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본분 (2)
“한 달 뒤면 방학이지? 그렇담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에 제베디는 마법식 쓰기 쪽지시험을 본다.”
“그래?”
“제베디는 벼락치기를 질색하지. 그래서 늘 돌발평가를 해. 성격 나쁜 놈.”
“그럼 어떻게 대비해야할까.”
“교과서에 안 나오는 마법식을 시험에 꼭 끼워 넣는 게 그놈 함정이지. 『마법전서』 1권을 외우면, 1학년 과정에선 제베디가 무슨 문젤 내든 만점이다.”
“『마법전서』? 도서관에서 빌려오면 될까?”
“도서관은 무슨 도서관이야! 필수 부교재를 아직도 안 사놨단 말이냐? 빨리 사환을 불러라. 『마법전서』 전 3권은 신판으로 다 사라.”
“그렇게 사정을 잘 알면 아예 문제지를 좀 보고 와주면 안 돼?”
그대로 고양이 펀치를 얻어맞았다.
“어디서 삿된 길을 찾느냐! 게다가 네놈이, 문제를 본들 문제를 이해할 수는 있겠느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가보자. 마법식과 진언이 뭔지 알긴 해?”
“제베디 학장이 마법을 쓰는 걸 봤어. 서클을 펼치고, 마법식 띄우고, [생명의 누수를 멎도록 하라] 한 마디 하니까 피가 단번에 멎던데?”
“잘 봤군. 그놈 특기 중 하나지. 그럼 그게 어떻게 작동되는지도 파악했나?”
“아니. 전혀. 하나도.”
“마법식을 왜 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외우려고 했냐!?”
베헤못은 천장을 한 번 봤다가, 바닥을 한 번 봤다가, 빈 와인병을 보고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뇌물의 힘이 대단하긴 했다.
“음, 뭔지는 알아. ‘마법식은 마법의 내용을 지시한다. 에테르를 붙들어 마법사의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신성한 형상으로서, 인간은 새로이 창설할 수 없다. 진언은 마법식을 따라 배열된 에테르를 발동시킨다. 이것이 마법의 작동 원리이다.’”
「기억」기능 덕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교과서를 외는 클레이오를, 베헤못이 놀란 기색으로 지켜봤다.
“근데 이걸 외운다고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 안다는 건 아니라고.”
원고에서도 치유마법을 쓰는 제베디 외에는 크게 언급되는 마법사가 없었다.
마법이란 게 엄청난 능력이긴 하지만, 익히기가 어려운 게 문제였다.
게다가 발동에 시간이 걸리고 서클 범위 안에서만 적용이 가능하기에, 연구용으론 효용이 있어도 전투용으론 쓸모가 적었다.
“하아아, 너는 바보인지 똑똑이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럼 더 쉽게 설명하지. 총으로 비유하자. 마법식 로딩이 장전이면, 진언은 발사와 마찬가지. 총알이 있어야 총을 쏜다. 멍청한 네놈도 이 정돈 알겠지?”
“응!”
“그럼 총알을 어떻게 만드느냐? 마법식의 형태를 완전히 외워서 백지에 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그게 네 총알이 된다.”
“그거 말곤 방법이 없어?”
“없다. 무조건 외워야 마법사 할 수 있다. 1학년은 서클을 못 여는데도 마법식을 미리 외우게 하는 건, 그래야만 서클을 연 후에 곧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군!”
“나중에 가서 외우려면 늦다. 『마법전서』 1권에 실린 백 개는 외워야 마법사 흉내는 낸다고 볼 수 있다. 그거 외우다가 1학년이 다 끝난다.”
“백 개… 알겠어.”
클레이오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그 정도라면, 할 수 있다.
교과서를 읽으면서 시험해 봤다.
화가의 그림 같이 예술성 있는 건 흉내 낼 수 없었지만, 마법식과 같은 도형과 문자의 집합은 손으로 한 번 따라 적고 나면 그대로 머리에 입력됐다.
입력만 시켜 놓으면 「기억」은 만능이었다.
‘노가다지만, 어려운 건 아냐. 뭘 어디부터 어떻게 외워야할지 몰랐던 게 문제였지.’
“그럼 하나만 더. 교과서에 진언은 안 나오던데? 그것도 『마법전서』 를 봐야 하나?”
“마법식은 현 세계의 밖에서 온 것, 마법 전서에 실린 게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다. 하지만 진언은 마법사마다 다르게 짓는다.”
“윽, 글짓기는 자신 없는데….”
“그래서! 필수과목에! 고전이 있는 것이다. 무릇 뛰어난 마법사라면 언어에 밝아야 한다. 아름다운 조성의 언어에 더 큰 힘이 깃들기 때문이다. 진언을 잘 지으면 같은 레벨의 마법사가 같은 마법식을 써도 위력이 두 배 까지 차이가 나! 발사력이 달라지는 거다.”
