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애의 장소 (2)
4월에 시작되는 여름학기는 겨울학기 때보다 챙길 게 적었다. 간단하게 짐을 꾸려주던 디오네는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건넸다.
‘뭐야, 말썽꾸러기 왕자님의 우정 어린 방문이 우리 잠자는 도련님을 깨워줬네요. 좀 섭섭한걸요.’
평소와 달리 클레이오는 그녀에게 유들유들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덕분에 기세를 올린 디오네에게서 쑥스러운 거냐, 도련님은 친구가 없다 생겼으니 한창 재미날 때다, 같은 놀림만 실컷 받았다.
그게 또 정곡이라, 클레이오는 짐을 챙기는 손만 재게 놀렸다.
‘정진’은 사실 친구라는 말이 아버지라는 호칭보다도 낯설었다. 일생 그러한 존재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말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말을 익힌 ‘정진’의 억양은 미묘하게 독특했고, 아이들은 타인의 다름에 정직하게 잔인했다.
그의 말은 문화어가 아니었지만, 표준 억양과도 거리가 있었다. 남도의 바닷가 마을에서 들리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정진’은 자라며 말이 없는 학생이 됐다. 배척은 줄었지만 또래집단에 자연스레 끼이는 일 역시 불가능했다. 그는 교사에게조차 자신의 내력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억양을 고친 뒤로도 대화가 길게 이어지면, 북쪽에 연고를 둔 늙은 학자들은 그의 말 가운데서 희미한 개성 방언의 기색을 알아챘다.
‘자네는 보면, 왜정 때 송도 사람처럼 말을 해. 없어진 억양이 있어. 조부모 중에 일사후퇴 때 내려온 분이 계시나?’
그럴 때마다 ‘정진’은 적당한 변명으로, 악의는 없으나 무례한 질문을 피해가곤 했다.
말은 오래된 표식으로써, ‘정진’을 타인과 갈라놓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가능한 한 남들처럼 살려 했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했다.
자연히 학교 동기도, 회사 동료도 생겼다.
그러나 우정이 어떤 것인지 알 기회만은 얻지 못했다. 이미 죽어 기록으로만 남은 사람들과, 책 속의 인물에게서나 친밀감을 느끼던 삶이었다.
그런 인생을 살았던 ‘정진’이 <알비온 왕국의 왕자>의 주인공과 친구 비슷한 게 된 건, 어쨌거나 일관성은 있는 것 같다.
결핍된 줄을 몰라 그리지도 않던 것이 가볍게 주어지는 세계는 새삼스럽고 낯설다.
아니, 정말로 낯선 건 아서의 태도 그 자체다.
‘어차피 이해관계 때문에 같이 가는 사인데, 진짜 친구처럼 굴잖아.’
그러나 아서가 애써 이룩한 우정은 기껏해야 반쪽짜리이다.
클레이오의 영혼과 물질적 조건은 일치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진실된 우정은 성립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나이가 몇 갠데 열여덟 살짜리랑 친구를 먹어. 친구 좋은 것도 어릴 때나 그러는 거지, 어른 되면 소식도 모르는 일이 다반사던데.’
클레이오는 그 구간에서 생각을 완전히 멈추고, 기억의 갈피를 펴내어 아무렇게나 닫아 두었다.
‘됐어, 뭐. 애가 어려서 그런 거든, 타고난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든 동료로서는 아주 믿음직하지. 앞날을 미리 걱정해서 뭐 해.’
이미 생각은 너무 많이 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더 고민하는 건 기력낭비였다.
* * *
개학 후 사흘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2학년이 되면서 검사반과 마법반이 나뉘어, 전공심화수업이 있는 요일은 아서 패거리와 일과를 따로 보내게 되었다.
아침 수련 시간도 정례화되고, 오후의 개인연습과 연구시간 역시 지도강사가 딱 정해져 있어서, 1학년 때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쓸 틈이 없었다.
‘이렇게 된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곧바로 이 꼴이 나다니.’
방학이 되기 전 연구제자가 되겠다고 약조를 한 클레이오가, 방학 중엔 심지어 5레벨을 달성해 버렸으니 제베디가 수선을 피울 만도 했다.
