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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129화 (129/489)

역사학 개론 (2)

사제는 이스토리아 대주교의 상태가 걱정되는지 두어 번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의 명령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가만하게 움직이는 노인이 문을 닫자 부자연스런 침묵이 남았다.

기다려왔던, 대주교와의 독대였다.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목소리까지… 민산이랑 똑같잖아. 기분 더러운데.’

대주교의 시선을 받고서야, 클레이오는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표정도 인상도 민산과는 완전히 다른데, 목소리와 얼굴은 그녀와 꼭 같았다.

살짝 치솟은 콧등의 모양새나, 가운데를 살며시 눌러놓은 듯한 아랫입술의 모양새까지.

징그러운 재현율이었다.

클레이오는 아까 사제가 일러준 대로, 이스토리아 대주교가 내미는 손을 살짝 맞잡았다. 이어, 어색하게 입술을 손등에 대는 시늉을 했다.

대주교의 가느다란 손은 매끄러웠지만 온기가 없어, 산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인사를 마친 클레이오가 정중히 물러나려 들 때, 대주교는 돌연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클레이오는 당황했지만 몸이 약하다는 대주교가 다칠까 봐 함부로 뿌리칠 수도 없었다.

“왜 이러십니까.”

“가만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클레이오를 붙잡은 대주교의 엄지손가락이, ‘약속’이 자리한 검지 위에 와 닿았다.

클레이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주교는 막대한 신성력을 가졌던 사제라고 했지. 썩어도 준치라고, 설마 ‘약속’에 대해 눈치챈 건가?’

남들에겐 안 보일 ‘약속’을 손끝으로 어르던 대주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차갑고 의연했던 대주교의 얼굴에 인간적인 표정이 돌아온다.

냉엄한 고위 사제의 모습은 돌연, ‘정진’이 알았던 ‘민산’의 얼굴이 된다.

“졸업반지, 여전히 갖고 있어서 다행이야.”

“?!”

클레이오, 아니 ‘정진’의 눈이 더 크게 떠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벌어졌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클레이오의 손을 붙든 대주교는 희미한 미소, 그립고도 아련한 표정으로 ‘정진’을 바라보았다.

“□□아 잘 지냈니? 어떤 모습이 돼도 넌 여전하구나. 금세 알아볼 수 있었어. 긴장하면 턱을 조금 당기고, 입을 꽉 다물잖아.”

분명히 레지나의 입술이 움직였는데도 음소거가 된 것처럼, 처음 두 음절의 단어는 소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레지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움직여 보지만, 입모양마저 흐릿하게 일그러질 뿐,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단어는 결코 클레이오에게 가 닿지 않았다.

“네 이름 한 번 부르기가 이렇게 어렵네.”

대주교는 클레이오의 손을 더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약속’이 끼인 왼손을 뒤집어, 그 손바닥 위로 머리를 숙였다.

결이 가늘고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이 클레이오의 소매 가로 비단실처럼 펼쳐졌다.

손바닥 위에 부드럽고 차가운 입술이 닿는 순간, ‘정진’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뭔가를 전하려는 듯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방식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건 말이었다.

움직임은 불분명했으나 감촉은 선듯했다. 그녀가 전하고자 한, 소리 나지 않는 단어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레지나의 시도가 너무도 간절하여 클레이오는 손을 떨어내지 못했다.

이상한 예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두 음절로 된 한 단어.

‘정진’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고유명사.

‘정진.’

그녀는 들리지 않는 말로, 원래 그들이 알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입술의 움직임으로 그를 호명하고 있었다.

놀라운 깨달음이 ‘정진’에게 닥쳐왔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기 시작한 클레이오의 손을, 레지나는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아. 내가 □□이란 걸 이제 믿을 수 있겠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성하.”

‘정진’은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저쪽 세상의 본명을 암시하는 건 그녀가 민산인 증거라 할 수 없었다. 아니, 정말로 그녀가 그 이름을 말했는지조차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자신은 생판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이 세계에 자리를 얻었다.

