스승도 크라레스 사람이고, 검법도 크라레스의 것이라고 했다. 가문이 쫄딱 망한 후, 우연히 스승을 만나 둘이서만 산에 들어가 수련을 하다 갑자기 스승이 죽어버렸기에 하산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산적집단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우연히 찾아낸 정보부 쪽의 얘기로는 시민권이 없다 보니 시민권을 구하기 위해 산적집단에 포섭되어 잡일을 처리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보부 쪽에 포섭되어 콘도르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잘 짜인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얘기였다.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타국의 첩자라면 제법 그럴듯하게 날조를 하지, 이렇게까지 티가 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접한 놈들이 만든 타이탄

다음날, 사막에 나갔던 콘도르 기사단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추기라도 한 듯 라이도 링카 성에 도착했다.

링카 성으로 귀환하자마자 라이는 수석마법사의 호출을 받고, 그를 만나야만 했다.

심하게 악취가 풍기는 가죽갑옷만큼은 대장간에 수선을 맡기고 수석마법사에게 가려 했지만 전령역으로 온 마법사는 단호했다.

“수석마법사님께서는 사막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전령을 따라 수석마법사에게로 가자 그는 라이가 입고 있는 가죽갑옷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자국 기사단에서 지급해준 갑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국 기사단에서 지급해 주는 것도 상당한 품질의 마도구였지만, 현재 라이가 착용하고 있는 가죽갑옷은 그보다 훨씬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수석마법사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호오, 기사단 신입 주제에 꽤 괜찮은 가죽갑옷을 입고 있구만. 냄새는 좀 심하게 나지만…….”

라이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건 대장간에 수선을 맡기고, 수석마법사님을 만나러 오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수석마법사님께서 이 복장 그대로 오라 하셨다고 해서…….”

“그래,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지. 그나저나 일단 자네 그 갑옷부터 벗어서 내게 주게. 냄새가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구만.”

“예?”

혹시나 갑옷을 뺏기는 게 아닌가 해서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에게 수석마법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갑옷을 압수하려는 게 아니네. 마도구를 수리하는 건 대장간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마법사들이 하는 거지. 내가 깨끗하게 만들어서 돌려주도록 하겠네. 한 며칠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수석마법사의 생각이 행여 바뀌기라도 할까 라이는 급히 갑옷을 벗었다. 피와 온갖 오물이 잔뜩 묻어있는 갑옷을 계속 입고 있기에는 자신도 찝찝했었으니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최근 며칠 동안 귀관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규정상 어쩔 수 없이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하는데, 협조해 주겠나? 기사단에서 지급받은 거 외에는 모두 다 내 앞에 꺼내놓게.”

누구의 말이라고 감히 거절하겠는가. 라이는 재빨리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다 꺼내놨다.

시체를 뒤져 챙긴 물건들을 꺼내놓을 때는 찝찝한 마음이 좀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검사라도 한다면 바로 발각될 테니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곳에 끌려오지만 않았다면, 그런 물건들은 자신의 짐 속 깊숙이 숨긴 뒤 왔을 것이다.

“호오, 꽤나 묵직하군.”

묵직한 돈주머니를 열어본 수석마법사의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돈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건 모두 금화뿐이었다. 정찰조에 소속된 하급 기사가 지니고 있을 만한 액수가 아닌 것이다.

눈치를 보던 라이도 수석마법사가 돈주머니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그랬기에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 돈주머니는 원래 제께 아닙니다. 주, 주웠다고 해야 하나…….”

“뭐? 이렇게 많은 돈주머니를 주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사, 사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그 이유란 걸 한번 말해보게. 제대로 설명해야 될 걸세. 오해를 사기 싫다면 말일세.”

“절대 훔친 돈주머니는 아닙니다. 단지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돈주머니를 습득하기까지의 과정이 좀 복잡한데…….”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네. 정리가 되지 않아서 힘들다면 그냥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설명하면 되니까.”

결국 라이는 자신이 전투 중에 갑작스러운 샌드 웜의 습격으로 그 뱃속에 들어간 것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저 기절해 있다가 눈을 떠보니 샌드 웜의 뱃속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샌드 웜의 뱃속의 광경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동안 수석마법사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경청만 했다. 그만큼 라이가 겪은 상황은 마법사로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라이가 언데드 쪽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수석마법사는 더욱 귀를 기울여 라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혹시라도 얘기 도중에 뭔가 어긋나는 점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파괴된 타이탄의 조종석을 열어보니 거기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샌드 웜에게 삼켜질 때 지니고 있던 모든 보급품을 잃어버렸기에 혹여나 쓸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시체의 몸을 뒤졌습니다. 그때 찾아낸 게 바로 저 물건들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벗어드린 가죽갑옷도 그 시체가 입고 있던 걸 벗겨서 입고 있던 거죠.”

말을 듣던 수석마법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이기에 타이탄이라는 게 얼마나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마법병기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낱 언데드 따위가, 아무리 그게 덩치가 좀 크다고 하지만 타이탄을 파괴할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타이탄의 상대는 타이탄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의 믿음을 저버릴 만한 진술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이가 내놓은 소지품을 보자 그 말을 무조건 불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마법반지와 짤막한 막대기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거기에 빽빽이 

새겨져 있는 문자였는데 그건 룬 문자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건 신성문자였다. 성기사가 사용하는 신성도구(神聖道具 : 줄여서 ‘신구’라고도 함)였던 것이다. 마도구가 마나를 필요로 한다면, 이건 신성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쓸 수도 없는 물건이다.

