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87화 (87/489)

기말고사 (1)

다음 날.

기말고사 전 마리아 젠틸레 교수의 마법기초 II 수업이 있었다.

한 학기 동안의 수업 내용을 총정리 하는 강의였다.

일단 학생들을 절벽에 밀어버린 뒤 기어 올라오게 하는 제베디와 달리, 마리아 교수는 요점을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을 조목조목 잘해주었다.

제베디는 전형적인 천재과 인간이었다.

그의 강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학생일 때 배움의 작은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결과를 이루어서인지, 교수인 지금에도 세부 내용을 건너뛰고 결과만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달리 마리아의 강의는 이해하기 쉬웠다. 그녀가 50대에야 7레벨에 이른 대기만성형 노력파인 것, 그리고 전문분야가 성실성이 중요한 건축물 보강과 방어인 것이 그 이유 같았다.

클레이오는 매년 새로이 페이지를 끼워 넣느라 집게로 집어 놓은 마리아 교수의 강의록을 눈여겨봤다.

성실한 성격을 드러내는 증거로, 마법의 이론뿐 아니라 개념의 이해를 돕는 예시나 일화도 풍부하게 실려 있는 강의록이었다.

‘덕분에 머리 나쁜 학생이라도 강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사실 마법은 실용학문 아닌가? 어렵게 알려주는 제베디가 잘못하는 거라고. 아, 마리아 교수 같은 타입이 자기 전공 개설서나 대중서를 잘 쓰는데.’

언젠가 저 강의록을 출간하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직업병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클레이오는 입맛을 다셨다.

보기 좋은 글씨로 중요 사항을 판서해둔 마리아 교수는, 아이들이 내용을 다 받아 적은 걸 보자 5분 일찍 수업을 끝내주었다.

“자, 이상으로 수업을 마칩니다. 마법 기초 II 필기시험은 다음 주 월요일, 실기시험은 금요일입니다. 실기시험 순서는 게시판에 고지해 놨으니 꼭 확인하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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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 왕실 행사가 많아 바쁜 아서는 죽상을 하고서 왕성으로 갔다.

우등생 이시엘은 노트와 책을 짊어지고 도서관으로 사라졌다. 요즈음엔 암살자들이 오지 않아 이시엘도 전처럼 모든 장소에 아서를 따라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학구열로 불타는 분위기 속에서 느긋한 첼과 클레이오만 남아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

오늘 메뉴는 염장 대구에 감자를 으깨 크림과 허브를 넣어 오븐에 구운 브랑다드 그라탱, 그리고 겨울 시금치 소테였다.

같이 곁들인 와인은 밝은 레몬 빛으로 단맛 없이 산미가 두드러지며 사과와 복숭아, 허브향이 함께 감돌았다.

‘브랑다드 그라탱과 곁들이니 충격적으로 잘 어울리잖아. 산미로 시작하는데 끝맛은 버터를 머금은 듯 풍부하고. 하.’

브랑다드는 염장한 대구 살에서 소금기를 빼고 크림과 감자, 허브에 으깨 익힌 음식이었다.

잠자코 브랑다드 한 입 와인 한 모금씩 넘기며 음식에 집중하는 클레이오를 첼이 괜스레 꾹꾹 찔렀다.

“레이 너 이대로라면 검술은 겨우 낙제점 통과잖아. 괜찮아? 술은 그만 마시고 연습용 검이라도 좀 휘두르지 그래.”

“이걸 맛봤는데, 지금 술을 그만 마시라는 거냐.”

자기 잔을 가볍게 기울인 첼이, 맛만 보고 와인의 종류를 맞추는 고도의 기예를 선보였다.

“음, 톨리툼 글리씨니인가. 학교 식당치곤 꽤 좋은 게 나오긴 했네. 연말이라 그런가 봐.”

과연 카롤링거의 구귀족이자 호텔왕의 자녀다운 평이었다. 클레이오가 생각할 때, 그렇게 싱겁게 평하기에는 지나치게 맛있는 와인이었다.

