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實演)의 무대 (1)
서고 한 가운데에 선 클레이오는 무턱대고 움직이는 대신. 「지각」을 켜 찬찬히 고개만 움직였다.
오른편 서가에는 그냥 봐도 낡고 닳은 책들과, 고서를 보관하기 위해 쓰는 박스가 층층이 꽂혀 있었다.
‘저기 어딘가엔 설마 팔림프세스트의 낱장 같은 게 끼여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건 지금 뒤져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왼편 서가로 주의를 돌렸다.
그쪽은 일반적인 도서 분류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연도별로 정리된 일지와 관련 문서가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찾는 수고가 덜어져서 다행이었다.
‘먼저 1793년, 붉은 눈 마법사가 폭주한 정황을 담은 일지.’
「지각」은 바늘처럼 섬세하게 곤두선 채 왼편 서가의 책등을 차례로 훑어 내려온다.
이내 클레이오는 1793년의 일지가 꽂힌 책장을 찾아낸다.
그의 예리한 「지각」에, 1793년 일지가 뽑혀 나갔다가 빡빡한 책장에 다시 끼워 넣어진 흔적이 감지된다.
그것은 머지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흔적이었다.
‘방명록이 틀렸거나, 이 일지를 뽑았던 자가 잠입을 한 것이거나, 혹은 왕비가 범인이겠지.’
클레이오는 수많은 가능성을 따져보느라 머리에서 열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용의자를 특정하기 쉬운 장소에 쥴레이카가 직접 드나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아니, 애초에 필리프가 과연 정략결혼 상대와 상호 [언약]을 맺었을까?’
갈래가 너무 여러 가지라 명확한 결론을 내기 어려웠다. 심지어 고민조차도 너무 길게 할 수는 없었다.
멜키오르는 분명 이쪽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질문을 해올 상황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클레이오는 부러 천천히 책장을 한 칸 한 칸 살피며 1793년 항목으로 이동했다. 그 후로도 문제의 사건 앞뒤 세 권의 일지를 함께 뽑았다.
‘1793년엔 미친놈이 여럿 있어 줘서 다행이야. 기후마법이란 걸 발동했다가 사고 친 마법사도 있고.’
기후마법에 대해서는, 붉은 눈 어쩌고보다 자료가 더 많이 남아있었다.
금지된 이유도 한 사람이 징계에 신경 쓰지 않고 하도 여러 번 시도해서였다.
‘한 곳에 비를 내렸더니 한 곳은 가뭄이 들었다고 했지. 7레벨 마법사다보니 서클 크기가 500미터 지름이라 큰 문젠 안 됐지만… 마지막엔 강가에서 실험을 하다 인접한 왕실 장미원을 모조리 말려죽였군. 그러니 금지가 되지, 쯧.’
기후마법은 혹시라도 붉은 눈과 에테르에 관한 걸 캐는 걸 들킬까봐 연막으로 선정해 둔 주제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억」을 켠 클레이오는 일지를 살폈다.
기후마법 외에도 같은 무게의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마석 금을 소모하는 공격 마법이 목록에 보였다.
이 경우엔 마석 금을 구하느라 영지민을 착취한 귀족 마법사 탓에 금지된 마법이었다.
‘마법사란 놈들은 한 번 꽂힌 주제가 있으면 별짓을 다 하는구만. 쯧.’
분량을 가늠하는 척 책장을 팔락여 보니, 1793년 일지 맨 뒤와 그 다음 권에야 불탄 종잇장이 잔뜩 스크랩되어 있는 게 보였다.
‘후, 정신 바짝 차리자.’
클레이오는 책장의 넘기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 주의하며, 찬찬히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마법을 특별히 유의해서 살폈는지 파악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쾅―
“붉은 눈이, 마수의 피로 에테르 레벨 올리다 망한 실험의 결과라고?”
다혈질의 첼이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흔들리는 책상에서 찻잔을 집어 들며 클레이오가 말했다.
“아니, 마수 피만으로는 안 돼. 야, 그게 되면 나부터가 레벨이 상승했겠지. 아님 죽었든가.”
간식으로 말린 살구를 오물오물 먹고 있던 리피가 한 마디 거들어 줬다.
