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11화 (11/489)

학생의 본분 (1)

기숙사에 돌아오니 저녁이었다.

식사할 생각도 안 들어 곧바로 씻고서 침실에 틀어박혔다.

베헤못은 새의 뼈가 조금 남은 그릇 옆에서 털을 고르고 있었다. 네보가 물과 밥을 챙겨준 모양이었다.

“제베디에겐 잘 깨지고 왔느냐. 오늘 저녁도 나쁘지 않았다만… 마땅한 와인도 없이 버섯 채운 메추리를 먹는 본묘의 신세가 처량했도다.”

‘그냥 고양이가 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군. 책 빙의를 해도 인간은 별로야.’

고양이 옆에 주저앉아 뜨끈하고 부드러운 몸을 꽉 껴안았다.

뱃살을 실컷 쭈물거렸더니 마음은 좀 풀렸는데, 베헤못이 캬악거리며 창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후우….’

이쪽 세계로 온 뒤 처음으로, 잠이 안 오는 밤이었다. 고작 오후 반나절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정리를 해 보자.’

클레이오는 이제껏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던 책상에 앉아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1. 이곳은 원고 안이다. 원고는 실시간으로 쓰이는 중이다.

2. 이 원고는 여덟 번 다시 쓴 후, 아홉 번째로 개정하고 있는 <최종고> 이다.

2-2. 같은 원고지를 긁어내고 덧씌워 쓴 바람에, 원본 원고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편집자 권한’을 조금만 잘못 써도 지워버린 이전의 내용이 뒤섞인다.

2-3. 현재로선 어떤 내용이 어떻게 뒤섞였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래, 편집자 권한이 그렇게 제대로 된 물건일 리 없었어. 처음은 운이 좋았던 거지. 스킬 실패할 때마다 이 난리가 난다면, 무서워서 어떻게 건드려. 나한테까지 후폭풍이 닥치는데.’

손등 위에서 옅은 존재감을 발하는 성흔을 내려다보며, 클레이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 역시도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확인해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스티븐 킹이 말했다. 창작은 사람의 일이지만 편집은 신의 일이라고.

그 말은 틀린 것 같다. 겪어보니 더 뼈저리게 알겠다. 이야기에서의 신은 저자라는 것을.

‘내가 너무 안이했어. 뭘 따져보고 자시고 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아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읽어본 원고와 <최종고>사이에서 큰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인물도, 사건 진행도 대동소이했다.

서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면, 주인공 주변에서 펼쳐질 역사적 사건들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서 같은 놈이야 전쟁터에서 영웅이 되는 게 좋겠지만, 난 후방에서 음주와 낮잠의 작은 행복을 지키는 게 좋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인물에게 저자가 이만한 재산과, 강대한 에테르 감응력을 쥐어주었을 리 없었겠지.

‘도대체 어떤 의도로 <최종고>의 클레이오를 설정한 걸까. 무슨 생각이죠, 저자 선생님?’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 언제든 신이 개인에게 응답하는 예가 있던가.

한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위의 항목 아래에한 줄을 더 적어 넣었다.

3. 저자는 원고에 생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현재까지는 ‘고유 스킬’ 사용 시 가부의 승인만이 가능하다.

그 뒤로는 선을 긋고 추가 항목을 적어 넣었다.

*‘□□□□의 팔림프세스트’

*‘□□□의 약속’

‘편집자 권한’이 불발된 후 떠올랐던 이름 ‘팔림프세스트’. ‘약속’의 수식어와 마찬가지로, ‘팔림프세스트’역시 온전한 수식어를 볼 수 없었다.

□□□□와 □□□.

‘차원과 차원을 이을 수 있는’ 반지.

‘이 세계를 쓰는’ 원고의 원본.

둘 다 저자와 관련이 있었으며, 이 이야기 안에 속한 아이템이 아닌 것 같았다.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도 가려진 부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서사 개입도가 낮아 약속의 기능이 전부 개방되지 않는다니, 내가 아직 충분히 얘기에 엮이지 않아 이름도 볼 수 없단 뜻이지?’

하지만 저자의 정체를 캐내겠다고, 서사에 더 깊이 개입하는 건 너무 위험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안다고 별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흘러가든 끝엔 아서가 왕이 되는 거 아냐?’

저자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긴 어렵다 해도, 클레이오 자신까지 엮어 넣으려 드는데 손 놓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진’은 단 한 번도 이 원고의 개정을 돕겠다고 한 적이 없다.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고, 소를 물가까지 끌어놔도 물을 안 마시면 수가 없는 것을….

‘아서와는 이제 통성명이나 한 사이야. 그자식이 날 의심하고 있긴 하지만… 난 주인공의 친구도 생사고락을 같이 할 동료도 충성을 맹세한 신하도 아니잖아. 이 세 포지션에만 안 걸리면 뒤지게 고생하는 루트론 가진 않을 거다.’

