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神授)의 왕권 (1)
침실에는 모두들 힘을 합쳐 옮겨준 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길쭉한 상자는 가장 아래에 깔린 채였다.
‘애들이 이래놨나 보군.’
“아서. 저기 제일 긴 상자 보이지? 바닥에.”
“어.”
“저것 좀 꺼내 봐.”
“야아, 일 시키려고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사람을 부르고….”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이시엘. 그냥 있어.”
바닥에 무릎을 댄 아서는 손쉽게 짐을 치우고 검이 든 상자를 빼냈다. 그대로 클레이오에게 내미려는 걸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그건 아서 네 거니까, 가져가서 써라.”
“뭔데?”
“검. 전에 부러졌잖아.”
“새 연습용 검 벌써 받았어.”
“네 검기를 학생용 검이 며칠이나 버티겠냐. 줄 때 받아라. 빨리 뜯어 봐.”
“…고맙다.”
아서는 더 사양 않고 검의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베그의 검’을 본 순간부터 쭉 생각하던 일이었다.
검을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하는 클레이오에겐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을 반색하며 받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 놈이 이전 버전 원고보다 레벨도 훨씬 빨리 올랐는데 걸맞은 검 역시 얼른 가져야지. 그래야 다치기도 덜 다치고, 죽을 위험도 덜해질 거 아냐.’
세계 전체의 운명을 짊어지고도 자각이 없는 주인공이니 무기라도 제대로 갖춰줘야 했다.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서도 이 아이템 하나만은 팔거나 삼키는 게 아니라 아서에게 주는 편이 이익으로 여겨졌다.
‘바르그가 나왔으니 머잖아 던전이 열릴 텐데, 공산품 검 하나 들고 거길 뛰어들게 할 순 없지.’
몇 겹이나 감싸인 비단 아래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된 ‘베그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가죽을 펴 만든 검집은 날에서 영감을 받은 물결무늬가 돋을새김 되었고, 검집 끝과 시작에는 은으로 만든 장식이 둘러져 있었다.
칼자루를 쥔 아서는 홀린 듯 검을 발도했다.
슈르릉―
귀기서린 예리함으로 날은 공기를 갈랐다. 귀신조차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검이었다.
‘역시. 길이도 이놈 키에 딱 맞군. 주인공을 위해 준비된 검다워.’
클레이오가 흡족해하는 동안 아서는 넋을 잃고서 날을 살피고 있었다.
검을 쥔 팔에 힘줄이 서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다.
역시나 검사라선지 이시엘까지도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엄청난 귀물을 내가 받아도 되나? 이건 그냥 검이 아니라 마도구로 보이는데.”
“마도구인 건 사실이지만 튼튼하단 것 말고 별다른 기능은 없어. 그걸로 확 레벨이 오를 건 기대하지 마.”
“그렇게 가볍게 말할 물건은 아닌 것 같다.”
검을 놓고 싶지도 않으면서도, 너무 귀한 것이라 사양의 말을 어설프게 주워섬기는 아서였다.
고생을 하고 자라 현실감각 있는 건 좋은데 사고방식이 너무 서민적인 왕자님이 아닌가.
클레이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진지함을 가장했다.
“내가 ‘신의를 담아서’ ‘전심전력을 보탠다.’고 한 말 까먹었냐? 몇 주 지나지도 않았는데.”
“당장 이런 엄청난 후원을 받을 줄은 몰랐거든.”
“공짜 아니니까 나중에 다 갚아야 돼.”
“뭘로?”
“귀족원 의석 정도면 적당할까?”
작위를 들먹인 순간, 이시엘의 눈초리가 묘하게 차가워진 것 같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이 정도면 공정거래지. 귀족원 의석이 100개나 되는데 거기서 한 자리만 주면 난 저택을 가질 수 있다고.’
어차피 줄 물건이라지만 꼭 무료로 증정할 필요는 없잖은가.
무기는 필요 없어도, 아세르 저택은 꼭 가지고 싶은 클레이오였다.
“…기억해 둘게.”
그렇게 말하는 아서의 얼굴은 너무도 진지해서, 클레이오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그래. 그 각오 잊지 마.”
‘바로 이거지. 저가매수 고가매도.’
세상에 재물로 못 얻는 게 어디 있는가.
역사가 말해준다. 작위도 직위도 돈으로 다 살 수 있다.
