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16화 (16/489)

슬기로운 여름방학 (2)

“첫 인사를 드려요. 저는 아세르 준남작님 아래에서 일하던 디오네 그레이어랍니다.”

접견실에서 클레이오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그림에서 걸어 나온 듯 사랑스럽고, 아담한 체격을 한 ‘레이디’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치맛자락을 드는 인사를 하는 폼이 나붓나붓 아름다웠다.

하얀 레이스 모자 아래 풍성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회색 도는 분홍빛이었고, 우유처럼 뽀얀 얼굴의 눈동자는 맑은 물색이었다.

모자의 리본은 턱 왼쪽 아래로 맵시 좋게 묶었고, 하늘하늘한 천이 차분하게 드리운 드레스의 허리는 꼭 졸라매어 한 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을 차고 연병장 뛰는 소녀들이 아니라, ‘레이디’와 단 둘이 대면하자니 클레이오로선 조금 어색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디오네 그레이어.”

“그냥 디오네라고 불러주세요. 인사는 이만 줄이고,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할까요?”

투명한 피부가 살짝 비치는 레이스 장갑을 낀 레이디는, 우아하게 편 부채 너머로 여린 미소를 지었다.

클레이오의 머쓱함은 의자 사이의 거리로 나타났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콜포스의 아세르 상사에서 일을 익히고 있다 가업을 이으려 상경하는데, 제가 돌아오기 전 아세르 준남작이 부탁을 하나 하더군요?”

“무슨 부탁이었습니까.”

“여름 방학 동안, 홀로 수도에 계실 도련님의 개인교사 겸 후견인이 되어달라고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열일곱 살이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껏 자식을 내던져놔 놓고선, 갑자기 무슨 감시역이야.’

“도련님도 참 애늙은이같이 말하는군요. 들은 것과는 많이 달라, 재미가 있어요.”

탁, 하고 부러 소리 내 부채를 접은 아가씨의 눈이 유리알처럼 차가웠다.

“선생님들은 벌써 만나 뵈었어요. 도련님은 마지막 시험에서 참으로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이셨더군요.”

“그걸 확인하자고 여기까지 수고스럽게 걸음하셨습니까.”

‘이 의심 많은 양반, 설마 내가 성적을 가짜로 보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어머, 전혀 수고롭지 않았답니다. 오랜만에 은사님들도 뵈어서 즐거웠어요. 로사 선생님은 여전히 정정하시고, 제베디 선생님은 여전히 괴팍하시더군요!”

“…동문이십니까?”

“그렇게 말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저 디오네가 도련님의 다섯 해 선배가 되겠네요. 저 역시 마법을 익힌 몸이라 도련님의 개인교사 직을 부탁받은 것이에요.”

옷차림과 목소리 때문에 속을 뻔 했다. 태도와 말투만 다정할 뿐, 디오네의 물빛 눈은 입가를 따라서 웃지 않았다. 거기에 수도방위대학교 졸업생인 마법사이기까지.

‘마법반 졸업생은 기본적으로 레벨3 이상이잖아. 그럼 그렇지. 기디온 아세르가 직원으로 부리던 사람이 규중의 아가씨일리 없겠지.’

“하지만 저는, 부자간에 약조했다는 물건을 전해드리러 온 거지, 개인교사 일을 완전히 수락한 게 아니었어요. 일을 맡을지 말지는 도련님을 보고 결정한다 말씀드렸죠.”

디오네는 흰 실크로 만들어진 핸드백에서 봉인된 봉투 하나를 꺼내 클레이오에게 건넸다.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용건은 이 봉투의 전달이었어요. 내용물이 제대로인지 확인해보시겠어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회신이었다. 클레이오는 떨리는 마음으로 봉인을 뜯었다. 먼저 메모가 한 장 나왔다.

[계좌 동결 해제. 확인 요망.

기디온 아세르]

‘사람이 그 고생을 했는데, 칭찬 한 마디 없군. 내참.’

클레이오는 아버지란 작자의 인성에 혀를 차며 봉투를 크게 열었다. 메모 아래엔 수표가 있었다. 그것도 두 장. 각각 40만 디나르가 적힌, 기디온 아세르의 개인 수표였다.

‘80만 디나르!’

클레이오는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말뿐인 칭찬보단 실질적인 칭찬이 낫지요. 감사합니다, 아버님.’

클레이오는 재빨리 봉투를 재킷 품에 챙겨 넣었다. 계좌에 있던 금액까지 합치면 총 120만 디나르.

원래 말한 금액보다 40만디나르나 많았다.

도주 자금으로는 충분하고 넘쳤다.

예의를 차려, 클레이오의 봉투를 넘겨다보는 대신 우아하게 차를 따르던 디오네가 적당한 때에 용건을 꺼냈다.

