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정원 (2)
‘야아, 대박이네!’
‘해굽성의 참’은 사방이 포위된 상태에서 검으로 활로를 뚫은 검사에게 주어지는 공용 스킬이었다. 불굴의 용기를 상징하는 기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싸운 이에게 주어진다는 스킬로, 불굴의 용기를 상징하는 기술이었다.
‘주인공은 주인공이야. 뭐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고, 에테르 레벨이 모자라도 얻어야 할 건 귀신같이 잡아챈다.’
철그럭―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은 아서가 척척 다가왔다.
전투는 혼자 다 했는데, 옷깃이 찢어지고 머리가 흐트러진 것 말고 다친 덴 없어 보였다.
“방금 말이야, 마수들에게 까맣게 감싸여 있을 때 칼을 확 내리그으니까 뭐가 번쩍 하면서 메시지가 뜨는데!”
“뭐, 공용 스킬이라도 발현 됐냐?”
“으아! 귀신같네! 맞아! 해굽성의 참이 생겼어!”
“앞으론 암살자들한테 팔다리 붙잡혀도 빠져나올 길이 있겠구나. 잘 됐네.”
아서는 펄펄 날뛰며 좋아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의 기쁨을 받아주기에 클레이오는 너무 힘들고 지쳐있었다.
“첫 관문을 벌써 깼으니 시간은 조급하지 않을 거야. 좀 쉬자.”
“그래, 너는 정말 쉬어야겠다.”
개인적인 성취의 기쁨은 살짝 접어 놓고서 아서는 이내 클레이오의 상태를 살폈다. 정말로 열일곱 살답지 않게 침착한 놈이었다.
‘원래 집중력이나 친절함도 체력에서 나오는 거지.’
얄미웠지만 저 놈이 강골이고 이 몸이 쓰레기인 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기에, 「지각」을 끈 클레이오는 그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관문의 마수를 처치했으니 지금 당장은, 마수의 사정권에서 안전할 것이다.
클레이오 옆에 대충 구겨 앉은 아서는 온전히 제 힘으로 얻은 마석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굴려보는 참이었다.
[관목의 호박
:보존의 마석.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넣어 굳힐 수 있다.]
“와! 신기하네, 허공에 이름이 떠. 관목의 호박? 내가 뭐 이걸 어떻게 가공할 수도 없고, 다른 보석과 차이도 모르겠는데… 보존은 어떻게 한다는 거지?”
“봐봐.”
클레이오는 아서의 손 위에 놓인, 아기 주먹만 한 호박을 살폈다. 집에 있던 『마석 일람』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기억」 능력 있으니 참 좋네.’
“이건 [각인] 마법식을 쓰면 돼. 그렇게 하면 안에다 무엇이든 보존시킬 수 있어. 넣은 걸 꺼낼 땐 [복원]식을 쓰면 되고.”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아서의 소년다운 얼굴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내가 알비온 최고의 상사를 소유한 집안 아들인 거 잊었냐?”
“어이쿠, 내가 정말 대단한 분을 동료로 삼았네.”
“알았으면 더 극진히 모시도록.”
그리고는 한동안 투닥거리다 말이 끊겼다. 밤을 새고, 물에 젖고, 전투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던전 안에선 생각만 하면 제한 시간 글자를 띄울 수 있을 뿐, 밤과 낮의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공백 사이에 뜬 거대한 정원의 상공에는 달에 먹힌 해와 같은 형상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진짜 항성도 위성도 아니겠지만.
‘이곳은 한때 존재했던 세계를 응집시켜놓은 인위적인 공간일 뿐이랬지.’
시험 삼아 시간에 대해 생각하니 다시 금빛 글자가 떠올랐다. 시간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
22:02:51 / 24:00:00]
‘아무 정보도 없이 들어왔다면 이 넓은 정원을 뒤져서 ‘마스터 클락’을 수색했어야 하니까, 하루가 뭐야 일주일도 빠듯했겠지. 왜 이렇게 시간이 줄어들었담?’
이 던전은 첫 던전인데도 공략포인트인 ‘마스터 클락’이 특이한 형태였다.
아마도 바로 클리어하고 나가지 말고, 이 공간에 익숙해지라는 설계 같았다.
지난 원고에선, 날고 기던 열아홉 살의 아서와 이시엘도 온 정원을 다 뒤집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시간도 넉넉했고.
‘이번 원고는 달라. 공략법을 모르고선 ‘마스터 클락’만 찾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시간을 의식하고 있으니, 눈앞의 시계는 꺼지지 않고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이게 참 기묘했다.
던전의 공지 메시지는 ‘약속’의 메시지와 형식과 기능이 완전히 동일했다.
‘문 밖에선 나에게만 이런 게 보이는 것 같지만, 문 안으로 오면 모두에게 이 글자들이 보인다는 거잖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내게는 문 밖 역시 이세계이기 때문일까?’