“하긴 레이, 저번에 마수 피에 찔찔 쩔어서 발견 됐댔지.”
클레이오는 얼른 아이들을 모두 감싼 크기로 서클을 전개한 후, [방음][차폐]마법식을 전개했다.
프란을 기다리며 종종 예약을 잡아 놓던 이 외진 실험실 앞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방비는 많이 기할수록 좋았다.
“알다시피 내 레벨은 그대로잖아. 마수 피에 다른 재료를 섞어 특수 가공을 해야 만들 수 있는 약물의 후유증이래. 약물 이름은 ‘히드라의 독’. 이름값 한달지, 그걸 마신 마법사는 주변 모두를 공격하며 미쳐버렸단 기록을 찾아냈어.”
클레이오는 만일을 생각해 ‘히드라의 독’ 재료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뭉뚱그렸다.
“어디서 그런 걸 다 알아냈대?”
“왕실 서고.”
클레이오의 입에서 왕실 서고라는 말이 나온 순간, 침묵하던 아서의 시선이 날카로움을 담은 채 내리꽂혔다.
그에게 제일 처음 왕실 서고의 존재를 알려주었던 이가 아서이니, 서고를 열어준 존재에 생각이 닿은 것이리라.
딱히 변명할 문제도 아니라 여겨, 클레이오는 무던히 설명만 이어갔다.
“방명록을 보니 일단 공식적으론, 거기에 자료를 조회하러 온 사람이 수십 년 간 없었다고 되어있었거든? 실상은 어떤지 모르지만 말야.”
이시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탁자 가까이 다가왔다.
“그 자료에 접근한 자가 클레이오 너 이전에도 있다면….”
팔짱을 끼고 있던 프란이 이시엘의 말을 받아 완성했다.
“반드시 ‘히드라의 독’을 다시 만들어 보려 했겠지. 복용자의 레벨 자체는 높아졌던 게 분명해 보이니까.”
겨우 의자에 다시 앉은 첼이 이성을 좀 찾은 듯 손부채질을 하며 의문을 표했다.
“아니 근데, 후유증이 미쳐 날뛰다 뒤지는 거면 에테르 레벨 높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목숨은 하난데 그 짓을 하려는 자가 흔할까?”
프란의 회색 눈이 안경 너머에서 깊게 가라앉았다.
“에테르 레벨을 높이는 약을 얻기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 따위 실험체로 희생할 놈들은 널렸지. 원치 않는 자에게 실험을 강요할 방법은 고리대를 징수하는 방법만큼 많아. 돈과 권력만 가졌다면 말야.”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오히려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클레이오는 가라앉는 분위기를 수습하며 재빨리 설명을 더했다.
“요는, 붉은 눈 살인마의 존재는 어떤 일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단 추측이야.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붉은 에테르를 쓰는 자는 약물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단 거지.”
붉은 눈, 붉은 에테르.
지나치게 불안정한 능력을 가진 암살자들.
아이들 모두 앞에서 드러내 밝힐 순 없지만 이 사건의 배후엔 아슬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제 그 불완전한 암살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야.’
므네모시네의 문이 열리기 전 망루에서 아서가 그렇게 말했다. 밤손님이 오지 않으니 불안하기까지 하다고.
‘그렇다면 아슬란이든 쥴레이카든 그쪽 진영에서, 제대로 된 히드라의 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뜻일까? 그러니 더 이상 실패한 자들을 보내지 않는 걸까? 이번 사건의 범인 역시 실험체일까?’
어느 것도 범인을 잡아보기 전까진 확실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클레이오는 섣부른 가정을 주워섬기는 대신 적절한 선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이시엘이 타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이론의 원천은 마수 사냥 후 피를 나눠마시던 고대의 전승이라 하지 않았나. 그걸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실천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뭣보다 지금은 천 년 전처럼 마수가 흔한 시절이 아니지 않나.”
클레이오대신 프란이, 여전히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근 딱 한 번 대량의 마수의 피가 입수된 적 있지. 클레이오 아세르, 네가 오레일스에서 마수를 잡았잖아.”