클레이오는 굳게 결심했다. 아서와는 절대 안 엮일 테다.

이전 생은 고생만 하다가 끝났다. 이후에 주어진 가외의 삶까지 열심히 살라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우연찮게 주어진 갑부집 무능한 막내아들의 삶을 포기하긴 싫었다.

‘그러기 위해선 또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역설이지만, 후.’

한 번 더 줄을 긋고, 노트 하단에 당장 해야 할 일을 적었다.

1. 당장 입대를 피한다.

2. 계좌의 출금정지를 푼다.

‘이거 두 개는 공부를 하면 해결 된다. 그럼 그 다음.’

3. 계좌 출금정지가 풀리면 전액 인출한다.

4. 학교를 이탈한다. 잡히지 않고 2달만 버티면 자동으로 제적된다.

추가: 아버지 용돈 외의 자금원을 마련할 것.

처음에야 천지분간 못했지만 사리에 밝은 네보와 지내며 물정을 좀 파악했다.

셋방은 어떻게 얻는지, 여행은 허가를 얻어야 가능한지 등을 알아봤다.

CCTV도 없는 세상에서, 사지 멀쩡한 젊은 남자가 제 한 몸 숨기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추가적으로 자금을 확보할 계획은 차근차근 세워 보지 뭐.’

그럭저럭 괜찮은 계획이라 자평하며, 클레이오는 새벽잠을 청했다.

***

괜찮은 계획은 개뿔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누운 클레이오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다른 학생들을 따라서 연습용 검 좀 휘둘렀다고, 팔은 부들대고 손바닥엔 물집이 잡혔다.

교과서에 나온 기본자세를 머리로 알기는 했다.

여학생들도 다 하는데 싶어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수업을 따라가다가 결국엔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몸은, 너무나도 개쓰레기야….’

‘검술기초’ 교과서는 이론적인 내용이기에 실기시험을 함께 치는 건지 몰랐다.

애초에, 검사와 마법사 지망은 2학년 때 반이 나뉘며 1학년 땐 통합교과를 배우는 것 역시 몰랐다.

비웃는 듯한 소곤거림과 킥킥거리는 웃음이 클레이오의 뒤통수에 꽂혔다.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쓰러진 클레이오에게로 교수가 다가왔다.

“자, 다들 뭘 쳐다보느냐. 1조와 2조는 각각 지난주에 알려 준 연결 동작과 3번 베기 자세를 연습하고 있거라. 조교는 2조를 봐 주도록.”

검술기초 과목의 로사 페히테 교수는 에테르 레벨이 8에 달하는 상급 검사로, 소드 마스터였다.

왕립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직에서 물러난 뒤, 오랜 세월을 교직에서 보내고 있는 노검사는 학생들을 유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클레이오의 체력이 그녀의 기초적인 지도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있단 거다.

“에이그, 클레이오 너는 검술기초를 수강하기 전에 기초체력을 먼저 보강해야 할 것 같다. 내일부터 매일 아침 학교 둘레를 두 바퀴씩 뛰도록 해라.”

제베디 교수만큼이나 키가 크고, 힘은 그보다 더 센 것 같은 로사가 클레이오를 가볍게 일으켜 앉혔다.

경갑 아래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로사는 여전히 탄탄한 체형이라, 얼굴을 안 보면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집으로 벌게진 클레이오의 손바닥을, 한쪽만 남은 눈으로 꼼꼼히 살피던 로사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수업에 들어올 의욕이 생긴 것은 환영한다만, 너는 이번 학기 안에 검을 잡는 건 무리다.”

“그럼 기말평가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클레이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로사는 안쓰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비록 왼쪽 눈은 안대에 가려 있지만 표정이 풍부해 마음을 알기 쉬웠다.

클레이오에겐 어쩐지 나이 많은 여성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검술기초과목 실기는 1조의 검사지망 학생과, 2조의 마법사지망 학생들을 다른 기준으로 평가한단다.”

확실히, 검술을 잘 모르는 클레이오의 눈에도 이시엘과 네보가 끼여 있는 1조는 움직임이 달라 보였다.

“네게는 다른 실기 과제를 내 주마. 기말고사 때까지 여기 연병장 네 바퀴를 5분 안에 주파할 수 있으면 30점을 주겠다. 그리고 필기시험에서 10점 이상을 받아 보렴. 그러면 유급하진 않을 게야.”

“감사합니다….”

“내 보니, 네 근골에는 문제가 없다. 시킨 대로 매일 학교 둘레를 두 바퀴 뛰다 보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란다.”