클레이오는 습관처럼 왼손 검지 위 ‘약속’의 매끄러운 표면을 문질렀다.
그때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서가 중얼거렸다. 클레이오 역시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달이 움직이지 않고 별자리가 없다니. 이제야 정말 이세계로 넘어왔다는 실감이 난다.”
달에게 가리워 가장자리만 주황색으로 빛나는 해 이외에, 원형의 하늘에는 그 어떤 별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얌마 나는 이미 저쪽이 이세계야.’란 말을 할 수가 없기에 클레이오는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하품이 연신 나왔다.
“역시 눈 좀 붙이고 갈래?”
“그래야겠다. 넌?”
“난 사흘 정돈 안 자도 돼.”
“5레벨인 지금 그 수준이니 소드 마스터가 되면 한 달은 안 자도 되겠다. 그럼 2시간만 잘 테니까 경계 좀 서 줘.”
“그래. 봐라, 이게 극진하게 모시는 거잖아.”
“아, 좀.”
클레이오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슬라이드를 밀 듯 꾸물럭 모로 누웠다. 짐을 넣은 가방을 베개 대신 베고, 코트 깃을 여미니 그럭저럭 잘만 했다.
가물가물 잠이 들려는데 아서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레이 너, 아슬란 앞에선 나한테 전하라고 했다며.”
“그래… 그런 말 들으니까 좋냐?”
“음. 생각보다 별로.”
“그렇지? 나중에 왕이 되면 폐하라곤 불러줄 테니 그때까진 경칭 같은 건 때려 쳐.”
소리죽여 웃던 아서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정작 들어와 보니 여기도 묘하게 낯익어. 일식이 일어나 있으니 대관식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네.”
“대관식 본 적도 없잖아.”
“몇 년 안엔 보게 되겠지. 아버지는 이미 오늘내일 하고 있는걸.”
확실히 필리프 왕은 머잖아 죽는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상상하던 죽음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말을 해 줘야 하나? 하지만 한다고 믿겠나… 뭘 바꿀 수 있길 하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부친의 사망 자체는 아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망설이다보니, 졸음에 밀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아서는 저 혼자 말을 이어갔다.
“네가 아슬란 놈이랑 대거리 하는 동안 애들이랑 정했는데, 이번에 얻을 마석은 다 네게 줄게. 나야 검사라 가져 봐야 소용도 없고. 마법사에게 더 큰 쓰임이 있겠지.”
“네가 오늘 한 모든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다.”
무거운 눈꺼풀을 꿈뻑이면서도 뭐 준단 소리엔 재빠르게 반응하는 클레이오였다.
“너는 내게 목숨을 걸 이유가 없는데도 함께해주니까 이런 걸로라도 보답해야겠지.”
‘목숨을 걸 이유라….’
이시엘과 쌍둥이들은 가문을 물려받기 위해, 첼은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아서를 지지했다. 하지만 클레이오에게는 그런 종류의 동기가 없었다.
‘대신 저자의 강제력이 있지.’
어쩌면 아서는 영영 알지 못할 목적이다. 이 이야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만 하는 의무.
그러기 위해선 먼저 파악해야 할 게 있었다.
어쩐지 아서가 드물게 감상에 젖은 것 같으니 지금이 때가 좋았다.
“네 어머니 예언 말야, 또 기억나는 건 뭐가 있어?”
“…그때 레이 네가 그랬지. 이 세상은 날 위해 돌고 있다고. 좀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네 예언이겠지?”
“음.”
“어머니도 비슷한 얘길 몇 번이고 했었지. ‘이 모든 고난은 영광을 위한 몫이며, 세상은 너를 위해 움직이리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너덜너덜한 원고를 사방에서 잡아 찢는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클레이오는 위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그걸 믿지는 않았어. 일찍 어머니를 잃은 어린애가 위안으로 삼기 딱 좋은 구결이기는 했지. 나는 특별하고, 내 고통에는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아서의 냉철한 자기인식에 칭찬을 해 줘야 할지, 이 세상은 그런 객관적 법칙 하에 정립된 곳이 아니라고 한탄해야할지 모를 클레이오였다.
“어머닌 말이지, 내가 왕이 되고자 한다면 고강한 마법을 지닌 동세대의 마법사를 얻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어.”
“그걸 믿었어?”
“안 믿었지. 제베디 교수 이후 대단한 마법사란 건 태어나지 않았어… 네가 나타날 때까지.”
“…어머님께서 대단하신 분이셨네.”
‘멜키오르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얘 어머니는 또 뭐냐고.’
“너무 대단하다 보니 오래 살질 못하셨지. 왕비 쥴레이카는 내 어머니를 반드시 죽이고 싶어 했고 그 뜻을 끝끝내 이뤘거든. 그리고 그 모든 예언을 거짓이라 치부했지.”
“그런….”
