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에 등기를 친 클레이오 아세르 (6)
호젓한 카페에 마주앉은 남녀의 대화라기엔, 심히 건조한 내용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만은 연인을 보는 듯 다정했다.
정보를 가진 자와 정보를 돈으로 가공할 능력을 가진 자의 행복한 연합이었다.
클레이오 역시 잔에 남은 술을 머금었다. 찡하게 찌르는 아니스 향에 코 안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오레일스 지구의 허름한 술집 겸 카페에서 만난 독한 초록색 술은 딱 압생트의 맛과 향을 가졌다.
독주로 정신을 깨운 클레이오는 길 건너편, 철거 예정으로 철책이 둘러진 자신의 땅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봐도봐도 기쁘고 흐뭇했다.
‘역시 땅이야. 앞으로 전쟁이 나면 매수했던 가격의 열 배는 족히 오를 텐데… 그 사이에 토지임대료까지 받을 수 있으니 알짜 중의 알짜이지.’
정보와 자금과 인맥 없이 돈을 벌기 힘든 것은 이전 세상이나 이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이다.
‘주인공에게 붙어 다니며 내내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판인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하지 않겠어?’
지불된 1차 계약금을 확인한 후 은행에 들러, 디오네에겐 곧바로 수수료 전액을 지급했다.
기분이 한껏 들뜬 두 사람은 마차를 돌려 땅을 확인하러 왔다.
그간에도 몇 번 들른 오레일스 지구였지만, 더러운 골목과 푹푹 파인 흙더미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기디온 아세르의 자금에는 기대지 않아도 되고.’
지금도 통장에는 차곡차곡 용돈이 쌓이고 있지만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나름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동산을 늘릴 궁리를 하느라 머리를 팽글팽글 돌리던 클레이오의 콧속으로 낯설고 불쾌한 냄새가 파고들었다.
‘뭐지? 풀이랑 흙 같은 게 썩어서 쉰 것 같은 악취가… 아니 도시 한복판에서 무슨 풀 썩는 냄새가 나?’
디오네 역시 이변을 눈치 챈 듯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클레이오보다 추리력이 뛰어났다.
“레이, 이거 아무래도… 이런 냄새가 나는 건 단 한 가지 밖에 없다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지….”
평소와 달리 자신 없는 말투로 디오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제야 클레이오도 그녀의 의심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기억」이 파르륵 휘감기며 해당되는 묘사를 찾아냈다.
―마수의 피에서는 풀이 썩는 진득한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사방으로 멀리 퍼진다.
‘설마!’
“…마수의 피 냄새일까요?”
“맞아요, 레이. 이론적으로는 그럴 테지만 마수란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마지막으로 마수가 등장한 건 근 천 년 전의 일인걸요.”
“학창시절 배운 내용을 다 기억하다니, 레이디 디오네는 굉장하십니다.”
“므네모시네 문의 전승과 역사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데 그걸 어떻게 잊나요.”
옛 시절엔 브룬넨 군주국에, 카롤링거 왕국에, 메레디에스 대륙에 모두 므네모시네의 문이 있었다.
혹자는 문명이 멸망한 첸트룸 대륙에도, 강물이 말라붙기 전엔 문이 존재했다고 전한다. 모든 문은 가운데로 강이 휘돌아나가는 도시의 강가에 자리했기에.
그러나 긴 세월동안 이세계로 이어지던 문들은 모두 닫혔다.
템푸스 강가의 므네모시네의 문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이세계의 관문이었다.
왕립 수도방위대와 수도방위대 학교는 본래 므네모시네의 문을 지키고 관찰한다는 목표 하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알비온 왕국의 왕자>의 지난 원고에선 룬데인에 있는 이세계의 문이 천 년 만에 다시 열리지. 아서의 시대에 와서….’
클레이오는 서둘러 「지각」을 켰다.
청각과 후각이 폭발적으로 민감해졌다.
여섯 블록 바깥에서 날뛰는 거대한 네 발 짐승의 발소리,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두 종류의 포효, 짐승이 흩뿌리는 피의 냄새를 선명하게 포착해냈다.
‘역시 쌍두 늑대 바르그인가? 아서가 열아홉 살 때 잡아야 하는 마수인데, 2년이나 빨라! 으윽.’
