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61화 (61/489)

므네모시네의 문 (2)

실로 어마어마한 과업을 앞에 두자, 절로 현실도피 욕구가 돋아났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정진’이 <알비온 왕국의 왕자> 원고를 단행본 출간용으로 편집하게 된다면 인물 소개의 멜키오르 항목엔 반드시 이 내용을 추가할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 그는 어떤 죄악을 저지르더라도 왕이 되고자 한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등장인물에게 원한을 산 저자의 뒤치다꺼리라니. 공전절후의 하드코어 에디팅이다, 정말.’

동종업계에서 종종 전해 듣던 편집자 수난사 중에서도 ‘정진’ 자신이 겪는 게 레전드 아닌가?

술에 꼴은 저자 수발이나, 저자의 변덕으로 찍은 표지 전량을 폐기하는 일 따위완 비견할 게 못 됐다.

‘심지어 퇴직도 못해.’

이런 불공정 용역계약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하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더 많은 돈과 더 맛있는 술이라도 있어야 수지가 맞을 것 같았다.

.

.

.

기숙사 북측 탑 망루에 두 소년과 한 소녀가 사이좋게 붙어 앉아 있었다.

이시엘, 아서, 클레이오였다.

좁은 대신 시야가 탁 트인 장소였다. 뒤편으로는 강 너머 서안 저 멀리가, 앞편으로는 므네모시네의 문이 자리한 숲 한가운데가 내려다보였다.

“여기가 숨겨진 명당이었구만? 아슬란 놈, 지 사람들로 우글우글 많이도 모아 왔네.”

에테르 [강화]로 안력을 돋운 아서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숲의 한복판을 살폈다 ‘므네모시네의 문’ 주변은 평소와 달리 번잡했다.

「지각」을 켠 클레이오 역시 통상적인 경계를 서기 위해 파견된 몇 명의 수도방위대 기사단원들과, 그 두 배에 달하는 크뤼엘 기사단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크뤼엘 기사단원들은, 본래라면 이곳에 출동할 명분이 없는 자들이었다.

아슬란이 멋대로 밀고 들어온 것이었고, 멜키오르는 그 월권행위를 묵인해 주었다.

“아슬란은 평소에도 ‘기억된 세계’에 관심 많았나보지?”

“맞아. 놈이 이상하게 집착하는 것 중 하나가 기억된 세계였지.”

“야 그럼, 저게 열렸으니 너는 좀 내버려두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마수가 나왔던 때 이후론 밤손님이 안 오니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거 있지.”

“잘됐네, 뭘. 던전에 정신이 쏠려서 너 잡는 데 신경 끈 거잖아.”

“아! 그렇지만 거슬려! 저 검은 띠 맨 크뤼엘 기사단원들이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꼴 보기 싫어.”

“보기 싫으면 어쩔 건데.”

“사라져줬으면?”

“그래. 기도라도 해봐. 문에 들어가서 다 사라질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사흘 전 들어간 첫 번째 조사대가 안 나왔는데, 므네모시네의 문에 쓰인 입장 인원 숫자가 다시 떠올랐다고 하더라.”

“뭐? 벌써?”

“그 후 이틀 동안 새 지원자를 모으고 있는데 크뤼엘의 기사들은 너도나도 자원한다잖아.”

「지각」을 끈 뒤, 데운 술을 따르던 클레이오가 손을 삐끗했다. 양철 잔 바깥으로 술이 흘렀다.

“그런데 레이, 방금 너 ‘벌써’라고 했지. 설마 이 ‘기억된 세계’에 대해서도 예측했던 거냐?”

지난 원고와 달라진 점에 놀라자 아서는 금세 사정을 눈치 챘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 동료를 얻었는지 새삼 감탄할 마음이 생겼냐?”

아서와 이시엘은 아연한 눈으로 클레이오를 쳐다봤다. 클레이오는 본전도 못 건질 흰소리에 후회하며 화제를 돌렸다.

“농담인데 왜 정색들을 해. 말했잖아. 내 ‘예측’은 불완전해. 이번에도 틀렸지. 나는 저 ‘기억된 세계’의 리셋 주기가 좀 더 길 줄 알았어.”

지난 원고에서 묘사된 첫 번째 ‘기억된 세계’의 리셋 주기는 사흘이었다.

난이도 조절을 생각해도, 첫 던전을 클리어하는 주인공을 배려해서도 그 정도가 적절해 보였다.

‘던전 안과 밖은 시간의 흐름이 달라. 안에서 사흘이면 밖에선 일주일이 흐르던데. 역으로 계산할 때, 밖에서 사흘이면 안에선 고작 하루 정도인가? 왜 이렇게 시간을 짧게 고쳐놨지? 난이도 조절이라도 했나?’

