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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63화 (63/489)

므네모시네의 문 (4)

‘이건 또 뭐야, 시발.’

또 느닷없는 설정 추가에 화낼 틈도 없었다. 때맞추어 역할을 다한 차폐 마법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도록 하자. 일단은 아슬란을 먼저 설득해야겠지.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레이! 믿어! 잘 해결하고 와.”

막사를 나서려던 클레이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흰… 문 안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은 거냐?”

이시엘은 아서 가는 데 따라가는 게 뭐가 문제냐는 듯 미동도 없었고, 첼은 또 깔깔 웃어댔다.

“위험 없이 뭘 이룰 수 있겠어. 우린 너보다 훨씬 일찍 마음을 정했으니, 크뤼엘의 기사들이나 안 끌고 들어가게 잘 결판을 내 봐. 안 그러면 내가 나서서 귀족의 친분이라도 들먹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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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방위대 기사단 소속 평기사인 스웨인 템플은 숨도 눈치를 보며 쉬고 있었다.

므네모시네의 문 옆에 쳐놓은 막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 막사 안에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오늘 밤 야간 경비 담당인 스웨인, 아슬란 왕자, 그리고 크뤼엘 공작까지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눈앞이 아득해질밖에.

아서와 아슬란이 한바탕 하는 걸 가까이서 보고 나니 기사인 그로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 형제를 사지로 밀어 넣으려는 아슬란 왕자나,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도발하는 아서 왕자나… 아주 서로를 원수 보듯 하네.’

그 때 무거운 공기가 일순 흔들렸다.

막사의 입구를 떨치고 들어온 자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스웨인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클레이오 아세르였다.

“클레이오 경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스웨인 경.”

키만 자랐지 작대기처럼 비쩍 곯은 아세르 집안의 차남은 이 냉랭한 긴장감이 가득 찬 막사를 가르고 지나가면서도 하나도 긴장되거나 위축된 기색이 없어 감탄스러웠다.

‘아직 어린 소년인데, 이럴 땐 정말 기사들 같은 기세가 있구나.’

스웨인은 얕게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과 같을 게 뭔가, 클레이오는 정식으로 위(位)를 가진 기사이다. 그는 실로 고명한 마법사가 아닌가. 스웨인은 두 머리 괴수 바르그의 최후에 대해 떠올렸다.

“이 밤에 번을 서는 건 스웨인 경이로군요. 변고로 고생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 문을 지키고만 있을 뿐, 전투에 임한 것도 아니고….”

막사의 상석에 앉은 아슬란을 흘끔 쳐다본 스웨인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다고 좁은 막사에서 들리지 않을 것도 아니지만, 당장 눈앞에서 살기를 피우고 있는 2왕자의 심기를 살핀 행동이었다. 2왕자의 냉혹한 성정은 기사단원들에게도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인이 요 며칠간 보아온 바 소문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왕세자 저하께서는 문의 빛깔이 붉어지기 전에는,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진입을 불허하셨습니다. 저희는 이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무익한 희생을 막으려는 거지요. 옳은 선택입니다.”

“클라겐 단장님 역시 같은 의견이지만 저희 평기사들의 뜻은 달랐습니다. 허나 허가 없이 단독행동 할 수 없기에….”

“기사단에 적을 가진 기사로서 왕세자 저하의 지엄한 명령은 어길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덤덤히 말한 클레이오는 스웨인을 지나쳐 아슬란 앞에 섰다.

소년의 태도가 하도 당당하고 무렴하여 크뤼엘 공작조차 소년을 제때 만류하지를 못했다.

공작이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아슬란이 먼저 눈짓을 했다. 클레이오를 상대하겠다는 뜻이었다.

클레이오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아슬란을 살폈다. 여름의 탄신연에서 지나쳐는 갔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눈과 머리는 빛도 다 집어 먹을 만치 막막하게 어두웠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이야 원래 세상에선 흔해빠졌었지만, 이쪽 세상 사람이 두른 검은 빛은 아주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슬란의 날카로운 시선이 클레이오가 보란 듯, 코트 깃에 달아놓은 수도방위장 약장 위에 머물렀다.

눈빛에 온도가 있다면 금틀에 끼운 실크 리본 따위 진즉에 불붙어버렸을 것이다.

이쪽 세상의 예의에 대해 대충은 아는 클레이오였지만, 의도적으로 아슬란의 눈을 피하지 않고서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이 자는 언젠가 반드시 부딪쳐야 할 상대이고, 아서의 곁에 선 이상 이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선행된 숙명에 의한 것일진 모르지만, 아슬란의 표정은 확실히 악의에 물들어 있었다.

클레이오는 오히려 더더욱 침착해졌다.

저렇게 대놓고 사람을 적대하는 인물은, 위협적이긴 해도 공포스럽진 않았다.

물론 지금도 7레벨 검사이고 훗날엔 더한 무력을 얻게 될 기사이지만, 멜키오르에 비하자면 인간적인 악역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긴. 어지간한 인간 중에서 왕세자보다 무서운 작자가 흔하겠어. 아슬란이야 지금은 때가 나빠서 저렇게 위세를 부리는 거고. 몇 년 만 지나봐라, 어떻게 되나.’