“주류상에 말해서 나도 몇 병 사 둬야겠다.”

클레이오가 집에서 집어온 와인은 진작 다 마셨다. 이제는 그냥 대놓고 주류상에 주문을 넣기 시작한 그였다.

돈을 쓰기보다는 벌기를 더 좋아하는 클레이오였으나 술값만은 아낌없이 썼다. 뮤즈의 은총 덕인지, 음주에 관대한 사회라 정말로 다행이었다.

“1879년산이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선 괜찮… 아니, 지금 술이 문제가 아니잖아. 오후에 검술 기본자세라도 좀 봐줄까? 점수 그래가지고 3등은 절대 무리인데. 군대 안 갈 거라고 난리더니."

“뭘 모르는 건 첼 너지. 난 마법반이니, 내년부턴 너네랑 지겹게 연병장 뺑뺑이 안 돌아도 된다고. 졸업 등수로만 면제자 선정하는 거 벌써 알아봤어.”

“하, 전의 치안자치대 규정도 그렇고 하여간 이런 머리는 귀신같이 돌아간다니까.”

희미하게 웃은 클레이오는 카라페에 넉넉하게 담긴 술만 다시 잔에 채웠다.

2학년부터는 과목별 배점이 1학년과 달라졌다.

마법반은 전공인 마법총론이 100점, 마법실습이 150점으로 배점이 늘어났다.

공통과목은 고전 50점, 역사 50점으로 여전히 검사반 아이들과 함께 들었다.

나머지 50점은 과목당 25점씩 배점으로 선택과목을 고를 수 있었다.

선택 과목에는 군사학, 수학, 기하학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현대외국어 브룬넨어, 현대외국어 카롤링거어, 지리학 같은 것도 있어 선택의 범위가 넓었다.

“졸업 석차 낼 땐 전공 점수가 제일 많이 들어가니까 문제없을 거야.”

“여, 클레이오 경. 마법의 엘리트시라 이거군요? 어? 외부 결계 재시동하러 온 수도방위대 마법단의 부단장 콧대를 눌러줬다더니 아주 자신만만하셔.”

“첼, 너는 내 입을 막고 싶을 때 꼭 그놈의 호칭을 들먹이더라.”

“백 번 들먹여도 백 번 다 파르르 떠니까 그렇지. 넌 은근히 도발에 잘 넘어간단 말이야. 이번에 세르게프 부단장이랑 내기까지 했다며.”

“그건 또 언제 들었냐.”

“지금 학교 안에 그 소식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에즈라 세르게프는 전설의 미친놈이란 말이다. 다들 뒤에서 신이 났어. 돈까지 걸었더라.”

“전설의 미친놈이라니. 별명 한 번 굉장하네. 생김새가 범상치 않기는 했지만.”

한산한 학교 식당에서 첼이 들려준 비하인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흰머리에 상아색 눈이 왜 그렇게 된 거냐면 말이지, 19살 때 벌인 마법 실험의 후유증이야. 에테르 그릇이 깨졌다 붙어서 네 달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그동안 온몸의 색이 다 사라지고, 에테르 감응력도 더 이상 늘릴 수 없게 됐다더라고.”

“뭐?!”

에즈라 세르게프는 수도방위대 학교 재학 당시 19세에 4레벨에 올라, 장래가 기대되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다만 상식이 결여되어 있는데, 탐구심과 행동력은 넘쳐 제베디의 골칫거리였다고.

그는 공격 마법을 쓰는 클레이오 이상으로 특이한 마법사였다.

치유니 방어 따위엔 일절 관심이 없고, 전설의 환상생물을 재현하는 데에만 열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 만렙토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군. 으윽.’

“사고 전에도 키메라를 만들겠답시고 동급생들까지 괴롭히고 난리도 아니었다지. 온갖 사건사고를 벌이다가 마지막으로 한 짓이 그 실험이었던 거야.”

“어떻게 몸 안의 에테르 그릇을 건드릴 생각을 다 했대? 아니, 애초에 마법사는 자기 신체에 적용되는 마법은 못 쓰잖아.”