물론 진짜처럼 보이는 허접한 짝퉁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겨진 신성문자가 아주 정밀한 것으로 봤을 때 진품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라이가 가진 소지품을 얻기까지의 설명이 모두 끝났음에도, 수석마법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그 증언을 하나씩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믿기 힘든 내용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기에는 그 내용이나 묘사가 너무나도 충실하고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언데드 샌드 웜의 뱃속 광경이라든지, 그 속에 들어있던 타이탄들의 모습, 그리고 그중 하나와 계약한 뒤 샌드 웜의 항문을 열고 탈출한 것까지.

수석마법사가 오랜 연륜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가 언제 언데드 샌드 웜의 뱃속에 들어가 보았겠는가.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당연히 라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좀 전에 그곳에서 타이탄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었지?”

“예.”

“내게 그 타이탄을 보여줄 수 있겠나?”

수석마법사의 제안에 라이는 흔쾌히 답했다.

“어렵지는 않은데 여기는 너무 좁아서 안 될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가시죠.”

수석마법사는 라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기사 한 명을 불렀다. 그 기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수석마법사를 보호할 오너급의 기사였다.

사실, 수석마법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래듀에이트가 근접에서 갑작스럽게 기습을 해오면 당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타이탄을 꺼내 보게나.”

“예, 케이론, 나와 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육중한 타이탄이 공간을 가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얘기가 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타국의 첩자였다면 이렇게 순순히 타이탄을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일개 첩자에게 타이탄을 지급한다? 타이탄이 가지는 엄청난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건 아무리 부유한 알카사스 왕국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얘기였다. 

수석마법사는 일단 의심은 접어두고 공간을 가르며 나온 타이탄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모습이나 팔다리의 길이, 그리고 어깨까지의 높이까지……. 대체적으로 표준 수치인 것 같았지만 왠지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버리기 힘들었다.

“저도 처음 보는 형태의 타이탄입니다. 흠, 가슴에 그려진 이 문장은 과연 어느 나라의 타이탄일까요?”

따라온 기사의 질문에 수석마법사는 타이탄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기존 형태의 타이탄이 아냐. 외관이 너무 이상해. 이걸 보게. 끝마무리가 너무 대충이잖나. 본국의 수출용 저가 타이탄도 이 정도로 허접하게 만들지는 않아.”

“이 타이탄을 만든 국가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요?”

“그보다는 제철 기술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내 예상대로라면 이 타이탄은 아마 아르곤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 말에 깜짝 놀란 기사는 다급히 되물었다.

“신성 아르곤 제국이라고요? 거긴 타이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엑스시온을 제작할 능력이 안 되는 거지, 타이탄을 못 만드는 건 아니야. 쇠를 다룰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몸뚱이는 만들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소량이긴 하지만 엑스시온을 수입해 자체적으로 실험용 타이탄을 제작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 아무래도 그쪽이 완성품을 수입하는 것

보다는 저렴할뿐더러, 그 과정에서 타이탄 제작 기술 또한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

수석마법사의 대답에도 기사는 여전히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의 타이탄이 신성 아르곤 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관이 거칠게 처리된 몇몇 부분만 보고 아르곤 제국에서 만든 거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 무리가 아닐까요?”

“후후, 사실 타이탄만 보고 이렇게 단정 지은 건 아닐세. 내가 그렇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건 이 안에서 발견되었다던 오러 소드 때문이야.”

“성기사들이 쓴다는 그 오러 소드 말씀이십니까?”

오러 소드는 신성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짤막한 막대 형태의 신성도구였는데, 막대에 신성력을 부여하면 막대 끝에서 빛으로 된 검날이 튀어나온다고 한다. 그 위력은 기사들의 오러 블레이드급이라고 했다. 따라서 오러 소드를 사용하는 것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실력의 그래듀에이트는 모두 참살이 가능할 정도의 사기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래. 반지나 목걸이, 팔찌 같은 형태의 신구는 여러 교단에서 만들고 있네만, 오러 소드를 생산할 수 있는 건 오직 아르곤 제국뿐이거든.”

말을 마친 수석마법사는 라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조종석을 살펴봐도 괜찮겠나?”

“물론이죠, 수석마법사님.”

라이는 타이탄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케이론, 머리를 열어줘. 여기 수석마법사님이 보실 수 있도록 말이야.”

그 순간, 철컹하며 뒤로 젖혀지는 타이탄의 두부. 그리고 이중 장갑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는 조종석이 드러났다.

조종석을 내려다보던 수석마법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타이탄 생산에 관여해 본 적은 없었지만, 기사단에 오랜 세월 근무해오며 수많은 타이탄을 보았고, 그 방면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지식을 쌓

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늘 접한 타이탄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타이탄과도 조종석의 형태가 달랐다.

좌석 아래쪽에 엑스시온이 하나 장착해 있는 방식이 아닌, 아래쪽의 좌우에 각 1개씩이 V자형으로 배치해서 장착되어 있었다. 즉, 이 타이탄에는 엑스시온이 2개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허어, 아르곤 놈들, 아주 재미있는 짓을 해놨군. 엑스시온을 두 개나 넣을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이렇게 해도 타이탄이 동작할 수나 있는 거였나?”

수석마법사의 중얼거림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오너급 기사가 타이탄의 어깨 위쪽으로 따라 올라왔다. 그도 신기한 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엑스시온을 둘이나 넣은 타이탄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수석마법사님.”

“아무래도 마르코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어. 이런 제작 기법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말이야.”

한눈에 봐도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출력 0.8짜리 표준형 엑스시온이었다. 요즘은 이런 저급형은 수출용으로도 거의 제작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성능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저급 엑스시온 두 개를 붙여 정규급 이상의 출력을 낼 수 있는 타이탄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아마도 고출력 엑스시온을 구입할 수 없었기에 찾아낸 그들 나름대로의 해법인지도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