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8화 (928/930)

“맥주 마시러 가자. 시원한 맥주가 정말 마시고 싶었어.”

하지만 월터는 그런 다이아나를 제지했다.

“아니, 일단은 링카 성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월터는 살짝 턱짓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를 봐봐.”

성문 쪽이 잘 보이는 전망탑 위에 서 있는 세 사람. 마법사 둘과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 한 명.

월터는 제2근위대라 마법사의 탐지 마법에 대한 대책이 다 되어 있겠지만, 그건 다이아나 일행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다이아나는 월터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저 사람이 왜? 이런 중요한 길목인데, 마법사들이 감시하고 있는 건 당연하잖아.”

“마법사가 아니라 그 뒤의 기사를 말하는 거야.”

투구도 쓰지 않았고, 간단하게 칼 한 자루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인 병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보다 훨씬 방어력이 뒤떨어져 보이는 가죽갑옷만 입고 있다.

마법사들이 인식저해 마법을 펼쳐놔서 그런지 마나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일반적인 호위병 정도로만 보였던 것이다.

“뭐, 기사일 수도 있지. 여기에는 팔콘 분견대가 주둔하고 있잖아.”

“갑옷을 잘 봐봐. 저 갑옷에 그려진 문장은 팔콘이 아니라 콘도르야.”

다이아나는 눈을 실쭉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 작은 걸 잘도 알아봤네.”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이 정도야 보통이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이아나는 급히 말했다.

“콘도르 기사가 저 한 사람뿐일 가능성은 없으니까 빨리 링카 성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코린트 제국의 제2근위대원인 월터를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만, 다이아나라면 얘기가 다르다. 치레아 대공가의 영애가 오우거만큼이나 몸집이 우람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정규기사단 소속이라면 무도회 따위를 통해 멀리서 다이아나를 훔쳐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럼 바로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자.”

“맞아. 공간이동 끝내고 거기서 한잔하기로 하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        ✻        ✻

언데드의 공격권을 벗어난 후에도 홉킨스는 부하들을 닦달하여 밤새 달린 것은 물론이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쉬지 않고 도망쳤다.

죽을힘을 다해 언데드의 공격권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밤새 지쳐버린 말은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했다. 억지로 말을 끌며 강행군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게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언데드 떼가 뒤따라와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파17이 지정한 곳을 언데드 떼가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탓에 리오 프라이스는 첫 모험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죽을 고생을 해야만 했다.

드디어 저 멀리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라 있는 링카 성의 첨탑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눈물을 줄줄 흘려야 했다. 사막으로 가기 전에 통과했었던 링카 성을 멀리서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안심이 될 수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드디어 끝이 났구나. 정말 힘든, 힘든 여행이었어.”

환희에 가득 차 있는 프라이스의 모습을 옆에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말했다.

“처음부터 빡센 모험을 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고 말았네요, 스승님, 하지만 안심하십쇼. 이런 고난도의 모험은 평생에 한 번 얻어걸리기도 힘듭니다. 어떠십니까? 다음에 다시 한 번……?”

프라이스가 꿈꿔왔던 건 이런 현실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멋진 마법과 웅장한 타이탄의 전투, 그리고 신화에 나올법한 멋진 몬스터들. 특히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드래곤을 먼발치에서라도 꼭 한 번 보고 싶었었다.

프라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첫 모험에 그 모든 것들이 등장했었다. 드래곤을 비롯한 평생 가도 한 번 만나기 힘든 각종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타이탄들까지.

아르티어스 말마따나 평생에 한 번 얻어걸리기도 힘든 모험을 하고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아니, 배려는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네. 늙어버린 내 몸으로는 너무나도 과한 꿈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니까. 딴 건 몰라도 도저히 내 체력이…….”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늙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정중한 목소리에 말의 내용은 분명 배려가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프라이스는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웠다.

“아니야, 이젠 그만하고 싶어. 그렇게 평생을 간절히 원했던 모험이, 이제는 꿈에 나올까 두려운 것이 된 것만 해도 나로서는 충분해.”

“뭐, 그만둘 때 그만두시더라도 제 제안을 한번 생각은 해보십쇼. 이번 사막 행은 전혀 예정에 없었던 것이었기에 착오가 있었습니다만, 지금껏 제가 해오던 고블린 사냥이라면 편안하게 모험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더러운 사막은 뒤로 하고 저와 함께 고블린 사냥이나 즐기시는 건 어떻습니까?”

“고블린이라……?”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없었지만, 고블린이라면 아주 손쉬운 사냥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험담에서도 초반에만 살짝 등장하고 끝날 정도로 형편없이 약한 몬스터가 아니었던가. 위험도 적고 손맛도 짭짤하게 볼 수 있는 고블린 사냥이라면……?

하마터면 아르티어스의 꾐에 넘어갈 뻔했지만, 프라이스는 곧 그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그는 모험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마법진에서 기력을 쪽쪽 빨린 게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은 덕분이다.

“제안은 고맙네만 당분간은 집에서 푹 쉬고 싶군.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아.”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씨익 미소 지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쇼. 또다시…, 아니 이번에는 안락하고 즐거운 모험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릴 테니까요. 자, 어서 가시죠.”

“아닐세. 자네도 바쁜 몸이지 않은가. 집으로 가는 것쯤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네.”

프라이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망할 놈과 헤어지고 싶었기에 그의 배웅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프라이스의 옆으로 다가서더니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쯧, 명색이 스승님이신데 제가 배웅은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서야 프라이스는 뒤쪽에 아르티어스의 호위병들이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자 놈이 말조심을 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아닙니다, 스승님. 자, 가시죠. 용병단에 소속된 몸이라 멀리는 어렵지만, 제자 된 몸으로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는 배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티어스가 호위병들과 함께 프라이스를 배웅하러 가고 있을 때,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으로 변신한 뒤 올란도와 만나고 있었다.