“그래서 국보급 마석 하날 거하게 해 먹었지. 세르게프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거대한 마석 설화석고 그릇이 있었는데, 이중발진을 복잡하게 응용해서 원래의 에테르 그릇 대신 그걸 마법으로 재구성해 몸에 심어보려고 했대.”

“그래서 그 마법은 왕실에서 금지 안 했어? 이런 상세한 정보가 다 돌고?”

“금지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게, 애초에 그런 크기의 마석 설화석고는 대륙에 단 하나뿐이었어. 레오니드 2세가 그리핀을 잡은 세르게프 집안의 시조에게 내린 귀물이라고들 했지.”

“놈은 그럼 가보를 부숴 먹어가며 6레벨을 달성한 거야? 에테르도 강하고 재주도 좋던데, 그냥 남들 하듯 해도 6레벨은 갔을 텐데. 아니 어쩌면 그 이상도….”

“그걸 다들 아쉬워했는데 본인만은 신경을 안 쓰지. 목적이 에테르 레벨을 올리는 게 아니었거든.”

“그럼?!”

“그릇을 몸 안으로 옮긴 후 그리핀을 만들어보려고 했다던데? 그 마석 설화석고 그릇엔 그리핀의 피를 받았단 전설이 있었거든.”

“와… 진짜….”

“또라이지. 근 삼십 년 내 수도방위대 학교가 배출한 최대의 문제인물일 거야.”

“중퇴했다던데 이 학교가 배출한 게 되나?”

“누가 중퇴라고 그래?”

“…본인이.”

“그걸 믿냐. 열아홉 살 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제베디 교수가 그를 더 가르치길 거부해서, 수료 후 수도방위대 마법단에 곧장 들어간 거야. 그 후론 온갖 험지를 돌며 고속 승진을 거듭한 거지.”

이쯤 오면 클레이오도 이쪽 세상의 돌아가는 꼴을 어느 정도는 알았다.

필드에 직접 나가는 마법사들은 수도방위대에서 연구만 하는 책상물림들보다 대체로 계급이 높은 편이었다.

위험이 큰 만큼 활약할 기회도 많아서라고 들었다. 하지만 보통은 평민으로 레벨이 낮은 마법사들이 맡는 일이었다.

‘레벨이 높을수록 귀하신 몸들이라 나이 지긋한 연구마법사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마법사가 현장을 직접 뛰다니.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그런 일을 할 인간으론 안 보였는데.”

“그렇지. 그냥 에테르에 관련된 이상 사건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작자일 뿐이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키메라 만들 재료도 겸사겸사 찾고.”

“시조가 레오니드 1세의 공신이었으면 대단한 집안일 텐데, 애가 그러고 다니게 놔 두냐?”

“세르게프 집안이야 데르니에 대륙 최대의 대리석 산지가 영지에 있으니 재산과 지위를 다 갖춘 명가지만, 그럼 뭐해. 그 집에서도 머리가 이상한 넷째 아들에겐 진작 두손두발 다 들었어.”

다 식어버린 브랑다드 그라탱의 마지막 한 입을 떠먹던 클레이오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수도방위대 마법단과의 라인으로 놈을 고른 건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지금이라도 다른 마법사를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

기말고사 일정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마법 시험은 베헤못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마법식과 용례 쓰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역사 과목 역시 이번에는 상식 수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시험을 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금요일이 왔다.

케이프 코트의 단추를 잠그는 클레이오 주변을 베헤못이 뱅글뱅글 돌았다.

“광대 짓도 그런 광대 짓이 없다. 빛의 축제 때처럼 주변을 환히 밝히고서 보석 눈꽃을 뿌려줘야 한다고?”

빛의 축제는 12월의 마지막 주, 신년을 맞이하기 전 알비온에서 지내는 절기였다.

동지에서 나흘이 지난 날을, 봄의 태양이 부활하는 날로 여겨 집집마다 밤새 불을 밝히고, 거리도 연중 가장 휘황하게 꾸몄다.

