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귀인 (5)
그는 쓰러진 아서와 클레이오 앞에서 멈추어 섰다. 두 소년은 추위 속에 고립된 조난자들 같았다.
아서는 귀중한 동료인 클레이오를 구하려 했고, 클레이오 역시 아서가 지탱하는 세계가 무사하길 바랐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려는 상대가 있다는 조건은 인간을 강인하게도, 유약하게도 만드는군.”
왕세자는 기이한 것을 들여다보듯, 소년들을 향해 살풋 허리를 굽힌다.
“이중 발진을 무결하게 완료해 내었으니, 경에겐 답을 해 주어야겠군.”
클레이오는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흘러내리는 단어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멜키오르의 탄식엔, 클레이오가 갈급하게 알고 싶어 한 진실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 고통은 여러 번 반복된 것이고, 종래에는 이것이 내 명예를 취해가고야 말겠지. 허나 나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존재가 주어진 것은, 영원 가운데 처음이군.”
멀리까지 울리는 멜키오르의 목소리가 아서의 의식을 두드려 깨운다. 3왕자는 아직 눈을 감은 채였지만, 그의 주변으로 에테르가 고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세자는 아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오로지, 이제껏 두 번 있지 않은 존재이다.
“반복은 모든 것을 마모시키지. 고통도 기쁨도 마찬가지. 그 억압적인 굴레 가운데 그대가 와, 이는 내 대적의 결과로 얻은 복인가, 변덕스런 신이 내보인 회유의 증좌인가 의아히 여긴 적이 있었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니었던 거야.”
멜키오르의 음성은 여전히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 듯 맑건만,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은 어조를 배반한다.
“그 새로움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나의 몫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이 세계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눈물과 땀으로 흐릿해진 클레이오의 시계가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는다. 그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긴장 속에서 왕세자의 표정을 확인한다.
세상이 자신을 위해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덤덤히 인정하는 멜키오르의 얼굴에는 체념도 분노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두려웠다.
그 긴 세월 동안 내내 패배하고, 명예를 잃고, 끝내 죽음에 이를 만치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어왔으면서도 품위를 지키려는 멜키오르의 의지가.
역사 속에서 그런 자들이 벌였던 일들을 ‘정진’은 안다.
증오보다 강한 것은 신념이고, 분노보다 강한 것은 자신의 정의를 실천하게 만드는 확신이다.
아서를 꽉 붙잡은 클레이오의 팔이 희미하게 떨린다. 혹은 클레이오의 등을 감싼 아서의 팔이 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들은 한 배에서 난 짐승의 새끼들처럼 가까웠으므로 구분은 무의미했다. 꽤나 상징적인 광경이라고 멜키오르는 생각한다.
“그래 물론, 신은 응답하지 않는 자이니 이 모든 사건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별들의 궤도처럼 가까웠다가 다시 멀어지는 희망, 그를 위하여 짜이지 않은 규칙과 우주의 법칙들을 멜키오르는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거역하려고 할 뿐이다.
“알비온 왕국의 왕은 대관의 순간, 우리 우주의 법칙에 불가해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나는 그 관을 부수려고도, 외면하려고도 해 보았어. 하지만 실패했지.”
서사의 틀에 매였으나, 그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 펜을 든 저자의 뜻을 거역하려는 자. 그를 고작 책장 위의 등장인물로만 여길 수 있는가?
클레이오는 떤다. 그의 불안을 감지한 듯, 아서의 주변으로 감돌던 에테르가 결국에 [강화]를 일으킨다.
아서와 한데 뭉쳐 있는 클레이오의 주변 역시 [강화]를 입고 옅게 빛나기 시작했다.
끙끙 앓으며 아직 정신도 못 차리는 어린 왕자는 무의식중에 이런 일을 해내는 것이다.
멜키오르는 미소 짓는다.
“내 아우는 정의롭고 신의를 아는 아이지. 나는 이 애, 나의 어린 동생으로 정의되는 소년을 결코 미워하지 않아. 우리는 둘이고, 왕관이 하나인 것이 문제일 뿐. 범상한 인간의 몸에 신성이 깃드는 기적의 순간을 나는 원하네, 내 항명의 도구로써.”
클레이오는 저 두 리오그난의 필사적임이 지나치도록 생생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살려낸 생명의 뜨거움이. 운명에 저항하는 자의 선언이.
그저 원고를 읽은 이, 애정도 기쁨도 없이 원고를 교정하는 이, 저자의 의지를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인 외부자가 이들의 생애를 정정할 권리가 있을까?
여덟 번이나 반복된 다시쓰기의 목적은 무엇인가?
저자의 뜻은 진실로, 정해진 결말에 가 닿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애초에 ‘정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모른다.
알지 못하는 마지막을 위해 현재를 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알비온 왕국의 왕자>는 한낱 이야기로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때.