‘약속’이 때맞춰 새 메시지를 띄웠다. 이제 놀랍지도 않은 연쇄반응이었다.
[?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상승합니다.
?서사 개입도의 누적 비율을 계산 중입니다 (□□%)]
***
다음날 수업 과목은 고전이었다.
이미 몇 주나 학교를 빠진 클레이오가 내용을 따라가긴 어려웠지만 상관없었다.
압살롬 2세의 계관시인에 관한 설명을 흘려들으며 멍때리고 있는 게 평화로웠다.
교정의 나무엔 서서히 단풍이 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분다.
그런 가을날엔 시를 분석하는 선생의 지루한 목소리조차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이전과 달라진 점은 하나뿐이었다.
바르그가 출몰한 직후부터 학교 한복판의 숲은 학생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강의동에서 내다보면 숲 가운데에, 므네모시네의 문을 감싼 내부 결계가 24시간 빛을 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클레이오와 아서가 등받이로나 쓰던 결계석이 천 년 만에 제 역할을 되찾은 것이다.
‘저래놨으니 무슨 일 생겨도 이젠 알아서들 해결하겠지’ 싶어 마음이 편해졌다.
수업을 마치고 쌍둥이들 사이에 끼여 점심을 먹은 클레이오는, 그리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마차를 불렀다.
마부가 행선지를 물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의회로 가 주십시오.”
이상한 주문에 마부는 다시 한번 마차를 부른 학생의 모습을 살폈다.
“의회는 허가증이 있어야 마차를 댈 수 있는지라, 미리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여기… 출입허가증이 있습니다.”
가방도 없이 맹하니 서 있던 클레이오는 그제야 품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마부는 상당히 놀랐지만 접객의 프로답게 놀라움을 속으로만 감추었다.
‘도대체 뭘 하는 학생이기에… 귀족이나 의원의 후계자인가?’
“알겠습니다. 빠르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마부의 대답이 한결 빠릿하고 공손해졌다. 제 생각에 빠진 클레이오는 그의 오해도 모른 채 흐느적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문제의 수도방위장을 수여 받는 날이었다.
‘받는 건 좋아. 그런데 왕세자 본인이 직접 주는 거였냐고.’
멜키오르를 대면하는 건 영 껄끄러웠다.
게다가 훈장 수여 전에 왕실 자문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마수 습격에 관한 증언을 먼저 해야 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그 탓에 왕성이 아니라 의회가 목적지가 되었다.
제베디에게 물어봤더니 위원회 호출은 그리 큰 일이 아니라고, 편하게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소시민 근성이 되살아난 클레이오로선 회피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이전 세상에서는, 의회는커녕 경찰서 한 번 가본 적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휴, 연금을 생각해서 참자. 평생 나오는 데다, 물가상승에 따라 상향조절도 해 준댔지.’
사실은 서훈 자체도 큰 문제가 될 뻔했다.
기사 위에 준하는 자격만 부여받는 게 아니라, [언약]이 강제되는 정식 서임이었다면 그걸 피하기 위해 엄청난 노고가 들었을 것이다.
토지 시세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이토록 힘들다는 걸, 이세계에 와서야 알게 된 클레이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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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적인 사암 기둥과 높은 궁륭으로 짜인 의회 건물은 방문자를 압도했다.
내부의 구조 역시 몹시 복잡해, 의회 시종의 안내에 힘입어서야 겨우 귀족원의 국왕 집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국왕대리인 왕세자가 사용하는 곳이다.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 들어갑니다.”
“들어갑니다.”
집무실 입구 양측에 선 호위병들이 왕세자에게 클레이오의 방문을 알렸다.
클레이오는 곧바로 ‘약속’의 「이격」을 켰다.
시종은 정중하게 문까지 열어 줬지만 클레이오는 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왕세자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들여야 했다.
이것은 적응이 불가능한 종류의 자극으로, 언제 보아도 저 아름다움은 영원히 새롭게 충격적일 것이다.
강에 면한 창가에 서 있던 멜키오르가 무감하게 이 편을 돌아본다.
왕세자는 아무 스킬도 쓰지 않고 그저 쳐다만 봤을 뿐인데, 문 앞의 클레이오는 다리가 빳빳하게 굳어버린다.
생명이 있는 존재가 어째서 저런 형태로 조형될 수 있는가?
