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잿빛 불꽃 (2)
“왕실의 개 주제에 쓸데없이 눈썰미만 좋군.”
벌떡 일어나 잡지를 탁 덮어 치워버린 프란은, 언제 타르트를 두 조각이나 집어먹었냐는 듯 떽떽거렸다.
“그래그래, 개든 뭐든.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글은 저렇게 고친 거냐?”
“편집위원이 내 주장을 절충주의적이라며 멋대로 수정해 놨다. 동의도 없이… 아니, 네가 그런 건 알아서 뭐 하려는 거지?”
기고문 무단수정이 어지간히 억울했던 듯 툭 치니 와르르 생각을 뱉어내는 프란이었다.
다혈질인 이 소년, 열정은 있어도 용의주도한 활동가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 속내를 드러낸 게 자존심 상하는지, 클레이오를 외면하고서 안경을 벗어 닦는 프란의 손동작이 거칠었다.
그 순간 프란의 손등에 희끗한 선 같은 것이 얼핏 보이다 말았다.
‘뭐지? 성흔인 거 같은데?’
“그렇게 해서는 닦이긴커녕 안경알이 더 더러워지겠다. 이리 줘봐.”
“됐다, 내가…!”
안경을 뺏으려 들자, 프란은 반사적으로 클레이오를 밀어냈다.
클레이오는 가까이 내밀어진 프란의 오른손을 그대로 확 잡아챘다.
온 힘을 다해 프란의 손을 붙들고서 에테르를 전도시켰다.
밝은 금빛이 두 소년의 맞닿은 손 사이로 터져 나왔다.
프란은 제법 매섭게 클레이오를 떨어냈지만 이미 떠오른 성흔을 한 손으로 가려봐야 소용없었다.
주홍빛 선이 그리는 것은 나팔의 형상.
‘약속’의 「이해」가 성흔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고유 스킬: ‘프로파간다’
―사용자의 말과 글에 선전? 선동의 힘을 부여합니다.
―사용자는 다수 대중의 분노와 용기를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사용자: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
동시 적용 가능 인원: ∞ ]
완전히 금시초문인 고유 스킬이었다.
‘이전 원고에서도 묘한 설득력을 가진 놈이다 싶긴 했지만… 고유 스킬까지 저 모양이니, <최종고>에선 진짜로 과학이랑 상관없는 인물이 됐나?’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냥 성흔을 확인한 것뿐이야.”
“그걸 뭐하러!”
“나도 성흔이 있거든. 반가워서.”
클레이오 본인이 생각해도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낀 프란이 원수라도 보는 눈으로 클레이오를 노려보았다. 보기보다 강골인 소년이기에, 대뜸 주먹질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근데 얼굴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날 왜 이렇게 싫어해….’
“지브릴 블랑쉬… 이 필명은 기억이 나. 마수사건 땐 나에 대해 기사 좋게 써줬잖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태도를 손바닥 바꾸듯 한 거야.”
“그 괴물, 멜키오르와 사이좋게 어깨동무한 사진을 온 신문 일면에 박아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 네겐 실망했다!”
프란은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빼짝 마른 목에 핏대가 서는 게 보였다.
그의 파르르한 대답에는 증오와 함께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사적인 불호를 넘어서는 공분이었다.
“프란, 넌 왕세자 저하에 대해 뭘 알지?”
“몰라.”
“모른다면서 왜 그렇게 흥분을 해.”
“도대체 그런 존재에 대해 내가 뭘 알 수 있겠어?”
꽤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왕세자의 고유 스킬을 얘도 눈치챘나? 아니야. 그렇다면 멜키오르가 얘를 이렇게 풀어놨을 리 없지. 그럼 뭐 때문에 이렇게 왕세자를 무서워하지?’
“왕세자 저하를 실제로 본 적 있어?”
“…있어.”
프란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 조그매졌다. 두려운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전에 아서가 그랬지. 얘는 무슨 지하조직 소속인 것 같다고. 거기다 멜키오르에겐 비밀정보부가 있으니 답은 뻔하잖아.’
독재정권도 알고 국정원도 아는 한국 사람한텐 안 봐도 비디오다.
왕세자를 언급만 해도 덜덜 떠는 걸 보니 동료가 잡혀갔든가, 본인이 불려갔든가 했겠지.