왕자의 에테르가 가호하는, 처참한 꼴의 마법사에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끝이 가 닿는다.
기다란 손가락은 소년의 볼품없는 목 위를 별안간 짓누른다.
어린 리오그난의 [강화]는 폭력의 시도에 강하게 반발한다. 멜키오르는 손끝이 붉게 짓이겨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클레이오의 숨통을 죄이려 든다.
아서의 에테르와 멜키오르의 고유 스킬은 상극이었다. 아서가 갓 태어난 연약한 어린아이일 때부터 그랬다.
멜키오르는 예측할 수 있었다. ‘간파의 구조시’를 강행하여 쓴다면, 이 자리의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세 번째와 다섯 번째의 생애에서 아서를 살해해 보았다.
그러면 세상은 거기에서 끝난다.
그리고서, 또 반복되는 것이다.
그는 또 다른 반복을 원치 않았다.
멜키오르의 손은 살의 없이 떨어져 나간다.
‘그를 위하여 주어지지 않은 세계’가 안기는 좌절은 왕세자에게 익숙한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 법칙이 존속함을 확인하려는 절차에 가까웠다.
“물론 그대는 내가 그리는 미래를 바라지 않겠지. 내가 기적을 소유하는 것을 방해할 테고. 나는 그대가 실패하길 바라면서도, 그대에게 감사하고 싶어. 이 두 가지는 모순 없이 공존 가능한 마음이지.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설계된 존재가 아닌가?”
의식이 꺼져가는 클레이오의 귓가에 남는 것은 맑고 고요한 웃음소리였다.
***
마수의 습격으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그 사이 선대 공작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알비온의 대부분 지역에서 매장이 관습인데, 트리스테인 영지에선 특이하게도 화장(火葬)을 했다.
초대 공작 랑슬로 트리스테인부터 시작하여, 이제껏 사망한 공작의 유해는 모두 화장 후 제카브르 항에 뿌려졌다고 한다.
클레이오와 아이들은 모두 외부인인 데다 부상이 심해 성에만 머물렀지만, 산골(散骨)을 위해 항구에 띄운 배에 태서턴을 수행해 갔던 로탄이 눈마저 녹일 듯 울었단 이야긴, 입이 싼 트루데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쯤 오래 앓았으면 친부모라도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인데… 이 기사단이 얼마나 공작가와 정서적으로 밀착돼 있는진 알겠어.’
공작의 처참했던 최후에 대해선 멜키오르가 적절히 앞뒤를 생략해 발표했다.
피톤의 공격으로 본성이 부서지며 계단이 끊긴 탓에 미에츠와 이시엘의 진입이 늦어진 데다, 멜키오르를 수행한 태서턴이 공작의 경비병을 모두 물려놓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즉, 사태에 대한 근거리 목격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거리 목격자는 엄청나게 많았지.’
멜키오르가 산중까지 끌고 들어온 신문기자들과 사진사들은 엄청난 특종을 잡았다는 흥분 속에서, 수도로 전보를 쳐댔다.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중앙일간지는 물론이고, 북부의 신문들도 베일에 감싸인 기사단이 벌인 마수 떼와의 일전, 새 트리스테인 공작의 엄청난 무위, 의연히 처신한 왕세자의 지도력을 주제로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알비온의 축복, 우리 세대의 지도자>
<치열한 전투 가운데 검증된 왕세자 저하의 통솔력>
<트리스테인 영지의 마수 습격 일단락돼… 공작위는 태서턴 트리스테인 경에게로>
일단 지면에 등장하면, 제아무리 열화된 화상이라도 멜키오르가 판면의 기조를 지배한다.
이미 성인기에 이른 지 오래되었음에도, 왕세자의 외견은 나날이 현혹의 정도를 더해가는 것 같았다.
아슬란을 찬양하던 기사들의 면적이 줄어들고, 중앙 일간지 1면은 다시금 멜키오르의 행적을 좇는다.
여론이 반전되며 호사가들이 입을 재게 놀리는 동안에도, 태서턴은 멜키오르의 안위 외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문에는 태서턴의 모습도 실려 있었다. 길어난 앞머리를 올려 넘기고 예복을 입은 그에게선, 공작 각하다운 귀족적 풍모가 느껴졌다.
‘실체는 좀 다른 것 같지만 말야. 사진이란 건 얼마나 자의적 매체인지.’
추도사를 낭독하는 왕세자의 곁에 선 제23대 아르모리크 공작은 슬픔을 숨긴 부단장에게도, 부친의 관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게, 꼭 귀족이라서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과거에도 충성스런 기사이기는 했으나, [영원성의 직유]라는 언약을 얻은 태서턴의 행동은 그 정도가 더했다.
‘태서턴이 도대체 뭐의 환생자란 말이지? 초대 트리스테인 공작의 환생이란 뜻인가? 그건 또 완전 새로운 설정이잖아.’