긴 침묵이 두 소년 사이를 가로질렀다.
클레이오는 갑자기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느라 머리가 무거웠다. 그러는 도중 졸음이 점점 밀려와 눈을 뜨고 있기 어려웠다.
여전히 사방을 경계하며 아서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클레이오를 내려다봤다.
아서 리오그난은 바로 이 동급생으로 인해, 그의 평생을 얽어맸던 의문에 해답을 찾았다.
“하지만 네 말로 증명되었지. 어머니는 옳으셨던 거야.”
주변이 조용하니 아서의 나직한 목소리가 잘 들렸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저 경계심 강한 왕자가 자신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게 느껴져 내심 찔리는 클레이오였다.
‘이거 절대로 내막을 들키면 안 되겠다….’
네가 죽으면 내가 사 놓은 땅이고 뭐고 없으니 잘 좀 해보라는 본심을 알았다간 끝이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왕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클레이오 곁에서 가만가만 과거에 대해 술회하기 시작했다.
아서의 모친 테오필라는 한적한 시골에서 거둬진 고아 출신 신녀였다.
열차와 전보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시대.
시간의 여신을 섬기는 종교의 신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공식적으로는 예언도 신력도 사라져가는 힘이었다.
신녀라 하더라도 교회를 벗어나 환속하면 있던 신력마저 사라지는 게 보통인데, 필리프 왕과 원치 않는 결합을 해 아서를 낳은 뒤에도 테오필라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치 않았다.
어머니는 이미 있었던 일을 보듯 일어날 일들을 아서에게 말해주었다. 모호하게 느껴지던 예언의 언어로.
[‘이번에는 틀리지 않습니다. 내 아드님, 나의 왕, 세상을 다시 쓰이도록 하는 이여.
가장 어리고 고강한 마법사가 당신의 시대에 옵니다. 그 역시도 먼저 있던 말을 아는 이랍니다.
마법사를 얻으십시오. 그리하면 아드님께서는 왕위를 얻으리니.’]
여름 궁전으로 간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2왕자 아슬란의 모친 쥴레이카의 사주로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왕성과 멀리 떨어진 키시온 영지의 여름 궁전에 아서는 홀로 남았다.
우연히 키시온 자작가의 검술 선생 눈에 든 것만이 그의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행운 같았다.
그 후 몇 년간 새벽부터 밤까지 손이 해질 때까지 검을 잡았고, 눈이 감길 때까지 공부를 했다.
그리고 11살이 되던 해.
청소년 검술대회에서 기량을 드러내 보인 뒤에야 난생 처음 형제란 작자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편집증적으로 자신을 해하려 들던 2왕자, 우아하나 냉정한 1왕자.
같은 아버지를 두었다 한들 그들은 모두 적일뿐이었다.
이시엘과 [언약]을 하고서, 숨죽여 세력을 모으는 동안 세월이 지났다.
아서는 생전의 모친이 남긴 말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다. 아서의 동세대에는 강력한 마법사가 없었으므로.
한동안 이름을 날리던 마법반 학생이 있었지만, 그는 얼마 안가 에테르 그릇이 깨져버렸다.
그 즈음엔 어머니의 말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중요하지 않아졌다. 어떤 방식이든 실현된 예언은 진실이 되므로.
수도로 돌아올 때 아서는 결심했다.
어머니를 광인으로 몰아 죽인 자들에게 진실을 되갚아 주리라.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러므로, 그는 왕이 되어야만 했다.
“어쩌면 내가 보는 환시나 어머니의 예언을 가장 믿지 못했던 건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어.”
아서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것은 이미 잠들어 대답이 없는 클레이오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어렸던 그를 불길한 아이로 만들었던 환시는 미래에 대한 예언뿐만이 아니었다.
현재를 두 번, 세 번 겪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역시도 그가 받은 저주의 하나였다.
이시엘이 그 앞에 무릎 꿇은 [언약]의 순간조차도 아서는 놀라지 않았다.
붉은 머리를 남자아이처럼 짧게 친 이시엘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는 알았다.
그것이 이미 있었던 일임을.
아서에게는 자신의 것이 아니나,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기억들이 존재했다.
두 번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린 아서를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갔다.
이제껏 기억에 남는 일 중, 아서에게 온전히 일회성인 사건은 어머니가 ‘예언’을 말해주던 순간들뿐이었다.
아서를 꼭 안은 채 어머니가 속삭이던 말들은 겹치지 않고 단일한 목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피난처는 사라졌다.
그는 이 취약하고, 단 하나로 확정되지 않는 사건들로 이뤄진 세계에 적응했다.
아서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어떤 기막힌 상황에서도 침착한 소년을 어른스럽다고 평했다.
실상 그것은 같은 일을 여러 번 겪는 자의 침착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저 마법사는 달랐다.
아서에게 클레이오는 항상 최초의 존재였고, 두 번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