“자아, 심부름은 끝난 것 같으니 나머지 말씀을 드릴게요. 전 여길 나가자마자 아세르 준남작께 전보를 보낼 거예요. 둘째 아드님의 이번 여름 방학은 저 디오네 그레이어가 단단히 책임을 져 드리겠다고요.”

다시금 펼쳐진 부채는, 클레이오가 모르는 사교계 언어를 담고 부드러이 움직였다.

부채 너머의 물빛 눈동자가, 이번에는 정말로 즐거운 듯 웃음에 물들었다.

동시에 클레이오의 표정은 희미하게 구겨졌다.

도주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궁금해 하는 얼굴이군요! 응당 답을 해 드려야죠. 칭찬에 인색한 제베디 교수가 극찬을 하는 학생이 누구인가 마법사로서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더군요. 선생님은 아주 신이 나셨던걸요? 본인 이후 처음으로, 알비온이 또 하나의 8레벨 마법사를 가지게 될 거라고요.”

‘도움 안 되는 노인네 같으니….’

“그건 지나친 과대평가입니다. 학장님께서 학생의 후견인에게 으레 하는 말이죠.”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이 여자가 자신이 마법을 쓰는 걸 본 것도 아니고.

“제베디 교수는 그런 처세술이 없는 분이신 걸 누가 모른다고, 그렇게 시침을 똑 떼나요. 이러는 도련님이 너어무 귀여워서, 제가 그만 넘어가고 말았잖아요.”

“놀림이 지나칩니다. 예의를 좀 차려주시죠, 레이디 디오네.”

매일 거울 속에서 보는 면상을 두고 새 날아가는 소리를 하는 아가씨는… 클레이오의 이해범위를 초과하는 인간이었다.

제때 식사를 하고 매일 뛰고 있으니 아주 조금은 체격이 좋아지고, 체력도 나아지긴 했지만 클레이오 아세르는 여전히 좀 비루먹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머머, 쑥스러워 하긴. 정말인데! 키가 조금 더 크고, 뺨에 혈색만 좀 돌면 도련님은, 여자아이들의 관심을 듬뿍 받게 될 거예요.”

“…….”

“처음엔 잘 몰랐는데 바로 이렇게, 엄청 식은 얼굴 할 때 아버님과 꼭 닮았어. 아세요? 아세르 준남작님은, 은근히 연모하는 여인들이 많답니다.”

“그런 화제가 적절한가는 둘째 치고, 속 빈 칭찬을 하셔도 제게서 얻을 게 없는 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클레이오는 대단히 감흥 없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디오네의 사랑스런 겉모습은 이미 위장의 효력을 잃은 탓이다.

‘학력도, 경력도 있는 한창 나이 마법사가, 어린애 뒤치다꺼리 따위나 맡은 목적이 뭐지? 정말 교수나부랭이 칭찬 한 마디 때문에?’

용돈이나 받고 사는 애에게 특별히 접근할 메리트는 없을 터.

‘게다가 저 성이 그레이어 상회의 ‘그레이어’라면 더더욱….’

바스코 그레이어가 세운 그레이어 상회는 알비온에서 가장 알아주는 마도구 취급상이었다.

규모는 영세해도 다루는 품목의 수준이 대단했다.

마도구는 에테르를 증폭시켜주거나, 마법적 방어막을 치는 등, 각종 마법적 기능을 가진 도구들의 총칭이다.

새로이 만들 수도 있지만,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도구 수리 분야에서는 바스코 그레이어가 최고의 전문가였다.

원고에서 묘사되는 바스코는 기분파에 제멋대로인 사내이지만, 결정적일 순간엔 신기한 도구를 내주어 아서를 돕는다.

‘바스코 그레이어에게, 원고엔 안 나온 딸이 있었나? 그렇다기엔 나이차이가 애매한데?’

“실례지만, 그레이어 상회의 바스코 그레이어 자작과는…?”

“어머, 저희 그레이어 상회를 아시는군요! 그분은 제 작은아버지에요. 아세르 상사의 첸트룸 무역선에 동승했죠. 작은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진 상회도 개점휴업인지라, 개인교사를 할 수 있게 된 거랍니다.”

클레이오는 의심과 경계가 가득한 눈으로 디오네를 쳐다봤다.

“아이 참,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우리 도련님 귀 잔뜩 세우면서 경계하는 것 너무 귀엽잖아.”

어느새 일어선 디오네는 앉은 채인 클레이오가 피할 새도 없이 폭 껴안아 왔다.

부드럽고, 달큰한 냄새가 나고, 정말로 몸 둘 데가 없었다.

‘!!!!!!’

돌연한 기습에 완전히 굳었던 클레이오는 얼른 힘을 줘 디오네의 팔을 떼어냈다.

클레이오만큼이나 가냘픈 팔목인데, 디오네는 생각보다 힘이 셌다.