개학 다음 날 클레이오를 소환한 제베디는, 그를 목마라도 태워서 데리고 다닐 기색으로 몸을 들썩이며 연구제자용 별관 열쇠를 주었다.
제베디가 부임한 이래 수십 년간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방학 동안 때 빼고 광을 낸 별관은 어제 지은 것처럼 말끔했다.
‘너는 누가 간섭하는 걸 싫어하니, 내가 연구 주제를 정하진 않으마. 하고 싶은 건 마음껏 다 해 봐라. 건물 자체에 영구방어마법이 걸려 있어서 어지간한 실험으론 부서지지 않는단다!’라고, 제베디가 의기양양할 만도 했다.
가운데 중정을 두고 ㅁ자형으로 지은 메레디에스 식 2층 건물은, 남의 눈을 피해 마법 실험을 하기 딱 적절해 보였다.
어쩌다 자신이 악역 매드사이언티스트 같은 고려까지 하게 되었나 한숨을 쉬며, 클레이오는 별관의 구조를 파악하고 보안을 강화할 계획을 짰다.
그걸 위해 필요한 재료가 두 가지 있었다.
1875년산 주교의 탑 반 케이스와 학예의 영묘였다.
기숙사 침대를 차지하고서 털을 고르던 베헤못은 ‘네 실험실 단도리는 네가 하라. 본묘를 귀찮게 말라.’고 궤르륽 거렸던 주제에, 주교의 탑 여섯 병을 언급하자 신속한 태세전환을 마쳤다.
‘앞으론 연구실에 마석도 가져다 놓고, 진언 써 놓은 종이나 이것저것 남들 보이기 뭣한 걸 늘어놓게 될 텐데, 처음부터 보안을 철저히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와인 여섯 병에 4, 200디나르나 쓰게 됐다. 1875년산은 그레이트 빈티지이다 보니 해가 지나면서 병당 가격이 100디나르씩 더 올랐다.
물론, 이제 클레이오에게 그 정도 금액은 통장에서 나간다 해도 티도 안 나는 액수였다.
그래서 매년 오를 것을 기대하고, 베헤못에겐 비밀로 같은 와인 3 케이스, 총 36병을 더 매입해 아세르 저택 지하에 가져다 두도록 했다.
반쯤은 베헤못 뇌물로 쓰고, 반쯤은 나중에 백수생활 하면서 까먹을 심산이었다.
그쯤하면 열심히 잘산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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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반과 마법사반의 2학년 공통과목은 역사와 고전뿐인데, 클레이오는 수요일의 역사수업을 빠진 탓에 금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아이들 모두와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안젤리움 쌍둥이들과 첼이 기숙사 식당으로 들어선 클레이오를 반갑게 맞이했다.
신입생들은 전부 강당에 모여서 교칙 교육을 받고 있어, 2-4학년 학생만 드문드문 앉은 기숙사 식당은 한산했다.
“레이!”
“역사 시간에 결석해서 뭔 일인가 했잖아.”
“혹시 개학일 착각했던 거 아냐?”
“너흰 나랑 반도 다른데 첫날 학교 안 왔던 건 어떻게 알았냐?”
늘 그렇듯 클레이오의 양옆에 잽싸게 자리 잡은 쌍둥이가 조잘거렸다.
“아서가 말해 줬어.”
“그때 트리스테인 영지에서 사냥한 여우, 목도리로 만들었다고, 그거 갖다줄랬는데.”
“너 방에 없을 거라고 아서가 말렸어.”
“그래도 저녁엔 볼 수 있을까 기다렸는데, 맨날 학장님이 불러 가서 안 오고 말야.”
“연구제자가 뭐라고!”
늘 그렇듯 클레이오와 쌍둥이들의 맞은편엔 첼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카롤링거어 수업은 같이 수강하게 됐네. 일 년 동안 잘 부탁한다. 초보자 애들 학살 살살 하고.”
“첼, 너야말로.”
그때 이시엘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던 아서가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귀가 밝은 그는 테이블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그거! 신청! 했다!”
아서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식당을 울려 식사를 하고 있던 학생들의 주의가 확 쏠렸다.