이쪽 세상은 원래 세상을 참조하여 만들어졌으니, 그녀 역시 얼굴만 빌려 온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것 아닌가?

“뭘 의심하는 줄 알겠어. 내가, 네가 아는 그 애라 확신할 수 없는 거지?”

가능한 표정을 숨기려 노력하며 클레이오는 레지나를 마주 봤다. 그녀가 진짜 민산인지 아닌진 알 수 없지만, 이 레지나란 자의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널 납득시키려면,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

클레이오의 날 선 반응에 레지나는 섭섭하다는 듯 입꼬리를 내렸다. 그 움직임마저도 민산과 판박이라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삼학년 여름방학 때 과사무실 앞에서 마주쳤던 날, 온통 새하얀 군복을 입은 모습이 멋지다고 했던 거 혹시 생각나니? 날은 유난히 가물고, 네게서는 바다 냄새가 진하던 시절이었어. 너는 키가 컸고, 먼 곳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

‘정진’의 얼굴 위에 남아 있던 평정의 조각마저 뒤흔들려 깨져 나갔다.

당연히 기억했다.

휴가 나왔다가 서류 뗄 게 있어서 과사무실을 들른 적이 있었다.

계절 학기를 듣는다던 민산을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일.

몇 번이고 곱씹었던 그 말.

별 뜻 없었을 가벼운 칭찬.

흰색이라 건사하기 귀찮다고만 생각했던 하계 외출복이 으쓱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때, 방학 중이던 학교의 과사무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나는 휴학을 길게 해 너와 졸업 학기가 같았지. 마지막 학기 중간고사 뒤풀이 끝나고 네가 날 데려다준 적이 있잖아. 우리 집 앞에서 내가 너한테 졸업반지 맞추지 않겠냐고 물었던 건 기억나니?”

그런 기억은 흐려서가 아니라 너무도 선명해서 문제가 된다.

동작대교 한 편으로 뻗어 있던, 야트막한 가로 상가 뒤의 하얀 단지. 웃자란 나무 사이 낮은 건물들이 잠잠하여, 오래된 만큼이나 고즈넉했던 거리.

그날은 민산의 몸이 안 좋아, 가까운 사당동에 사는 ‘정진’이 그녀를 바래다주게 되었다.

그 부드러운 가을 밤.

키 큰 메타세콰이어 나무의 가지가 나붓이 흔들리고, 잘 쌓은 블록처럼 반듯한 판상형 건물은 끝도 없이 펼쳐진 것 같았다.

민산과 한 걸음 떨어져 걷는 그 밤엔,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마치 미로 정원처럼 느껴졌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합주택인데도, 강바람이 묻어나는 숲길을 가로지를 때에는 어쩐 일인지 단둘이었다.

졸업 반지를 맞출 거냐고 묻던 그때처럼, 민산은 ‘정진’을 올려다본다.

흰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가 되었어도 표정을 만드는 방법은 기억 속의 민산과 온전히 같았다.

“마지막 날까지 신청을 안 하기에 역시 틀렸나 싶었는데, 수업 마치고 날 찾더니 중앙도서관 뒤편에서 졸업 반지 하겠다고 말해줬잖아.”

그랬다.

졸업 후라고 풍족하게 산 건 아니지만 학교 다닐 때 ‘정진’의 사정은 비참해서, 매달 천 원, 이천 원까지 계산하면서 살아야 했다.

처지가 처지다 보니 졸업 반지값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그 주 주말에 양일로 아르바이트를 잡고서야 겨우 졸업 반지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하고 하찮은 대화를 모두 아는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진’은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그녀를 불렀다.

“정말 네가 □□이야…?”

‘정진’은 당황했다.

자신은 분명 민산을 불렀다. 성대가 울리고 입술이 움직였는데도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강제로 소리를 빼앗긴 것 같았다.

방금 레지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벌어졌던 일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너도 나처럼 이쪽 세계로 끌려 들어온 거야?”