“좀… 놔주십시오. 레이디 디오네! 이 무슨 무례입니까!”

“이제야 좀 애 같은 표정을 해주네요, 우리 도련님. 이제 함께 방학을 보내게 되었으니, 다정하게 지내잔 거였죠.”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무뚝뚝한 꼬맹이를 들쑤셔 놀려먹으려고 신이 난 디오네의 태도에, 클레이오는 짜증과 당황을 느낄 따름이었다.

‘내외 좀 하라고, 이 아가씨야!’

***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던 수도의 아세르 저택을 정비하고, 여름을 날 준비를 한 뒤 다음날 마차를 보내주겠다고 하며 디오네는 학교를 떠났다.

“내일 봐요 도련님!”

디오네가 떠나자마자 클레이오는 은행부터 들렸다.

이번엔 지난번에 갔던 로얄 서커스 지점이 아니라, 현금보유량이 풍부한 본점으로 직행했다.

계좌의 40만 디나르는 바로 찾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수표였다.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데는 하루가 더 걸린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튀고 싶은 마음이 분분했지만, 돈도 찾지 못했는데 낌새를 채일 순 없었다.

학교로 돌아온 클레이오는 건성으로 짐가방을 쌌다.

네보와는 어제 인사를 했다. 베헤못은 일과인 영역 순시를 나섰는지 방에 없었다.

아주 희미한 감상에 빠지려는 차 류바 사감이 미안한 얼굴로 클레이오를 찾았다.

“학장님께서, 창고를 다 치우지 않으면 징계가 완료되지 않은 거라고… 오늘도 오라고 하시는구나. 내가 아서도 찾아보았는데, 아직 기숙사 퇴소는 안 했지만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부터 며칠만 더 나올래?”

이가 아드득 갈리는 기분이었던 클레이오는 다정한 사감선생님 앞에서 간신히 웃는 낯을 유지해 냈다.

‘참자. 참자. 곧 끝인데 일치지 말자.’

“아닙니다. 지금 가서 정리할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서야 자기 방에 붙어있는 일이 드문 놈이니 도망가 버리면 찾을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놔두고 튀자니, 집요하고 성격 나쁜 제베디가 클레이오를 찾으려 들까봐 염려가 됐다.

‘아버지 하나 눈 피하는 것도 일인데, 8레벨 마법사의 추적에 걸리는 건 사양이다.’

긴 한숨을 내쉬고 나니, 혼자서라도 치워야겠단 각오가 섰다. 클레이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서관 창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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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보기 싫은 아서와 부대끼며 매일매일 치웠는데도 창고 안에는, 여전히 5분의 1정도 되는 짐더미가 남아 있었다.

‘그래, 이럴 때 쓰려고 마법을 배운 거지.’

클레이오는 책더미 가운데로 걸어가 왼손을 뻗었다.

고요하게, 금빛 서클이 펼쳐졌다. 서클 범위 안에는 제법 여러 덩이의 책이 들어왔다.

‘한 번에 이만큼씩인가. 몇 번 더 하면 다 끝내겠군. 힘내자.’

오면서 염두에 두었던 두 개의 마법식을 발동했다. 저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마법식을 겹치는 타이밍에 유의했다.

바닥에서부터 두 층의 복잡하고도 오묘한 문양이 솟아나 종이뭉치 위로 스몄다.

“[해체][분해!]”

마법식의 모양새는 멋있었는데 발동은 불발이었다. 영 위력이 약했다.

책들은 반쯤 고장 난 문서 세단기가 꾸물꾸물 서류를 삼키는 느낌으로 부스러졌다.

겨우 조각난 부스러기도 랙 걸린 동영상 수준으로 버벅버벅 사라졌다.

[분해]는 작고 미세한 물체를 빠르게 없애는 마법식이었다. 큰 물체를 없애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해체]를 함께 썼는데, 큰 효과가 없었다.

“…이거 다 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밤 새겠군.”

역시, 진언을 써야만 했다.

‘먼지라… 먼지. 으윽, 그건 너무 중2병 같아서 부끄러운데.’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미 방학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클레이오였다.

그리고는, 진언을 크게 외쳤다.

베헤못이 알려주었다. 찬가이며 웅변이기에 진언은 가능하면 크게 소리쳐야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재에서 재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라!]2)”

‘아악 쪽팔려!’

클레이오의 귀 끝이 화르륵 붉어졌다.

서른두 살이 감당하기엔 정도를 넘은 진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밖에 생각 안 나는데 어떡하냐고!’

쪽팔림은,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다시금 솟아난 두 겹의 마법식이 짐더미로 스며들더니, 서클 안의 책과 종이가 순식간에 먼지로 화했다.

금빛 에테르를 입은 채 폭발하듯 흩날리던 먼지는, 이윽고 공기 중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 『Book of Common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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