‘디오네조차도 내가 비밀정보부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를까봐 걱정했고.’
멜키오르에게서 독재자의 자질을 느낀 것은 클레이오의 과민함이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인간을 매혹시킬 수 있는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다면 성자조차도 괴물이 되고 말 테니까.
‘하여간 멜키오르 놈, 가지가지 해요. 프란이 얼마나 중요한 인재인지 모르고 이렇게 겁을 먹게 하고. 아니면 뭘 알고 그러는 건가? 후.’
클레이오는 잠자코 서클부터 펼쳤다.
프란이 움찔 물러나려 들기에, 잡아당겨 서클 범위 안에 붙잡았다. 소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최소범위로 펼쳐진 서클이 빛을 발하자 [방음][차폐]의 두 마법식이 바닥으로부터 도드라졌다.
“[말들의 비밀은 영구하리니!]”
디오네가 쓰던 것을 눈여겨 봐둔 마법 차폐막이었다. 반드시 요긴히 쓰일 것 같아 그녀의 진언을 살짝 고쳐 베껴 두길 잘 했다.
“프란 이 마법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그 어떤 마법적 도구도, 사람의 눈과 귀도 서클 안의 음성을 엿들을 수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너….”
“‘신의를 담아 말한다.’ 신문의 사진은 내가 원해서 찍은 게 아냐.”
렌즈 너머 이지러진 프란의 눈을 똑똑히 들여다보며 클레이오는 새기듯 말했다.
“잘 알잖아. 그게 왕세자의 저열한 방식인 거.”
처음으로 프란의 얼굴에서 경계가 옅어졌다.
‘먹혔나?’
“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작자와 엮였는지는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줘.”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려는 거지?”
“그게… 너 혹시 과학에는 흥미 없냐?”
“과학이라니?”
“야금학이라든지, 화학…?”
“설마 내 과학아카데미 시절 논문이라도 찾아본 거냐?”
조금 누그러졌다 싶던 프란의 말투가 대번에 싸늘해졌다.
‘논문을 썼다고? 번지수는 제대로 찾은 거 같은데?’
“그, 그래.”
“어디서 그런 걸 다 읽어봤는지 모르겠군.”
“개인적으로 티플라움 가공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수소문하다 보니까.”
“티플라움이라…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그건 다 지난 일이야. 난 인생의 진짜 목표를 찾았으니까.”
마법식은 시한이 다해 꺼졌다.
마법 차폐막이 사라지자 프란은 입술을 딱 붙인 채 아무 말도 하려 들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 됐다.
‘도대체 왜 과학자가 아니라 좌파 언론인으로 전향한 거냐고! 미래는 이공계에 있는데!’
뼈 문과이자, (전)활자 매체 종사자의 진심어린 절규였다.
***
그 후론 프란과 마주치지도 못하고 몇 주가 흘렀다. 중간고사 전 마지막 학교행사인 필드 트립이 어느덧 다가왔다.
여행을 다녀오면 또 스파르타식 베헤못 수업을 들어야 할 것 같아 클레이오는 마음이 무거웠다.
빼애애애애애앵―
기차가 터널 입구로 진입했다.
“와아아악!”
“터널이다!”
“모자 날아가!”
클레이오와 같은 칸에 탄 쌍둥이들이 소란을 피웠다.
아서와 이시엘, 네보와 프란이 앉은 옆 칸은 지금도 아주 조용했다.
“얘들아, 위험하니까 자리에 앉자!”
레티샤의 모자가 차창 밖으로 날아가기 전 재빠르게 잡아챈 첼이, 두 쌍둥이를 말렸다.
“알았어, 첼!”
“고마워!”
기차 객실의 한 칸에는 정방향으로 좌석이 한 줄, 사이에 테이블을 놓고 역방향으로 좌석이 한 줄 서로 마주보고 놓였다.
빠르게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닫은 리피가 먼저 클레이오의 오른편에 앉았다.
레티샤는 첼 곁으로 가지 않고 클레이오의 왼편에 턱 올라앉았다.
“둘 중 하나는 첼 쪽으로 가 줘….”
“싫어. 우리 간식 나눠먹을 거라구.”