바르그는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나온 마수였다.
클레이오는 거대한 괴수의 존재에 놀랐으나,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그것을 뒤쫓는 검사들의 기척 역시 느껴졌다. 에테르의 기운이었다.
백주 대낮 수도 한복판에서 검기를 쓰는 자들이라면 기사단일 터.
‘다행이다…! 기사들이 오고 있다면 알아서 잡아 주겠지.’
둘러보니 창밖의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고, 카페 안에만 손님 여남은 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아직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 느긋한 모습이었다.
‘마수가 어느 경로로 움직일지 모르는데 거리로 나서는 게 오히려 위험할지도 몰라.’
떨리는 마음을 달래며 클레이오는 남은 술을 한 번에 다 마셨다. 식도 모양이 선명하게 그려질 것 같은 느낌으로 술이 쭉 넘어갔다.
“레이디 디오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전투에 활용할만한 마법식 외운 것 있습니까?”
“난 마석가공 전문 마법사에요. [발화]는 까먹었고 [뇌격] 같은 건 아예 처음부터 외우지도 않았어요.”
“아깝게요.”
“자기 분야에 맞는 마법식만 외우기도 바쁜데, 쓰지도 않는 걸 어떻게 외우고 있어요. 헌데, 전투 운운하는 거 보니 뭔가 위험한 일이 닥친 거죠?”
“마수가 한 마리, 그리고 그것을 쫓는 기사 넷이 올 겁니다.”
디오네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수라니! 난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데… 그것 역시 ‘예측’된 건가요?”
“비슷합니다. 제 예상과는 좀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아니 그런 예측이 있었다면 그런 날은 피해서 여길 왔어야죠!”
“그게 오늘일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그래도 수도방위대 기사단이 바짝 쫓고 있으니 기사 제위께서 잘 처리해 주시겠….”
클레이오는 말을 마지치도 못했다.
콰콰콰콰콰쾅!!!
단층인 카페 건물을 뒤에서 뛰어넘은 마수가, 카페의 유리창 한 겹 너머 도로에 착지했다.
기마 서너 마리를 합한 만큼 큰 데다 머리가 두 개나 달린 회색 늑대가 울부짖었다.
크르르르르륵―
등과 뒷다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마수의 눈에는 광기와 분노가 감돌았다. ‘약속’이 반짝이며 「이해」가 작동했다.
[바르그
?분류: 마수
?레벨: 5]
클레이오도 디오네도 바짝 굳어 버렸다. 너무 놀라면 사람은 아무 소리도 못 내는 법이었다.
얇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카페 안의 사람들을 발견한 마수의 눈에 광망이 돌았다.
챙그랑, 채챙― 와장창―!
사위를 울리는 진동에, 한 박자 늦게 카페의 유리창이 깨졌다. 클레이오는 급박하게 방어마법을 펼쳤다.
진언을 생각해낼 틈이 없어 그냥 무식하게 슬롯 네 개를 단순 시동어로 채웠다.
그만큼 마수의 위용은 무시무시했다!
“[방어][방어][방어][방어]!!!”
카페 주인과 손님들, 디오네와 클레이오를 모두 감싸고서 넓게 펼쳐진 서클이 빛을 발했다.
콰콰쾅― 콰쾅―
거대하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늑대가 몇 차례나 클레이오의 방어마법에 몸을 부닥쳐 왔다.
부닥칠 때마다 에테르의 금빛 불티가 튀었다.
마수는 서클 안으로 앞발 하나 들여놓지 못했다.
넋이 나간 디오네는 어느새 클레이오에게 꼭 붙어왔다. 그럼에도 그의 뒤가 아니라 앞으로 가, 소년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고마워요. 이제 어떻게 하죠? 상대가 사람이라면 저도 수를 내겠지만, 마수를 상대하는 건 무리에요.”
“아까와 같습니다. 수도방위대 기사단이 뒤쫓아 오고 있으니 저흰 기다립시다.”
클레이오 역시 긴장했지만 디오네가 눈에 띄게 떨고 있어, 저도 모르게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래, 정신 차리자. 「지각」이 있으니 움직임은 잘 보여. 아직 에테르도 충분해. 기사단도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향했어. 버티면 돼.’