“음, 그래도 하기로 한 거고. 이 짓 한 번으로 에즈라를 써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일일 것 같아서.”

“에즈라는 정말로 미친놈이다. 그럴 가치가 있을는지… 본묘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뿐이냐? 참관석엔 기사단장이며 왕자며 이놈저놈 바글바글 모여 있을 텐데 그 앞에서 그러고 싶느냐?”

클레이오 역시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의 마법 능력은 이미 세상의 관심과 주의를 다 끌어버린 상태였다.

어떤 마법으로도 발 없는 말은 막을 수 없는 법.

‘너무 약한 마법을 보여 주면 힘을 숨긴다는 의심을 받을 거고, 공격 마법 종류는 직접 보여주는 걸 피하고 싶은데 딱 잘됐잖아.’

오히려 에즈라의 제안 덕에 적당히 무해하면서도 강력한 마법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코트 단추를 다 잠그고 깃에 수도방위장 약장을 단 클레이오는 주머니 속의 마석 스노우쿼츠 반지를 꺼내 보았다.

마석을 통으로 깎아 만든 반지는 묵직했다. 연마된 면으로는 투명한 결정들이 눈꽃처럼 반짝이는 게 보였다.

반지 안쪽으로는 세르게프 가문의 문장인 듯한 장식 대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마석 반지를 소모해 구성한 마법이라면, 마석 덕이네 진짜 실력이네 말이 많을 거고, 논의가 딴 데로 갈 공산이 크지.’

뎅― 뎅―

오전 1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장갑까지 끼고서 책상 위의 완드를 집어든 클레이오가 말했다.

“그럼 나갈까?”

“본묘가 이 추운데 네 재롱까지 보러가야 하다니 신세가 무엇인고 싶다.”

“추위도 안타면서 엄살은.”

겨울이라 털이 푹푹 쪄 더더욱 푹신하고 부드러워진 베헤못은 하나도 안 추워보였다.

게다가, 자신이 이중발진을 알려줬으니 불초 제자의 성취를 봐야겠다고 먼저 주장한 건 베헤못이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위풍당당한 영묘님께 침실 문과 현관을 차례로 열어드리며, 클레이오는 기숙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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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객과 학부모들로 연병장이 북적였다.

참관석 천막 아래에서 [발열] 마법을 재시동하고 있는 마법반 조교들이 보였다.

워낙 준비할 일이 많아서 그런지 조교와 교직원들의 얼굴이 기말고사에 임하는 학생들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VIP가 깔렸네.’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 기말고사의 하이라이트인 검사반 결승까진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참관석은 거의 다 차 있었다.

‘보자, 치안총감 로날드 퍼니발과 그 무슨 경정인가 하는 놈, 램즈데일 백작까지 와있네? 제법 거물들 아니었어? 다들 할 일 없나.’

전혀 안 반가운 얼굴들 뒤에서 디오네가 살짝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뭐라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 같기에 「지각」을 켜 보니, ‘잘해요.’라고 입 모양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어느새 베헤못은 디오네 무릎에 올라앉아 카나페를 받아먹고 있었다. 투덜대더니 쇼를 구경하려는 만반의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연병장 주변을 쭉 둘러보니, 참관석 반대편에서 에즈라가 허리에 손을 짚고선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전에 본 그의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 제각기 자기 할 말을 떠들어댔다.

정확히는 에즈라가 일방적인 비난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시킨 거예요!’

‘실험체는 무슨 실험체냐. 개 같은 짓은 자기 자신에게 한 걸로 충분하지 않았어?’

‘부단장님, 아세르 준남작의 차남에게 해를 끼쳤다간 가업인 대리석 거래에도 문제가….’

등등의 이야기였다.

「지각」이 실어다 준 말들을 듣던 클레이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음… 다들 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군.’

그렇다면 기대를 배반해 주는 것도 약간의 여흥이 될 것이다.

“다음 순서, 1학년 마법반 클레이오 아세르. 시험장에 입장하세요.”

조교의 호명을 들은 클레이오는 참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리꽂히는 것을 느끼며 시험장 가운데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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