아서가 다시 물었다.

“네 ‘예측’이 그렇게 알려줘?”

“그래, 그런 기분이 든다.”

털실 주머니로 감싼 술병을 클레이오의 손에서 건네받은 아서는 자신도 찌그러진 양철 잔에 술을 한 잔 따랐다.

향신료를 넣고 끓인 시드르의 사과 향이 차가운 가을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들어간 기사들은 어떻게 된 걸까?”

자신 몫의 장미차를 마시던 이시엘이 말을 받았다.

“죽었겠지요.”

냉정한 단언은 사실이었다.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의 학생이라면 입학과 동시에 배우는 내용이었다.

클레이오는 1학기 초반 역사 수업을 모두 빠져서, 므네모시네의 문에 관해선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로 익혔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은 지난 원고와 대동소이했다.

모든 ‘기억된 세계’는 세계의 한복판에 시간적 동시성을 유지시키는 ‘마스터 클락’을 가졌다.

‘마스터 클락’을 제한시간 내에 멈추지 못하면 시계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던전 내부는 리셋된다.

던전 안에는 위험한 마수들이 도사리고 있다. 방비를 한다 한들 위험하지 않을 리 없었다.

‘뭣보다, 이번 던전은 보상이 변변치가 않아. 고작 옷가지라, 지난 원고에서도 아서가 무슨 귀족한테 팔아버렸지. 그런 거 얻자고 굳이 주인공이 나설 필요 있겠어? 아슬란 병력이나 깎아먹게 놔두지.’

“아서, 혹시라도 문에 들어간답시고 나대면 안 된다?”

“나댄다니, 뭔…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인간은 레이 너밖에 없어.”

본인의 생명이 세계와 직결된 인간은 또 태평한 소리를 해 댔다.

적잖이,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있고 배짱도 두둑한 왕자니까.

덕분에 클레이오의 시름만 깊어졌다.

‘휴-, 세계멸망 얘길 다짜고짜 해줄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아서, 너 에테르 레벨 몇이야. 그 사이에 바뀐 거라도 있어?”

클레이오 자신이야 ‘약속’ 덕에 메시지를 읽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에테르 감응자라도 본인은 레벨 상승을 자각할 수 있다고 들었다.

“아직 5레벨인데.”

“그럼 진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된 세계’ 들어가겠다고 나서면 안 돼.”

“너 또 뭘 아는 거지?”

“이거 하난 확실해. 저 안에선 [진격의 원]이 반드시 필요할 일이 생겨. 최소한 레벨 6은 돼야 한단 거지. 또 방패로 쓸 마석도 가져가는 편이 좋아.”

“그렇담 레이 네가 도와주면 되지 않아? 네 마법, 그 굉장한 창은 [진격의 원] 따위완 댈 것도 아니던데. 방어 마법은 말할 것도 없고.”

아서의 개소리에 클레이오는 눈을 세모지게 떴다.

“장난 치냐? 내가 왜 문엘 들어가.”

“그 안에는 사나운 마수들과 함께 희귀한 마석과 귀중한 마도구가 지천으로 널렸다잖아.”

“염병. 보상 따위 얻자고 목숨 걸 생각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마. 넌 그런 거엔 관심 없잖아. 검술 수련이나 해.”

“그렇지만 마수들과 싸워 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사실은 자기도 바르그와 겨뤄보고 싶었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는 아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시엘, 들었지? 저 철딱서니 없는 네 주군이 객기 안 부리게 잘 협조해 줘야 해.”

“아서 님은 경거망동하는 분이 아니시다. 괜한 소리 하지 마라.”

“아무튼, 이번 던전은 방어막이랑 광역기가 꼭 필요한 곳인 거구나. 초급 기사만 밀어 넣고 있는 거 보면 아슬란은 모르나보네. 갖은 수를 써서 고문서를 긁어모으더니 성흔 하나만도 못하군!”

“고문서?”

“다 썩어가는 종잇장들이 가끔 유적지 같은 데서 발견돼. 거기는 우리 학교에서도 안 배우는 ‘므네모시네의 문’ 너머 ‘기억된 세계’에 대한 지식들이 적혀 있다고 해. 뭐 난 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내 형제분은 그걸 죽자살자 찾으러 다니거든.”

클레이오는 아까운 술을 흘리지 않기 위해 양철 잔을 꽉 붙잡았다.

‘멜키오르가 고유 스킬로 염병 떠는 걸로 부족해서, 아슬란은 던전에 집착하나….’

골 때리는 일이었다.

분명 ‘기억된 세계’에서 얻을 보물들이 왕위로의 길을 깔아준다는 사실을 알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본래라면 명분도, 던전의 전리품도 아서가 가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주인공 손에 돌려줄 수 있을지.