마지막으로 방어마법에 부딪쳐 튕겨 나간 마수의 거대한 몸은 카페 맞은 편, 클레이오의 땅 주변에 둘러둔 철책에 처박혔다.
반탄력이 얼마나 거세었던지 이내 철책이 찢기고, 철거중이라 이리저리 파헤쳐진 클레이오의 땅 위에 마수가 뒹굴었다.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의 주둥이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몸을 부들거리는 것이 곧 피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슬슬 목숨이 다해가는 모양이야. 다행…이 아니잖아?!!!’
마수가 죽는 건 괜찮다.
하지만 클레이오 소유의 땅에서 죽어선 안 됐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억」이 되감겼다.
지난 원고에서도 문을 뛰쳐나온 마수는 아서에게 쫓기다 외곽의 철거 부지에서 사살 당한다.
누구도 맡아본 적 없는 악취를 내는 자줏빛 피가 온 땅에 흩뿌려졌다.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마수의 피나 부산물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구실로, 왕립 수도방위대는 부지를 봉쇄하고 연구마법사들을 파견해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물론 사람한텐 아무 해도 없었지! 연구마법사 놈들이 마수 피란 소리에 눈이 훽 돌아서 들러붙은 거였잖아!’
마법사들은 천 년 만에 등장한 마수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갖은 실험을 거친 후 조사가 완료되는 데는 18개월이 걸렸다.
당연히 그동안엔 철거고 공사고 모두 올스톱이었다.
저기서 마수가 죽으면 곧 클레이오에게 닥칠 일이었다.
조사에 발목을 잡혀 호텔 착공을 일 년 반이나 연기할 순 없었다!
‘시발, 안 돼!!! 내 땅에선 죽지 말라고!!!’
완드고 뭐고 없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디오네의 양산을 완드 대신 움켜 쥔 클레이오는, 깨진 유리창을 즈려밟으며 도로로 튀어나갔다.
까드득― 콰직!!
“[도약하라, 전령의 발과 같이!]”
클레이오는 슬롯 두 개를 채워, [도약][체공] 마법식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방학 동안 틈틈이 연습했던 조합 중 하나였다.
바닥에 넘어져 있던 늑대는 클레이오의 에테르가 폭발하자 자극을 받은 듯 벌떡 일어섰다.
전신이 너덜거리는데도 사납게 몸을 털었다.
푸드드득― 푸르르르―
크와아아아아악―!
한 순간 바르그의 번뜩이는 눈과 클레이오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됐다!’
그 직후 클레이오는 서클을 4레벨의 최대 범위로 펼친 뒤, 가능한 넓은 간격으로 도약해 마수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그래, 따라 오라고!’
늑대는 언제 쓰러졌었냐는 듯 괴성을 울리며 클레이오를 쫓았다.
콰콰콰쾅!!!
주민이 퇴거해 을씨년스러운 골목을 단숨에 뛰어넘으며 도시의 외곽으로 향했다.
‘무조건 여긴 벗어나야 해!’
점점 괴수의 울부짖음과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지각」은 늑대의 기척을 생생하게 했다.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몇 번이나 마법식을 다시 켜 가며 클레이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늑대를 유인했다. 숨이 턱에 받혀 가슴이 꽉 메었다.
양산을 들지 않은 손으론 재킷 주머니를 마구 뒤적였다.
긴장 때문에 손이 떨려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는 데도 한참 걸렸다.
그 때였다.
타아아아아앗!
마수는 여전히 체공 중이던 클레이오의 아래를 지나쳐, 착지점에서 진로를 막아섰다.
워우우우우우―!!!
늑대가 고개를 틀어 사납게 울자 피에 물든 이가 날카롭게 드러났다.
“우와아아악!”
클레이오 역시 비명을 내질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각」덕에 늑대의 움직임이 들여다보인다는 거였다.
‘보이면 뭐해 피할 수가 없는데!’
앞에서부터 달려드는 늑대를 피해 [체공]마법을 껐다.
와르르― 털푸덕!
그대로 철거 중인 폐허의 벽돌 더미에 처박혔다. 처참한 꼬락서니였지만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주머니와 사투를 벌였다.
‘아 씨 주머니는 왜 안 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