레지나는 자그맣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정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끌려 들어온 게 아니라면, 설마 네가… 이 이야기의 저자였어?”

이번엔 더 큰 몸짓으로 레지나의 고개가 흔들렸다. 강력한 부정이었다.

“아니. 그 역시 아니야. 나는 세계를 다시 쓰는 자가 아니고, 다시 쓸 수 있는 능력도 없어. 그것은 나의 권능이 아냐.”

‘정진’은 민산, 혹은 레지나를 바라본다.

그녀에 대해서 잘 알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미지의 존재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정진’은 망설임 없이 ‘약속’의 기능을 불러냈다.

「적절성 판단」

지금 기대해볼 만한 건 그뿐이었다.

[? 「적절성 판단」을 사용합니다.

?사안의 참과 거짓, 요소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 할 수 있습니다.

*주의: 해당 기능사용 시 체내 에테르의 95%를 일시 소모합니다.]

슈우우우.

「적절성 판단」의 발동과 동시에 막대한 양의 에테르가 그릇을 텅 비우며 빠져나간다. 익숙한 현기증에 뒤이어 발밑이 꺼지는 듯한 허탈감이 밀려온다.

에테르 부족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정진’은 말을 골랐다.

“제대로 대답해 줘야 해. 정말로 너는 이 세계를 만들어낸 저자가 아닌 거야?”

“나는 이 세계를 만들어낸 저자가 아니야.”

레지나의 대답이 공간을 울림과 동시에, ‘약속’의 눈부신 빛이 ‘정진’과 그녀 사이를 휘감는다.

눈이 부신 탓에 ‘정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민산은 그 빛이 보이지 않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빛무리가 꺼진 자리에 판별이 떠오른다.

[―「적절성 판단」에 의거, 해당 답변은 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답이 나왔지만 ‘정진’의 혼란은 가중될 뿐이었다. 명쾌한 결론이 나기는커녕, 새로운 의심만 몸집을 부풀렸다.

‘애초에, 이 사람이 정말 민산인가? 말이 안 돼.’

졸업 후 민산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그 흔한 SNS조차 하지 않는 민산에겐, 신비를 해치지 못할 소문만이 드물게 뒤따랐었다.

유학을 갔다고도 했고, 학위를 마친 후 유럽의 무슨 도시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도 했다. 물론 소문을 확인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 민산이, 아무 사이도 아닌 동기와 나눴던 사소한 대화를 몇 년 뒤까지 기억하는 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은 오로지 ‘정진’에게나 중요한 사건일 터였으므로.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저자가 아니라면 나겠지. 정말로 이 모든 걸 내가 망상해낸 걸 수도 있겠군.”

힘이 풀린 채 비슬거리며 물러나는 클레이오의 옷깃을 레지나는 안타깝게 붙들려 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

클레이오는 온도 없는 무표정으로, 허공에 가냘프게 뜬 레지나의 손을 내려다봤다.

“네가 정말 그 애라면 내게 이렇게 친밀하게 굴 순 없어.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지.”

“□□아, 내 말을 들어줘. 나는 항상 네게 다정하고 싶었는데, 너는 그런 다정을 모욕으로 여겼잖니.”

가느다랗게 떨리는 고개를 들고 필사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지나의 얼굴은 ‘정진’이 모르는 것이다.

이전 세상에서 ‘정진’이 알던 그녀는, 생애 동안 한 번도 필사적이 되어본 적 없는 인간 특유의 친절과 무심을 화관처럼 두른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를 동경했다. 설령 그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진’을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였다 해도.

그 무엇이든 민산이 ‘정진’에게 간절해질 일은 전혀 없었다.

이건 너무나도 치졸하고 지저분한 환상이었다.

민산의 얼굴을 한 성스러운 존재가 자신에게 절절맨다는 설정은.

“역시 이건 저자가 날 회유하려고 넣은 요소인가? 여기로 사람을 데려왔으니, 머릿속을 헤집어 볼 수도 있었겠지. 사람을 뭘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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