‘아냐. 지금은 나서봐야 좋을 게 없어. 때를 기다리자.’

어쨌거나, 이 세상은 아서를 위해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아서, ‘기억된 세계’에 대해 기록한 고문서가 흔하게 있나? 나는 금시초문인 이야긴데.”

“흔하면 아슬란이 그렇게 안달을 낼 필요가 없겠지. 돈도 수하도 넘치게 많은 놈이니.”

“흠.”

“이건 비밀인데, 힐레이다에게 듣기로 국왕 서고에도 그런 괴이쩍은 고문서나 금지된 마법서가 잔뜩 있대. 거긴 국왕이 인가한 사람 밖에 출입할 수가 없어서 나야 진위는 모르지만.”

“아슬란은 충분히 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아?”

“지금 아버지가 정신이 없잖아. 그럼 국왕 대리가 인가를 해줘야 하는데, 내 큰형님이 둘째 좋을 일을 왜 해주겠어.”

“그게 그렇게 되는군….”

국왕 서고. 일단은 기억해 두었다.

‘다 썩어가는 종잇장’이란 말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팔림프세스트’의 존재를 아는 클레이오로선 가볍게 들어 넘기기 힘든 요소였다.

왕국의 나머지 두 왕자들만 생각해도 골이 아픈데, 수상쩍은 요소가 추가되니 이마가 지끈지끈 당겼다. 클레이오는 식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수족냉증이 도움 될 때도 있네. 머리 식힐 때.’

그리고는 술을 찾았다.

“아서, 그거 다 마셨냐?”

“처음부터 한 컵 반 밖에 안 들었더만. 못 돌려줘.”

얕게 찰랑이는 물통을 아서가 얄밉게 흔들어 보였다.

“야! 원래 내가 가져온 건데….”

“준 거 다시 뺏으려고? 야박하게.”

어차피 순발력이나 힘으로는 물통을 못 빼앗는다. 서클을 펼치면 기껏 숨어서 아랠 지켜보던 일이 덧없어지니, 마법을 안 쓸 걸 알고서 아서가 클레이오를 곯려댔다.

거기에 이시엘이 가세했다.

“그래. 그만 마셔라 클레이오. 너는 술이 과하다.”

“데운 시드르가 무슨 술이야.”

“시드르에 더 센 술 향이 섞여 있더군. 네가 섞은 거 아닌가? 한 잔 마셨으면 몸도 데워졌을 터. 애초에 추위를 그만치 타는 게 문제다.”

이시엘은 조금 풀려 있던 클레이오의 머플러를 콱 싸맸다. 상당히 과격한 손길이었다.

“에테르로 몸을 [강화]할 수 있는 너희랑 내가 같냐. 난 마법사라고!”

에테르를 신체 내부로 운용하는 검사들은 처음부터 추위가 몸을 침투하지 못하도록 신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

마법사의 경우엔 마법으로 불을 피워 몸을 데울 수는 있지만 기사들과 같은 일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지혈이나 치료도 마찬가지라,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도 자신의 상처는 치료하지 못 했다.

즉, 신체 내부로 에테르를 작용시키는 그 어떤 기술도 마법사는 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기사들은 마법사들을 모두 백면서생들로 볼 수밖에.

“마법사 치고도 너는 너무 골골해. 엊그제 제 발로 걷지도 못해서 남의 신세를 져 놓고는 술이 입으로 들어가?”

“그건….”

이제 이시엘은 아예 클레이오를 찬바람만 쐬어도 아픈 약골로 확정짓고 있었다.

먼저 티플라움 마법식 문제 해결이 있었고, 주요 원인은 멜키오르고, ‘깃발’ 분들까지 대활약하며 HP를 뭉텅이로 깎아간 걸 설명할 수 없어 클레이오는 입술만 달싹였다.

클레이오의 답답함을 뻔히 알면서도 아서는 히죽대며 놀림에 동참했다.

“지금 이시엘은 레이 널 걱정해 주는 거야. 내가 교수님과 같이 먼저 학교로 달려오는 동안, 뒤에 남은 이시엘이 널 옮겨주기까지 했잖아.”

“그래, 그러니 남은 것도 그만 마셔라.”

이시엘은 클레이오의 잔을 낚아채려는 듯 세게 움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탈푸닥 착―

소년들과 소녀 사이로 새카만 고양이가, 그 큰 몸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몸짓으로 착지했다.

“먘?! (술?!)”

베헤못은 술 앞에서만 보이는 귀엽고 갸륵한 몸짓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이시엘은 그렇잖아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떴다. 좀처럼 표정을 흩트리지 않는 그녀에겐 드문 일이었다.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나 봐.’