“그래서 제베디 교수도 [지혈]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생명의 누수를 멎도록 하라]고 하는 거야?”
“바로 그렇다. 그 마법의 마법식 이름은 멋대가리 없는 [지혈]이다. 물론 그렇게 외쳐도 마법은 발동되지.”
“!!!”
클레이오는 자신에게서 방어마법이 발동될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두 번 다 직전에 ‘살려줘’ ‘사람 살려’같은 말을 외쳤던 기억이 났다.
‘그게 진언이었어?!’
“하지만 고런 이름대로만 쓰면 제베디라도 두 사람을 동시에 치료 못 한다. ‘생명의 누수’란 표현을 활용한 덕에 위력도 그리 센 거다.”
“그럼 예를 들어, 방어마법이라면 [살려줘] 대신 [방벽이여 나를 수호하라] 뭐, 이런 오글오글한 말을 해야 효과가 좋단 거야?”
“당연하다.”
“남의 거 베껴서 쓰면 안 돼?”
“전거로서 고전을 취하는 일이야 권장되지. 그러나 순서든 조성이든 한 글자라도 바꿔 써야 네 진언이 된다. 인간에게 마법을 전해준 여신의 자녀들은 찬가와 시악에 엄격하였다. 꼭 같은 진언은 마법의 위력을 반감시킨다.”
“환장한다.”
‘이거 너무 작가 선생 사감이 들어간 설정 아니야? 후, 문과라고 다 같은 문과가 아니네. 사학과 말고 국문학과를 나왔어야 여기선 더 도움이 됐겠어.’
***
결국엔 한숨도 못 잤다.
졸음이 올만 하면 고양이의 앞발이 손등을 후려쳤다.
자신의 학생에게 먼지 한 톨만 한 기대도 없던 베헤못은, 사환이 사온 『마법전서』의 1장을 클레이오가 몇 시간 안 되어 암기하자 완전히 태세를 전환했다.
결국 클레이오는 고양이의 앞발 뒷발에 얻어맞아가며 밤을 샜다.
성과는 있었다.
“잘 했다. 너는 내 제자 될 자격이 있다. 하루만에 『마법전서』 1권을 외웠으니, 이제 에테르 레벨만 올리면 된다. 다음 4주 안에 3레벨을 돌파하게 해주겠다. 그다음엔….”
“차근차근 갑시다, 학예의 영묘이신 못 선생님.”
새벽빛이 밝아왔다.
지쳐서 웨웅 소리가 작아진 고양이와 힘들어서 눈꺼풀도 못 움직이겠는 인간은 서로를 마주보며 실실 웃었다.
그대로 나와 학교 주변을 걷다 뛰다 하며 한 바퀴만 돌고, 여벌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수업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안자고 있어 봤더니, 강의실 어딘가에서 부정입학생이니, 자살기도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직접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무시했다.
클레이오는 고3때보다도 열렬하게 수업에 집중했다. 어제 예습한 내용을 교수가 직접 시연까지 보여주며 강의해주니 아주 쏙쏙 들어왔다.
그리고 3교시째, 앞서 두 시간의 마법기초 강의를 마무리한 제베디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럼, 십 분 쉬고 다음 교시에 마법식 시험을 보겠다. 문제는 총 열 문제다. 마법사 지망 2조는 10개를 맞추면 만점, 검사 지망 1조는 3개를 써내면 만점으로 계산한다. 이 쪽지시험은 기말고사 종합 점수에 30% 반영된다. 이상.”
교수의 선언에 강의실 안이 웅성거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당황했다. 여전히 백지를 낼 생각인 1조의 아서와, 믿는 구석이 있는 2조의 클레이오를 제외하고는.
‘베헤못 이 자식, 영험한 놈. 완전 훌륭한 묘.’
연신 하품을 하느라 입을 가리고 있던 클레이오는 손바닥 안으로 웃음기를 감추었다.
‘600디나르를 투자한 건 성공 투자였네.’
수업 내용을 편안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을 뿐더러, 쪽지시험 10문제를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강의실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터져 나오는 걸 기분 좋게 들으며 클레이오는 문제지를 사각사각 채워 나갔다.
‘구성까지도 베헤못이 찍어준 대로야. 『마법전서』에서 낸 게 네 문제나 되는군.’
이름만 쓰고 백지를 제출한 게 분명한 아서가 제일 먼저 강의실을 나섰다.
두 번째로는 시험을 포기한 듯한 네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 번째가 클레이오로, 꽉꽉 채워진 시험지를 제출하고선 가뿐한 마음으로 기숙사에 돌아갔다.
조교는 클레이오까지도 시험포기자인줄 아는지 들리도록 혀를 찼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중에 채점하고 보자고.’
.
.
.
시험을 잘 친 기쁨은 잠시였다.