그는 지난 원고에서도 탁월하게 뛰어난 외모를 지닌 캐릭터라 묘사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불성실한 서술이었다.
이 작자의 꼴은 엘프도 페어리도 없는 <알비온 왕국의 왕자>세계관에서,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만드는 형상이다.
인간의 미의식이 온전히 수용하기 어려워 일종의 불쾌감을 안기는 과도함.
시종이나 호위병들까지도 멜키오르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건, 그가 왕세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방비 없이는 똑바로 주시하기조차 어려운 존재였으므로.
“클레이오? 많이 긴장했나 보군.”
“…네, 의회는 처음인 터라.”
‘댁 때문이지, 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클레이오는 어색하게 목을 움츠렸다.
온전한 정체가 뭔지 모른다 해도, 어쨌거나 저 작자는 왕세자 멜키오르 리오그난었다.
섣불리 행동하다 이상한 낌새라도 채였다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
“아직 회의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차라도 좀 들겠나?”
멜키오르는 여상한 어조로 클레이오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장식 없이 소박한 집무실에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창을 등지고서 가로놓였고, 책상 앞으론 단순한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클레이오는 미적미적 가 앉았다.
멜키오르가 포트에서 손수 차를 따라 내밀기에, 어색하게 찻잔을 받아들었다.
왕세자가 먼저 차 향을 음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클레이오는 맛도 모르고 대충 넘겼다.
방금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책상 위는 잉크와 펜, 서류들로 복잡했다.
‘왕세자는 유능하다는 평을 듣던데… 거기에 부지런하기까지 했군.’
클레이오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다 보니,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세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교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였다.
날씨, 차의 맛, 아세르 상단의 귀환을 화제로 삼다 보니 어느덧 클레이오도 긴장이 풀렸다. 「이격」덕인지도 몰랐다.
바로 그 순간 멜키오르가 훅 치고 들어왔다.
“헌데, 오늘도 교복을 입고 왔군.”
“네, 제베디 마법감에게 물어보니 의회를 방문한다면 학생은 교복이 가장 적절한 복장이라 조언했습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의복을 보내 주었는데, 그저 교복이라니.”
클레이오는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 했다. 잘 먹은 점심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멜키오르가 언급하는 건 문제의 ‘리오그난 왕가의 예복’이다. 그걸 왜 입지 않느냐고 떠보다니.
진짜 사생아였다면 못할 짓이고, 아니라면 더더욱 가지고 있기에 부담되는 물건.
‘어휴, 그걸 확 태워버릴 수도 없고.’
역시나, 마음을 읽는 게 불가능한 클레이오를 배다른 동생으로 확신하는 것 같은 왕세자였다.
고유 스킬을 써 생각을 읽을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사람을 떠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럴 때의 대응은 동문서답이 제일이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제가 입기에는 치수가 너무 컸습니다.”
의외의 반응이었던 듯, 모양 좋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린 멜키오르가 한층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제 체격이 너무나도 빈약하다보니 하사품에 걸맞은 품격을 못 갖추었습니다. 아주 귀해 보이는 복식이라 감히 대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무척 아쉽구나. 그 예복은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썩 잘 어울리는데.”
‘이 자식 또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네.’
클레이오는 잔뜩 긴장해 멜키오르의 움직임을 살폈다. 혹시나 ‘간파의 구조시’ 스킬을 쓸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멜키오르는 이전에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탄신연날 자기 스킬이 불발됐을 때, 세상도 뒤흔들린 걸 왕세자 역시 아는 거겠지? 아서 역시 세계가 붕괴할 땐 이상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쉽게 스킬을 쓰지 않게 된 것은 괜찮았지만, 그 탓에 다른 방식의 취조가 더 집요해졌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처지로서는 왕세자와 대면하고 있는 순간순간이 아슬아슬했다.
“클레이오, 네 얼굴은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서, 정말로 내 형제들을 닮았다 생각했지.”
‘나는 당신의 형제 따위가 아니고 그냥 흔해 빠진 책 빙의자일 뿐입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어 클레이오는 내적 비명만 삼켰다.
안색이 흐려진 클레이오를 유심히 살피던 멜키오르는 다정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너는 섭식에 힘을 쓰기는 해야겠구나. 키만 길쭉하니 길어선.”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때 왕세자와 클레이오 사이로 회중시계를 든 의회 시종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하, 왕실 자문위원회 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