확실히 먼지로 화해버린 마수의 본체와 달리 마수가 이미 흘린 피는 땅과 옷에 젖은 채 사라지지 않았다.
“땅은 진작 봉쇄됐고, 피 묻은 옷은 내가 정신을 잃은 새 수도방위대에서 수거해 갔어. 양말 한 짝 까지 전부.”
괜한 의심을 받을까 클레이오는 빠르게 사실을 해명했다. 첼 역시 클레이오를 거들었다.
“수도방위대에서도 마법사들의 연구소는 그다지 보안이 삼엄하지 않은 걸로 알아. 하도 괴짜들이 많으니 보통사람들은 발도 안 디디니까. 그 마수가 죽은 자리도 마찬가지로, 출입금지 울타리만 한줄 쳐져 있던데?”
“마수의 피를 얻을 구석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단 뜻이군.”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마음을 가라앉힌 프란은 닦기 전이나 별 차이 없는 안경을 고쳐 썼다.
“배우 게하임 징거에 대해선 그간 철저히 조사해 봤다. 인기 배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자였어. 연인도 정부도 없고, 유혹하는 귀부인들도 마다 한 채 오페라극장 근처 조그만 지하방에 살면서 수익과 선물 대부분을 기부하고 있더군.”
“야, 그거야말로 너무 수상한데? 난 금욕주의자 따위 안 믿어. 엊그제는 프란 네가 공연장에 들어갔잖아. 무대 위에선 수상한 점 안 보였어?”
“전혀. 내 방식으로 살펴봤지만, 그에겐 에테르가 감지되지 않았다.”
“에이이~, 세상 사람이 다 첼 너 같은 건 아니라구.”
“그래, 리피. 그건 내 편견이라고 치자. 게다가 그 배우가 수상하다고 해서, 증거도 없이 지금 최고 인기 오페라의 마지막 공연을 막을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럼 오늘 저녁은 특별히 유의해 제일 센 검사와 제일 센 마법사가 무대 코앞에서 그 대배우 님을 감시하게 해 볼까~!”
“찬성~!”
리피와 레티샤가 거들자 순식간에 오늘의 감시조가 정해졌다. 늘 그렇듯 프란이 회의를 마무리했다.
“스테이지 도어와 공연 시작 후 무대 뒤편은 나와 네보가 감시하도록 하지. 난 극장 구조에 익숙하고 네보는 주변 지리에 밝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도 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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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세르 가의 박스석에는 아서와 클레이오 둘 뿐이었다.
크라테르 제국의 제후 부인이 마석 장신구를 대량 구매하러 왔기에, 디오네는 눈물을 흩뿌리며 마지막 공연엔 불참했다.
취미생활보다는 돈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물론, 공연은 못 와도 클레이오의 옷은 깐깐하게 챙겨 입힌 디오네였다.
공연을 못 오는 게 아쉬워선지 오늘따라 유난이 심해, 수호의 의미가 있다며 마석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동그란 커프스 버튼까지 채워 보냈다.
클레이오로선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마석 장신구를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할 뿐이었다.
그리고 디오네 대신 공연장에 온 사람은 그녀가 들었으면 미치고 팔짝 뛸 감상을, 인터미션 동안 나불대는 중이었다.
아서는 오후의 회의 동안 날이 서가지곤 생각이 많은 모양이더니, 극장에선 평소의 태도를 회복했다.
클레이오는 굳이 아서의 내심을 캐지 않았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보이길 원한다면, 맞춰주는 편이 나을 때도 있는 것이다.
“거, 허황된 얘기 뭐가 좋다고 이 많은 인간들이 우글우글 보러 온 거냐? 졸음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목소리 좀 낮춰. 왕자란 놈이 이렇게 교양이 없어서야.”
“뭐, 왜! 키시온 영지엔 유랑극단도 일 년에 한 번 겨우 온다고. 오페라 같은 걸 어디서 보고 자랐겠어.”
1, 2막 내내 하품을 억지로 참느라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아서가 항의했다.
“그래, 됐다. 너랑 예술을 논할 건 아니니. 그럼 그 배우는 어땠냐? 게하임말야.”