손이 움칫거리는 걸 보니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기척이 흐트러진 틈을 타 재빨리 잔을 빼냈는데, 클레이오의 팔에 앞발을 착 얹은 베헤못이 기껏 사수한 잔 가장자리를 날름날름 핥아버렸다.

“에오오오오오웅(데운 시드르에 칼바도스를 탈 줄도 알고 너도 이제 기본은 갖추게 되었구나).”

이내 클레이오 몫을 다 마신 고양이는 펄떡대며 술이 든 물병을 빼앗으려 아서에게 치대기 시작했다.

“웨오오오오오옼(자아 척후를 다녀왔으니 내게도 그 술 한 잔 더 내놓거라).”

사람 말이 아니라도 술꾼끼리는 통하는 것일까?

아서는 바닥에 놓인 잔에 술을 반쯤 따른 뒤 일단은 고양이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클레이오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 고양이, 술 마셔도 되니까 달라고 하는 거겠지? 방금도 잔뜩 마셨고.”

“그래… 안 줄 수도 없을 거다.”

“먀아아아앜! 먀아아아앜! (고작 몇 방울 따라놓고! 이게 마시라는 거냐, 마라는 거냐!)”

방방 날뛰던 베헤못은 남은 술을 모조리 독차지하고서야 잠잠해졌다. 충분히 술을 마신 베헤못은 기분이 좋아져 클레이오의 무릎에 착- 달라붙었다.

따끈따끈한 베헤못을 쓰다듬으며 클레이오는 당부를 멈추지 않았다.

“아슬란의 후원 하에 크뤼엘 기사단의 기사들은 도전을 계속하도록 놔두고, 아서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수련을 해라.”

“맨날 늦잠 자는 너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말했잖아, 나는 마법사고 너는 검사인데 어떻게 취급이 같냐?”

***

‘기억된 세계’로의 문이 열린 후 엿새째.

사흘 전 들여보낸 두 번째 조사단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새벽, 다시금 문 위로 입장인원을 표시하는 숫자가 떠올랐다고 베헤못이 알려주었다.

문의 색이 여전히 푸르니 진입하는 대신 상태를 살피자는 수도방위대 기사단 측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슬란 왕자는 다시금 크뤼엘 기사단의 단원들로 세 번째 조사단을 조직했다.

사흘에 한 번씩 네 명씩 짝지은 기사 혹은 병사들이 문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문이 열린 후 아흐레째의 밤이 깊었다.

이 날 아침 밝혀졌듯 세 번째 조사단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누워있는 클레이오의 팔을 꾹꾹 누르며 베헤못이 웅냥거렸다.

“문의 색이 아직은 안정적이라 수도방위대 기사단은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는데… 2왕자는 애가 닳아서, 곧바로 다음 수색대를 조직하려 한다.”

“놈은 뭐가 그렇게 마음이 급해서.”

“크뤼엘 기사단에서도 의욕 넘치는 젊은 자들이 수도로 왔다 보니 다들 공을 세우려 혈안이 되어 있어. 당장 마수들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도 아닌데 2왕자는 뭐 하러 그리 기사들에게 바람을 불어넣는지.”

“그럼 당분간은 학생들이 나설 필요까진 없겠군?”

“수도방위대 기사단이 너희보다 먼저이다. 문이 아직 푸른데, 뭣하러 아이들의 힘까지 빌릴까. 걱정 않아도 될 듯하다.”

“다행이네. 솔직히 아슬란이 자진해서 자기 세력을 줄여준다니 고마울 노릇이고.”

사람이 죽는 일은 무섭다.

하지만 검을 수련한 기사들이 자진해서 모험에 뛰어들고 그 결과로 죽음에 이르는 것까지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클레이오의 태도는 일관됐다.

‘내 알 바 아님.’

아서와 이시엘의 반응도 비슷했다. 지금 당장은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몸을 사리는 게 당연했다.

불을 끈 뒤 기특한 뚱묘를 끌어안고 이불 안으로 파고든 때였다. 다급하게 침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밤에 문도 아닌 곳으로 들어올 놈이라면 한 명 밖에 몰랐다.

무시하고 자려던 클레이오의 뒤통수를 잡아채듯, 이시엘의 작은 목소리가 창을 넘어왔다.

“일어나라, 클레이오.”

“아니 이시엘, 왜 여기로….”

창을 열어주자, 찬바람과 함께 들쳐 들어온 이시엘은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자정 이후 남학생 기숙사에 들어오려면 사감 선생님을 깨워야 한다. 지금 그럴 틈이 없다.”

FM인간인 이시엘이 교칙도 어기고 기숙사 타고 오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데.”

“아서 님께서 ‘므네모시네의 문’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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