클레이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대중으로 보니 연병장 둘레는 250미터쯤 되는 듯싶다. 네 바퀴면 1000미터. 검술 수업에서 1000미터 달리기로 점수를 준다면 많이 봐 주는 것 같았다.

남은 수업시간동안엔 벤치에 앉아 조교가 갖다 준 물을 마시며 쉬었다.

교수의 관대한 처사를 받아도 클레이오의 구겨진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검술기초의 실기시험 배점은 80점, 필기시험 배점은 20점이었다. 1000미터를 뛰고, 필기 점수를 높게 받는다 해도 50점밖엔 안 된단 뜻이었다.

‘기초과목 총 4과목은 검술기초, 마법기초, 역사, 고전. 4과목 합하여 만점 총 400점. 종합 점수가 같으면 동석차로 취급한댔지.’

주말 동안 필기과목 교과서는 전부 한 번씩 읽어 봤다. 보면서 요약 정리하니, 생소하긴 해도 크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없었기에 안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검술 과목에서 최하점이 나올 게 확정됐으니 전략을 바꿔야 했다.

‘아버지’에게 큰소리까지 쳐 놓은 참이었다.

나머지 세 과목을 보통으로 해서는 안 된다. 잘 해야 한다.

‘뭔가 획기적인 공부 방법이 필요해.’

.

.

.

“학예의 영묘이신 못 선생님이시여, 모자란 제게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흥, 네 혓바닥엔 더 이상 안 놀아난다. 본묘는 이 학교 한 세기 동안의 커리큘럼을 모두 알지만 무료봉사 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찾아온 번지수는 맞았다.

학교에서 백 년 산 고양이는 학장보다 아는 게 많은 게 분명했다.

베헤못은 늘 잘난 척을 해대지만, 그만큼 잘난 묘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놈이 부디갈라 와인을 혼자 마신 사건 이후로 여전히 삐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전세마차를 불러 후딱 시내에 다녀왔다.

가장 큰 주류상에 내려, 아세르의 이름을 대니 주인은 몹시 친절해졌지만… 1875년산 주교의 탑은 당장 구할 수 없는 빈티지라고 했다. 주류상엔 1879년산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그거라도 달라고 했다.

주류상에 들르기 전, 혹시나 싶어 은행에 한 번 더 확인해 보았지만 출금 정지는 진짜로 걸려 있었다.

남은 돈은 인출해 둔 1000디나르 뿐.

와인을 사니까 수중의 현금 3분의 2가량이 술 한 병 값으로 나갔다.

클레이오는 울적한 기분으로 술병이 담긴 봉투를 부스럭거렸다.

‘미쳤어. 술 한 병이 600디나르… 아니다. 푼돈 아끼다가 더 큰 돈 잃는 거야.’

낮잠을 자던 베헤못은 클레이오가 술병을 꺼내자 날개가 달린 듯 방 안을 뛰어다녔다.

우에웅웽우오오오오옹?

얼른 마개를 따 3분의 1즈음을 물그릇에 부어 주었다. 고양이는 파드득 달려들었다.

“아아, 1875년산만 못하긴 해도… 1879년산 역시 괜찮지. 그 해 여름이 더웠느니라. 이 향기, 오오오.”

시간이 지나며 레드 와인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가격인 만큼, 좋은 술인 게 분명했다.

블랙베리와 장미를 방안에 가득 채워 놓은 듯한 향이 났다.

클레이오가 자신도 한 잔 마시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베헤못이 한 잔씩 마셔갈 때마다 차례로 물그릇을 채워 시중을 들었다.

술이 줄어드는 데 비례해서 베헤못의 눈가에 감도는 황금빛이 짙어졌다. 털 결도 더더욱 차르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이거 완전 알콜중독묘 아냐….’

마침내 병이 다 비었다.

빈 병을 앞발로 붙잡고 아쉬운 듯 주둥이까지 핥은 고양이는, 그제야 클레이오를 돌아봤다.

“그래, 이제야 좀 선생질을 할 마음이 든다. 한데 네놈이 웬일로 공부를 다 하려는고?”

클레이오는 ‘아버지’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또한, 계좌가 계속 동결되어 있으면 더 이상 술을 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금 마신 술맛을 음미하던 고양이가 꼬리를 펑 터트리며 털을 세웠다.

“안될 말이다!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만일 내가 20등 안에 들 수 있다면, 못, 네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주교의 탑 1875년산을 꼭 사다 바칠게. 내 예금을 되찾으면 말이지.”

“당장 시작하자. 내일 수업은 무슨 과목이냐?”

“마법기초.”

클레이오 본인보다 더 의욕이 충천한 고양이가 책상위로 올라앉았다.

“본묘가 반드시 네 성적을 월등히 올려 준다.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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