“으음, 내가 이런 걸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가수는 그렇게 폭 삭은 늙은이도 주연을 할 수 있는 거냐?”
“뭐?”
“목소리가 젊어서 처음엔 몰랐거든. 근데 조명이 내리비칠 때 잘 보니까 가려놓은 가면 아래 뺨이랑 입가가 자글자글 하잖아.”
“그럴 리가. 내가 봤을 땐 젊은이 같았는데.”
“그럼 가수가 바뀌었나?”
“그 목소린 누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냐.”
이 일 때문에 클레이오는 같은 공연을 네 번이나 보았다.
언제 들어도 게하임의 목소리와 발음은 아주 독특했다.
게다가, 오늘 연기는 음알못인 자신의 귀에도 최고였다.
“혹시 화상을 잘못 본 거 아닌가? 듣기로, 가면 아래에 화상 자국이 있다고 했어.”
“어라,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다음 막 때 더 자세히 볼게. 근데 화상이 얼굴 전체에 있는 거냐? 배우인데?”
“전엔 안 보였는데. 분장으로 가린 걸수도 있을 테고. 일단 보자.”
무대로 다시 나온 게하임을 살펴보니 아서 말대로 얼굴과, 장갑 사이로 드러난 손목까지 붉게 우그러져 보였다.
클레이오는 여차하면 서클을 펼 준비를 하고서 무대를 초조하게 살폈다.
익숙한 내용이 반복되었다.
아르셰니에의 오해, 오라비에 의해 끌려갔다가 돌아온 루미니따.
결백을 부르짖는 루미니따의 높은 목소리.
어쩌면 이대로 아무 이상 없이 마지막 공연이 끝나는 것일까?
자신과 베헤못이 붉은 눈을 잘못 본 것일까?
루미니따의 아리아가 절정에 오른다.
“[당신과 함께라면 퇴색조차도 눈부시고, 재조차도 달콤할 것.]”
그리고 고원의 군주는 연인의 목을 문다.
극장 안의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길어지는 흡혈 신에도 오늘따라 엄청났던 연기 탓인지 다들 몰입하고 있었다.
철컥―
“레이.”
먼저 이상을 느낀 건 아서였다.
“저건 연기가 아냐. 저 여가수, 경련을 일으키고 있어.”
오늘은 객석에 군인도, 기사도, 마법사도 없었다.
이 안에서 아서는 아마 사람이 죽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봤을 것이다.
검을 쥔 아서는 2층 발코니석의 난간을 뛰어넘어 그대로 무대로 난입했다.
아서의 기척을 느낀 게하임이 소프라노의 목에서 입을 떼며, 꽉 껴안고 있던 몸을 놓았다.
쓰러지는 여인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으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극의 장치인 줄 알았던 탓일까?
몇 박자나 늦게, 객석에 남녀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사방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클레이오는 아서를 따라 뛰어내리며 [감속]마법식을 펼쳤다.
“[우거진 골짜기가 비둘기를 품듯, 어서 빨리, 나를 감싸 주오!]1)”
그리고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역진했다. 무대를 살필 새도 없었다.
클레이오는 재빠르게 소프라노의 몸을 끌어안고 [지혈][치료]마법을 걸었다.
무대 위로 조명보다 휘황한 에테르가 흘러넘쳤다.
소프라노의 목에선 순식간에 피가 멎고 송곳니에 꿰인 목의 상처도 아물었다. 질렸던 안색이 돌아오고 맥이 올바로 잡혔다.
‘됐다!’
우당탕! 쿠쾅!
그때 클레이오는 백스테이지 오른편에서 굴러들어오듯 뛰쳐나온 네보를 발견했다.
“네보! 이분을 빨리 바깥으로 옮겨. 수도방위대로 데려 가서 마법사나 의사에게 보여!”
네보가 정신을 잃은 소프라노를 업는 걸 도와주며 클레이오가 물었다.
“프란은?”
“나와 무대 반대편을 지키고 있었어. 문제가 생기면 총을 쏴서 알리―.”
탕―!
탕, 탕탕―!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극장 안에서, 총성이 네 번 울렸다.
1) 「James Lee's Wife」, Robert Browning,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