점심을 먹고 푹 자도 네 시간은 짧았다. 오후 네 시쯤 되자 교내 봉사를 가야 한다고 류바 사감이 깨워주었다.
세면대 거울에 비치는 얼굴엔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와 있었다.
‘인생은 단짠이라더니. 하지만 이 짓도 곧 끝이야. 방학만 돼 봐… 학교를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온다.’
클레이오는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주엔 봉오리이던 울타리의 장미가 피었고,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그런데도 누워 자고 놀고 연일 낮술만 마시던 일주일 전이, 지난해처럼 멀게 느껴졌다.
도서관 입구에서 아서가 손을 흔들었지만 외면했다. 말 섞을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서가 별관 뒤편의 창고로 클레이오와 아서를 데리고 갔다.
수십 년 간 쌓인 폐기도서와 문서를 밖으로 옮긴 뒤 창고를 청소하는 게, 두 소년에게 내려진 징계 내용이었다.
키보다 높이 쌓인 책, 먼지, 종이의 뭉텅이를 바라보는 클레이오의 표정은 어둡고, 또 어두웠다.
‘내 몸으로 이걸 다 옮기다간 드러눕는다. 마법식 중에 [분해] 쓰면 될 것 같은데. 마법 발동하는 걸 최대한 빨리 익혀야겠어.’
클레이오가 침울해하든 말든, 제 할 말만 하는 놈이 시끄러웠다.
“레에에에이, 너 정말로 대답 안 할 거냐?”
“…….”
대답하는 대신 클레이오는 사서가 준 장갑을 끼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문서 뭉텅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서가 날름 뭉텅이를 빼앗아 뒤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어찌나 힘이 센지 무슨 야구공처럼 호를 그리며 날아갔다.
“대답 좀 하지?”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표정이었지만, 묘하게 무서운 눈이 된 아서가 장갑을 벗으며 성큼 다가왔다.
클레이오는 본능적 위기감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거 지금, 피묻을까봐 장갑 벗어두고 패려는 거야?’
이전 원고에서도 열일곱 살 시점의 아서는 에테르 레벨 4, 중급 검사의 무용을 지녔었다. 지금의 최종고에서도 벌써 검기를 쓰는 놈이었다.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린단 소리다.
‘방어마법으로 버틸 수 있을까? 서클을 아직 뜻대로 못 여는데?’
목을 움츠린 클레이오 앞에 아서의 오른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지난 주, ‘편집자 권한’의 실행 실패 후 피가 흐르던 곳이다.
“내가 때리기라도 한대? 왜 과잉방어야. 정작 피가 철철 났던 건 난데. 잘 봐라, 이런 게 생겼다고.”
“뭐가 있다고? 상처도 없이 다 아물었잖아….”
“이게 안 보여? 하, 미치겠네. 희미하긴 해도 자국이 있잖아. 네가 만든 건데 넌 보여야 할 거 아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뭔가 했어. 정확히 뭘 한 건진 모르지만, 이건 그날 네가 한 짓의 확실한 증거다.”
‘네가-한-짓의 증거다.’
이 말이 시동어처럼 작동했다. 클레이오의 왼손에 끼인 ‘약속’이 장갑 밖까지도 보일 만큼 번뜩이는 광채를 발했다.
클레이오는 갑작스레 심장이 덜컹덜컹 뛰는 걸 느꼈다.
[귀속 아이템 : □□□의 약속]
[? 사용자의 서사 개입도 상승에 의해, ‘약속’의 2단계 기능이 개방됩니다.]
[? 서사의 구성 요소를 심도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서의 오른손 주변으로 금빛 글자들이 빼곡히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정보량을 감당하지 못해 클레이오는 비틀거렸다.
아서의 손등 위에는 반 뼘 크기의 문양이 솟아올라 있었다.
이제는 클레이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가운데의 작은 원, 원 바깥을 3분의 2가랑 둘러싼 겹겹의 부채꼴, 원 아래의 긴 직사각형.
얼핏 보면 조개껍질 같은 형태를 이룬, 독특한 금속성 선.
‘원형 극장’의 평면도를 그려 놓은, 뚜렷한 성흔이었다.
[고유 스킬: ‘전경화’
?어떤 무력과 마법으로도 침해 불가능한 아공간을 생성합니다.
?사용자와 사용자가 지정한 인물을 사건과 배경에서 분리해 아공간으로 이동시킵니다. ?사용자의 에테르 레벨에 비례해 아공간 지속시간과 입장 가능 인원이 증가합니다.
사용자: 아서 리오그난
제한 시간: 00:00:40
입장 가능 인원 : 사용자를 포함하여 4명]
저 성흔은 지난 원고 기준에선 ‘원형 극장’ 던전을 돌파한 아서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고유 스킬이었다.
‘저게 왜 지금 아서에게 생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