“레이, 넌 한 사람 자리도 안 차지하잖아.”
모두가 탄 기차는 듀브리스 시까지의 특급 열차였다.
1등 객실의 좌석은 전혀 좁지 않았지만 양쪽에 붙어 앉은 쌍둥이가 떠들어대는 게 시끄러워 몸을 빼 보려던 클레이오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덕분에 첼은 맞은편 좌석 한 줄을 모두 차지했다. 등을 복도 쪽 칸막이에 대고 창문 쪽으로 다리를 쭉 뻗은 첼이 편하게 몸을 눕혔다.
“오, 얘들아 고맙다. 덕분에 난 편하게 간다.”
오늘은 가을의 필드 트립을 떠나는 날이었다.
3박 4일 일정으로, 1학년 전체가 핀토스 산맥 북부의 ‘왕의 숲’으로 수련 겸 견학을 간다고 했다.
인솔교사인 마리아 젠틸레 교수가 뭘 더 길게 설명했었는데 클레이오는 조느라고 잘 못 들었다.
“듀브리스에 지금 가면 밤을 수확해 놨겠지.”
“몽블랑이랑 마롱글라세 먹을 수 있을 거야.”
“맛있겠다.”
“도착하면 바로 숲에 가자!”
“동물들도 보고 싶고.”
쌍둥이들은 숲에 이미 가본 적이 있는 듯, 도착하면 할 일을 신이 나 손꼽고 있었다.
“동물? 숲에 동물이 있어?”
“그럼! 많아!”
“너희들도 동물 좋아하니?”
“당연하지! 리피 쟤는 토끼.”
“레티샤는 비둘기지?”
클레이오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애들은 애들이네. 귀여운 면이 있군.’
물론 그 따위 안이한 생각은 곧바로 깨졌다.
“갓 사냥한 신선한 토끼는 머스터드 구이 하면 맛있지.”
“비둘기는 가을 버섯을 채워서 구우면 끝내 주고.”
“토끼는 잡으면 피를 바로 빼야 더 맛있지.”
“그치!”
“아! 빨리 먹고 싶다.”
‘좋아한다가… 그 좋아한다였냐. 으윽.’
현대인인 클레이오에게는 약간 비위가 상하는 이야기였다. 불편한 기색을 먼저 눈치 챈 건 첼이었다.
“으하하하, 레이 너 방금 충격 받았구나? 마수도 잡아 놓고 고작 사냥에 낯이 하얘져?”
“아니… 마수는 실제론 생명체도 아니고. 죽으면 광물이랑 비슷하다고. 그거랑 산짐승이랑 같냐.”
“이래서 도시 출신이란!”
“내가 검을 쓰냐, 활을 쓰냐. 재미로 하는 사냥엔 인연 없는 게 당연하지.”
레티샤는 곧바로 클레이오에게 면박을 줬다.
“사냥에 검이랑 활을 왜 써? 총이 있는데. 그치 리피?”
“맞아. 나 총기소제도 잘 해!”
“안젤리움 자작의 사냥 애호는 꽤 유명한데. 쟤들도 서남에서는 아주 이름이 알려진 사수들이고.”
“나 저번엔 한 번에 열네 마리 잡았어.”
“난 열두 마리였는데, 이번엔 안 질 거야!”
리피와 레티샤는 서로에게 질세라 자신들의 전적을 자랑했다.
총을 든 미소녀의 현실은 이런 법이다.
멤버 중 최약체인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곱씹게 되는 클레이오였다.
“너흰 왕의 숲에 자주 가봤나 봐?”
“응! 매년 갔어. 학생 검술 대회 때!”
“첼도 거기서 만났어!”
“정말?”
“그랬지. 처음 본 게 3년 전이었나? 지금도 귀엽지만, 리피와 레티샤가 열 살일 땐 정말 인형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지!”
“하하. 고마워, 첼.”
“첼도 그때나 지금이나 잘생겼어.”
“오, 감사한 말씀.”
바람에 흐트러진 남색 머리를 쓱 뒤로 넘기며, 첼은 은빛 눈으로 리피에게 윙크를 날렸다. 오른뺨에 찍힌 점이 매력적으로 도드라졌다.