클레이오가 짐작하기에, 환생이란 게 원고의 개정을 뜻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디오네처럼 지난 원고에 안 나오는 사람을 뺀 나머지 모든 인물은 다 환생자여야 하는데, 그런 타이틀은 안 떴잖아. 아, 도대체 뭐가 뭔지.’
“후우우우우.”
긴 한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오래 누워 아픈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집었다.
‘하룻밤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잘 정리도 안 되네. 한동안 평화롭다 싶더니, 무슨 이런 급전개냐고.’
이꼴저꼴 다본 상태로 에테르까지 탈탈 털린 클레이오는 사흘간 거의 정신도 못 차리고 앓았다.
병명은 에테르 고갈이 아니라 감기몸살이었다.
그 추운 밤, 지붕이 떨어져 나간 건물의 찬 바닥에 나뒹군 대가였다. 여름정원의 케이프도 이번엔 완벽한 방비가 돼주지 못했다.
아서는 하루 반 만에, 나머지 아이들은 하루 만에 멀쩡해졌는데, 클레이오 혼자만 침대 신세를 못 면했다.
물론 그 돌발적인 전개 때문에, 얻은 것도 많기야 했다.
아서의 레벨이 6으로 올랐다. 클레이오 자신도 드디어 5레벨을 달성했고, 북쪽 포탑에서 싸웠던 안젤리움 쌍둥이들 역시 4레벨로 승격되는 경사가 있었다.
다들 방학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련을 거듭한 뒤이다 보니, 마수를 잡으며 경험치를 쌓자 금세 레벨이 오른 것 같았다.
‘거기에, 내 고유 스킬까지 원쁠원 됐네.’
클레이오는 누운 채로 자신의 손을 뻗었다.
왼손에는 약속이, 오른편에는 희미한 실금으로만 남은 성흔의 흔적이 보였다.
직사각형의 ‘편집자 권한’ 가운데, 손등뼈를 따라 2센티가량의 금이 새로이 그어졌다.
고유 스킬을 가동시켜 보자 짧은 메시지가 떴다.
[고유 스킬: 작내 서술
―발현 형태: 미정
―발동 조건: 미충족]
발동 당시에 고지된 것처럼, 혼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실행이 안 되는 스킬이었다.
‘내 맘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고유 스킬이라는 분류는 뭐 하러 해놨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스킬명 역시 아리까리하긴 마찬가지였다.
‘약속’을 풀로 돌리고서야 교양 수업 <극예술의 이해>를 수강했을 때, 복사 자료로 꾸역꾸역 읽었던 설명 몇 구절과 간신히 연결시킬 수 있었다.
‘연극이나 문학에서 작품 내의 사건을 배우 연기나 묘사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화자나 저자의 대리자가 말로 들려주는 기법. 뭐, 그런 거 아니었나… 맞지?’
솔직히 확신은 안 갔다. 구글링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없는 구글을 애달피 그리워하는 동안,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자리끼를 벌컥 들이킨 후 도로 드러누운 클레이오는, ‘작내 서술’이 발동될 때의 메시지를 되새겨 봤다.
[―‘작내 서술’의 요지는 원고에 기재됩니다.]
이제껏 클레이오가 읽을 수 있었던 부분의 <최종고>에선 ‘약속’의 메시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클레이오의 내면 역시도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메시지는 원고에 쓰이게 된다고 했으니, 나랑 연관된 서술이나 뭐 그런 게 <최종고>에 나온다는 거 아냐. 근데 그런 게 너무 많이 나오면 글이 삐걱댄단 거고. 으, 편집자 권한 쓸 일 있음 확인을 해 봐야겠어.’
처음으로 귀에 들렸던 메시지.
『세계의 안위에 깊이 연루된 존재와 진심어린 뜻을 같이할 때, 신의 영예로운 총애가 지상에 임한다.』
신은 저자이고, 영웅은 주인공이다.
정보전달 위주로 사무적인 ‘약속’의 메시지에 비하자면, ‘작내 서술’의 문장은 사뭇 시적이었다.
새로이 생긴 고유 스킬 ‘작내 서술’의 개입은, 편집자인 ‘정진’이 원고에 관여하는 것과 다른 행동으로 분류된단 뜻 같았다.
‘서사 개입도가 높아진 탓도 있으려나.’
클레이오는 기분이 묘하게 뒤숭숭했다.
‘파란 약 먹고 눈 딱 감기로 한 뒤엔, 서사 개입도가 높아지면 언젠간 나도 등장인물이 되는 거 아닐까 싶긴 했어. 이쯤 오면 나도 삼분지 일은 작품에 걸친 존재라 이건가.’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세계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클레이오가 인간이든 인물이든 간에, 그 자신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항상 아서와 원고와 왕세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