올란도의 얘기를 모두 들은 후에야 브로마네스는 그때 초대형 샌드 웜이 모래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목걸이로 정령과의 소통을 차단하지만 않았다면 정령들이 바로 알려줬었겠

지만, 지금은 자신이 직접 마법을 써서 주위를 탐색해야만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그런 위험한 존재가 자신의 주위를 배회했음에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걸 다른 놈들도 알고 있을까?”

올란도는 슬쩍 브로마네스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마 모르고 있지 않을까요? 그놈이 주인님이 계신 쪽으로 가다, 저를 포착했는지 방향을 바꿔 공격해온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때의 상황을 잠시 떠올려보던 브로마네스는 지금껏 잊고 있었던 뭔가가 생각났다. 그건 당시 지원을 왔던 기사단원들이 언데드 무리의 습격을 당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그때 기사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가 없으니까. 전원 그래듀에이트였던 만큼 설마 모두 샌드 웜에 잡아먹혔을 리는 없을 거야. 분명 몇 놈인가는 도주해서 그 사실을 상부에 알

렸겠지. 흠, 그렇다면 당분간은 널 은밀하게 호위로 쓸 일은 없겠군. 좋아, 이번에는 꽤 고생했으니 새로운 명령을 내릴 때까지 푹 쉬고 있도록 해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주인님.”

‘젠장, 당분간은 자유로군. 정말 힘든 임무였어.’

브로마네스와 헤어진 올란도는 곧장 술집을 향해 달려갔다. 시원한 맥주를 배터지게 마시려고.

전장의 향방을 바꿀 힘

“1차 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것 같습니다, 소장님.”

로므렌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건넨 보고서였지만, 그걸 읽고 있는 연구소장의 표정은 왠지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엄청난 돈과 시간을 퍼부은 만큼, 지금쯤은 뭔가 결과가 나와야만 했는데, 결국 로므렌이 해낸 것이다.

로므렌 덕분에 실험 결과가 나와 자신의 자리가 더욱 굳건해지기는 했지만, 연구소장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그가 원하던 결과물이 아니었으니까.

“생존율 향상을 위해서 혈청의 순도를 대폭 낮췄는데, 그 덕분인지 실험체의 혈액을 식물에 투여해도 마물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연구소장은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오크 키메라를 생산할 때도 혈청의 순도를 대폭 낮추면 괜찮을지 모른다는 얘기로군.”

로므렌은 은근히 연구소장의 눈치를 보며 급히 대답했다.

“제법 가능성이 크긴 합니다만, 그 방법은 예전에 제가 실험했을 때 실험체의 파워가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 때문에 포기했었습니다.”

그러자 연구소장은 인상을 한껏 찡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인간 키메라에도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날 게 아닌가?”

“아마 그럴 겁니다.”

주저하지 않고 튀어나오는 로므렌의 대답에 연구소장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흠, 그건 그냥 넘기긴 어려운 문제로군. 안 그래도 나약한 암컷 쪽의 생존율이 높은데, 문제해결을 위해 파워까지 하향시켜야 한다니…….”

잠시 뭔가 궁리하는 듯하던 소장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수컷 쪽의 생존율을 높일 방법은 찾아냈나?”

“예, 실험 결과 일전에 보고드렸던 가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방질이 높은 쪽의 생존율이 높다는 거 말입니다. 지방질이 높은 실험체에 혈청을 투입한 결과, 낮은 실험체보다 비약적인 생존율 향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키메라화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기에 초래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흐음…, 그건 좀 의외의 실험 결과로군. 살이 뒤룩뒤룩 찐 둔해 빠진 것들이 오히려 생존율이 높다니…….”

“예. 그렇기에 요즘 조건에 맞는 실험체를 구하기가 아주 힘들어졌습니다. 지방질이 높은 수컷 노예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니까요.”

음식을 잔뜩 처먹으면서도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야 살이 찐다. 물론 물만 마셔도 찌는 체질이 있긴 하지만 그건 예외적 경우고 대체적인 사람들은 그렇다.

연구소에서 실험에 필요한 실험체는 보통 전쟁포로나 노예를 사와 실험에 쓰인다. 전쟁포로는 활용도가 높기에 입찰 경쟁이 치열했고 노예의 경우, 살이 뒤룩뒤룩 찌도록 주인이 절대 내버려 두지를 않기에 수급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물론 비만인 노예들이 어쩌다 있기는 했지만 정쟁에서 패하거나 가문이 쫄딱 망해 경매에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생산한 개체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대충 100마리는 넘었나?”

“예, 소장님. 정확하게는 106마리입니다. 수컷이 35마리, 나머지는 암컷입니다.”

“그 정도 숫자면 어느 정도 실험체 확보가 된 셈이군. 앞으로는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말고, 정신제어 술식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확인에 집중하도록 하게.”

연구소장의 말에 로므렌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집단생활을 하는 몬스터의 경우, 아직까지 정신제어 술식이 깨진 적이 없었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몬스터처럼 인간에게도 정신제어 술식이 안정적일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네. 

명심하게. 만약 인간 키메라의 정신제어 술식이 깨지게 되면, 몬스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골치가 아파지게 될 거라는 걸 말이야. 트롤이나 오크와 같은 몬스터는 술식이 깨졌을 때 본능적으로 발광이라도 했지만, 인간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어. 어쩌면 눈치를 보느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만약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 정신제어 술식이 깨졌는지 확인할 수 있겠나?”

연구소장의 말을 듣고 난 후에야 로므렌은 자신의 실험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제어 술식이 정상 작동하는 한 키메라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즉,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정신제어 술식이 깨져버렸다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뒤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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