항상 진심을 다하는 첼의 플러팅에 머쓱해 진 건, 이 열차 칸 안에서 클레이오 뿐인 듯 했다.
‘학생 검술 대회라….’
대회 자체는 지난 원고에도 언급이 되었다.
11살의 아서가 3레벨에 오른 무위를 내보였으며, 바로 그래서 다시는 참석하지 않게 된 행사.
알비온에서 검을 수련하는 16세 이전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대회였으니, <최종고>에선 또래로 나이가 조정된 아서의 ‘친위대’가 모두 그곳에서 안면을 익혔어도 이상하지 않다.
‘확인해볼까?’
“첼, 그러면 아서나 이시엘도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았어?”
“그랬지. 이시엘은 원래 유명했어. 아홉 살 때부터 열다섯 살까지 대회에서 매년 우승을 했으니까.”
좌석에서 발을 내린 첼은 상체를 좀 더 클레이오 쪽으로 내밀었다.
기차의 소음 덕에 허스키한 첼의 목소리는 복도에선 안 들릴 것이다.
“하지만 진짜 잊을 수 없는 건 아서 쪽이었어. 열한 살 때 단 한 번 대회장에 섰다가 기권해버린 아서의 검기는 정말로 충격적이었지. 누구라도 그걸 보면… 레오니드 1세의 전설을 떠올렸을 거야.”
‘그건 지난 원고랑 똑같나 보군. 아서가 멀쩡히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슬란이 암살자를 보내오게 된 계기.’
“레오니드 1세라… 엄청난 비유를 그렇게 막 해도 되나.”
“못 할 건 또 뭐야? 불경죄로 걸릴까봐? 아서 역시 리오그난 왕가의 왕자인데?”
클레이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았다. 상대를 떠보거나, 혹은 속엣말을 다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살폈지만 저 빙글거리는 낯은 속내를 수이 읽히도록 허락지 않는다.
“그 후로 자주는 못 봤지. 학교에서 만나서 참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망나니가 돼서?”
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말할까 재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가벼운 어조로 되돌아갔다.
“뭐, 여러 가지. 물론 요즘엔 다 놔버리고 힘 안 숨기더라. 때가 됐다 이거지.”
“숨기나마나 소용없어져서 그런 거 아닌가.”
“그 편이 보기 좋아. 그리고 우리 기수는 유독 두드러지니까, 아서가 좀 튀는 행동을 해도 묻히는 장점이 있지.”
“두드러져?”
“봐, 안젤리움 쌍둥이는 이미 3레벨. 나와 이시엘이 4레벨, 아서는 벌써 5레벨이지. 우리 977기는 황금의 해로 불려. 몰랐어?”
“내가 꼴찌로 문 닫고 들어왔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아하하, 멍청한 소리 좀 그만 해. 단연코 우리 기수의 에이스는 넌데! 미래의 8레벨 마법사 클레이오 경!”
첼은 손을 뻗어 클레이오의 옷깃에 달린 수도방위장 약장을 쿡쿡 찔렀다.
“너까지 그 소리냐.”
“클레이오 경은 상찬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
“야!”
“하하하, 그만 열 내. 가면 재미있을 거야. 요즘 최고로 화제가 되는 티플라움 광산과 임시 연구소도 견학하게 해 준다잖아.”
“그랬어?”
“너 마리아 교수가 말하고 있을 때 졸았구나.”
“내가 체력이 약하잖냐.”
“어휴, 체력 좀 키워. 아무튼, 아직 일반개방 된 적 없는 광산을 견학시켜 주는 건 특혜인데, 멜키오르 왕세자가 특별히 허가를 내줬다더라. 겨울 궁전의 별관도 숙소로 내준다고 하고.”
“왕세자라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을 소풍 따위, 원작에 언급도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건 탄신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일도 안 벌어지고 무사히 지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듀브리스에 멜키오르 왕세자가 시찰 가 있잖아. 공교롭게 우리 필드 트립과 기간이 딱 맞았네? ‘나라의 미래인 수도방위대 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위해 만찬까지 열어주겠다던데?”
‘으으으으. 또 그놈이냐!’
공교롭기는 개뿔이었다.
멜키오르가 하는 일에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안 보고 싶은 작자가 있는 도시로, 특급 열차는 거침없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