소년의 창백한 얼굴에 걸린, 설핏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인식한 아슬란은 어렴풋하게 노기를 띠웠다.

저 비실비실한 소년이 자신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대가 클레이오 경이로군.”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사정이 마땅치 않으나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슬란 전하.”

“그래서, 용건은 뭔가? 저 말 옮기기 좋아하는 계집애가 조르르 갖다 이른 소릴 듣고 이 밤에 왕자의 막사로 경박히 들이닥친 이유라면, 가벼운 화제는 아닐 터.”

클레이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스물다섯 살 먹은 게 말투는 왜 또 사극톤이야. 저번부터 생각한 거지만 혼자만 이렇게 장르가 달라서 어쩌냐.’

막사 밖을 지키고 선 이시엘이 ‘말 옮기기 좋아하는 계집애’ 소리에 살기를 피웠다 간신히 흩는 기색이 느껴졌다.

「지각」을 켠 클레이오는 막사 안에 둘러 선 사람들의 숨결, 시선, 에테르의 기세를 손금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친 절체절명의 상황이기는 했지만, 예리한 지각을 지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상대보다 한 수 위를 볼 수 있단 뜻이니까.

“앞뒤사정을 알고 계신듯하니 짧게 말씀 올리겠습니다. 므네모시네의 문으로 들어가는 다음 조사단에 제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요청드립니다. 저 역시 위를 가진 기사이니 아서 전하를 수행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므네모시네의 문을 감독하는 전권은 수도방위대 기사단에 있었다. 그러니 수도방위대 학교의 학생인 클레이오가 이것을 아슬란에게 요청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뤼엘 공작이 아슬란과 설치고 다니는데도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이 놔두는 걸 보면, 문이 열린 후 공작과 수도방위대 기사단장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단 거지.’

스웨인의 말을 들어보면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평기사들 역시, 천 년 만에 열린 전설의 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았다.

검을 익힌 기사라면 응당 모험에 뛰어들고 싶어 할밖에. 그러나 웬일로 뜻이 맞은 수도방위대 기사단장과 멜키오르가 그들을 잡아 붙들어 놓은 것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수도로 귀환한 멜키오르는, 부러 수도방위대 기사단을 뒷선으로 물렸다. 본래라면 가장 먼저 문에 진입했을 수도방위대 기사단 대신 크뤼엘 기사단이 밀고 들어올 틈을 열어준 것이다.

지금 여기에 없어도 그의 그림자는 어디에나 드리워져 있었다. 지독한 작자였다.

‘멜키오르는 아슬란과 아서를 붙여 두면 이런 일이 생길 걸 안 거지. 제 동생들이 서로를 물어뜯기를 바라며 판을 깐 거야.’

“그래. 내 동생의 무위도 대단하지만, 동기인 경의 마법은 성취가 더더욱 뛰어나다 들었다. 왕세자 저하와도 돈독한 사이라지.”

“멜키오르 님께서 그저 작은 재주에 관용을 베푸신 바이지요. 제가 걸치기엔 과분한 예복과, 저희 동기를 모두 먹이고 남을 먹을거리는 세자 저하의 정이 깊으신 성정 덕에 얻은 것이지, 제가 무엇이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니글니글한 기분이 들었지만 클레이오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멜키오르에게 금칠을 했다.

‘이건 업무미팅이다, 업무미팅. 일로는 무슨 말을 못 할까.’

셀프 마인드 컨트롤이 잘 먹혀든 클레이오와 달리, 아슬란의 표정은 더더욱 사나워졌다.

2왕자인 자신 앞에서 대놓고 1왕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꼴이니 그럴 만도 했다.

계획대로였다.

‘아서에게 열폭하는 놈이니 멜키오르라고 안 미워할 리 없지. 끓는점이 낮구만.’

“큰형님이 어디 다감한 정만으로 남을 대하는 분이시던가. 인재를 후히 쳐주는 분이 틈만 나면 경을 언급하고, 저기 수도방위대의 기사조차도 경의 마법에 대해 찬사에 찬사를 거듭하더군.”

“말이 거리를 돌아 옷을 덧입은 것일 뿐, 저는 그저 한 명의 마법사에 불과합니다. 자격이 모자라지는 않다는 뜻이었지, 능력을 과장하여 자랑할 마음은 없습니다.”

말투만 존대이지 한 마디도 안 지는 클레이오의 대거리에 크뤼엘 공작의 이마에 혈관이 불끈 치솟았다.

‘저 어린 것이 왕세자를 등에 업고 기어오르는구나.’하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나와 멜키오르가 손잡았다고 오해해주면 더 좋지.’

나서려던 공작을 한 손을 저어 물린 아슬란이 성큼 다가와 클레이오를 상대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아슬란 역시 리오그난 왕가의 왕자답게 몹시 키가 커서, 아직 덜 자란 클레이오 정도는 손쉽게 해칠 수 있을 것 같은 위협이었다.

클레이오는 지체 없이 「이격」을 켜 방비했기에 안색조차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위협이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2왕자는, 씹어 뱉듯 대답을 내놓았다.

“경의 뜻이 그러하다니 동기의 정도 있을 테고 함께 공을 세울 기회를 내려주도록 하지.”

‘공을 세울 기회 좋아하시네.’

“크신 은혜에 감읍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된 바, 항상 같이 훈련해온 동기들과 함께 나서 봐도 되겠습니까?”

“동기라니.”

“저희 수도방위대 학교 학생은 모두 문 너머의 위협으로부터 수도를 지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처럼의 기회인데 어떻게 저 혼자 독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경과 아서 말고도 문에 들어가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누구지?”

“말한다한들 전하께서 일개 학생들의 성명을 하나하나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물었다. 대답하도록.”

‘와, 이 자식 왕세자도 안 그러는데 무지 고압적으로 나오네.’

“키시온 자작가의 영애와 탕페트 드 네쥬 가문의 장녀가 검에 빼어납니다. 함께한다면 힘이 될 것입니다.”

“황금의 해라는 977기라더니. 하, 그래 허락하지. 뜻대로 해 보도록.”

977기는 황금의 해.

좋은 마음으로 들먹인 별칭은 아닐 것이다. 수도방위대 학교의 학생이 뛰어나봤자 아슬란에겐 득이 될 게 없었다.

인재들이 아서의 측근이 된다 해도 위협이고, 졸업해 수도방위대 기사단 소속이 된다 해도 언젠간 멜키오르의 전력이 된다.

‘아서가 죽는 김에 같이 죽어도 나쁠 것 없다는 거겠지.’

제베디만이 사색이 되어 두 사람을 말리려 들었지만 크뤼엘 공작이 제베디를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당장 왕자를 만류할 수 있는 사람 중, 아서와 친구들이 죽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선량한 교육자인 제베디뿐일 것이다.

“전하의 너그러운 배려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반드시 ‘기억된 세계’를 파훼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너의 기사들이 못한 일을 내가 해내고 오지.’라고 말해주자, 아슬란은 화를 내는 것도 가당찮은 듯 비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그러고는 몇 초간, 생전 처음 맞닥뜨리는 기괴한 것을 대하듯 클레이오를 뜯어보던 아슬란이 턱짓으로 소년을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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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가 아슬란을 말리긴커녕 박박 긁어놓은 걸 보고, 막사를 따라 나온 제베디는 머리를 짚었다. 이미 막사 앞에 아서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기가 막혀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퇴학시킨단 위협도 해 봤고, 교수의 권한으로 명령도 내려 봤지만 기사, 왕자, 귀족 자녀들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이 고얀 놈들, 거기가 어디라고 죽을 자리를 찾아 기어들어가는 거냐!”

“저흰 돌아올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천 년만의 개방이라 가벼이 여기는 모양인데, 이미 정식 기사 여러 명이 실패한 일이다.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기억된 세계’로 진입하면 모두가 물속에 내던져지게 되는데 옛 전승에선 어이없게도 수영을 못 해서 죽은 이도 있단 말이다! 뭐가 위협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거늘!”

“교수님 진정하세요. 저흰 모두 수영 잘 해요. 그렇지 클레이오?”

절대 ‘잘’은 아니고, 해군 복무한 게 무색할 수준이었지만 클레이오는 첼에게 장단을 맞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서와 이시엘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수영으로 강과 해협도 건널 애들이고.

“내가 너희를 말려야 하는데. 참으로 말세다. 정 가야겠다면 내 막사에 있는 물과 식량, 상비약이 든 가방들을 챙겨라. 수작을 부리거나 독을 묻히지 않은 짐이다.”

클레이오는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아슬란이 챙겨 놓은 짐은 미덥지 않아 새로이 짐을 꾸리려던 차였다.

제베디 역시 수십 년간 학교를 운영해온 학장이다. 아슬란과 아서 사이의 역학을 모르면서 아서를 입학생으로 받진 않았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왕 이렇게 된 거 방어막을 만들 수 있는 마도구는 없습니까? 저는 괜찮지만 다른 아이들이 걱정되어….”

“에이그, 쯧. 이 오지랖 넓은 녀석. 기다려 봐라.”

방어구를 챙겨주겠다고 제베디가 연구실로 사라진 새 클레이오, 아서, 이시엘, 첼과 쌍둥이들은 주인 없는 막사에 모였다.

클레이오는 다시금 마법으로 차폐막을 쳤다.

“꼴 보아하니 너희 모두 내 성흔에 대해선 알고 있는 거지?”

“우리 의리 있는 주군께서 끝까지 말 안 해주려고 했지만, 앞뒤 정황을 생각해보면 답이 하나잖아.”

“예언을 증명 받았다고 그렇게 기뻐하는데 모를 수가 없지.”

어차피 디오네 역시 똑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일관성 있게 하는 게 나았다.

“맞아. 내게는 ‘예측’의 성흔이 있고 다가올 미래의 일부를 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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