‘저놈 또 무슨 소릴 들으려고 저러나’ 싶어 「지각」을 살짝 켜 보았던 클레이오는 은근히 놀랐다.
아서와 친구들에 대한 수군거림이 식당 곳곳에서 솟았지만, 그 말들의 내용은 적의 어리기보단 호기심 어린 것이었다.
‘하긴, 얘들은 이제 황금의 해 977기 핵심 멤버들이니까.’
아서의 행동은 수염을 기르고 거지꼴일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져, 클레이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 뒤숭숭한 감상 따위 애들 사이에선 30초도 지속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앞에 놓인 빈 와인 잔을 빙글 돌리며 첼이 이죽거렸다.
“아서, 넌 카롤링거어 알파벳도 모르잖아.”
“지금부터 배우면 되지! 난 선택과목은 딱 두 과목만 들을 거니까 괜찮아.”
조리실의 책임자를 어떻게 구슬린 것인지 와인 두 병을 통째로 받아 바스켓에 담아온 아서가, 첼의 잔을 먼저 채워 주었다.
곧 급사가 아서와 친구들의 테이블로 식사를 날라 오기 시작했다.
“카롤링거어 과목은 수강생이 적어서 분반도 안 할 텐데, 왕자 전하 이번 학기 성적도 알 만하겠네.”
2학년은 1학년과 수업 구성도 배점도 완전히 달랐다.
전공 수업 두 과목 점수가 합쳐서 250점, 공통 과목인 고전과 역사를 합쳐 100점, 기타 선택 과목 두 과목을 합쳐 50점이었다.
총점은 여전히 400점 만점이고, 2학년부터는 마법반과 기사반의 석차를 따로 매기기 시작했다.
977기 마흔 명 중 네 명이 여러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둔바, 검사반 인원은 스물아홉 명, 마법반은 일곱 명이었다.
졸업 석차 3등 안에 들어야 하는 클레이오에겐 반가운 상황이었다. 네 명만 제치면 3등 안에 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앗, 그럼 이시엘은?”
“카롤링거어는 나도 함께 신청을 했다.”
“그거 말곤 또 뭐 들어?”
“여러 과목이라 굳이 다 말하기엔 길다.”
리피의 의문은 첼이 낚아채, 이시엘 대신 답해 주었다. 본인이 말했으면 자랑으로 들렸을 만큼 엄청난 선택과목 목록이었다.
“이시엘은 말했다시피 우리랑 같이 카롤링거어, 그담엔 군사학, 수학에 더해서 마법이론도 청강 해. 나도 마법총론은 같이 들어보려고.”
“역시 이시엘이다.”
“대단해.”
막 나온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에 나이프를 대다 말고 두 쌍둥이는 감탄을 내뱉었다. 약간 질린 표정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클레이오의 귀로도 들어왔지만 들어온 그대로 다시 빠져나갔다. 이런 접시를 앞에 두고 수강신청 이야기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버터와 와인에 찐 건가?’
향기로운 허브와 옅은 꽃향기는 아서가 따라놓은 와인과 아스파라거스에서 동시에 풍겼다.
굵직한 봄철 아스파라거스를 와인과 버터에 찐 요리에, 반주로 같은 와인을 곁들인 것은 탁월한 조합이었다.
버터의 풍부한 풍미와 와인의 옅은 산미, 절묘한 소금 간, 신선한 아스파라거스의 질감을 음미하며 클레이오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단맛은 거의 없었지만 향이 달콤하고 화려해, 입 안에서 봄꽃이 피는 것 같았다.
아서가 들고 있는 술병의 에티켓에는 생소한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 맛은 익숙했다. 달지 않은 리슬링이었다.
‘와인은… 어느 모로 생각해도 리슬링 트로켄이네. 딱이네, 딱이야. 하, 봄이구만.’
물론 과거 이O트 특가 와인 장터에서 사 마시던 같은 종류 와인보다, 열 배쯤 훌륭한 맛이었지만 말이다.
아스파라거스 다음으로는 속을 리코타 치즈로 채운 호박꽃 튀김과 닭고기 속에 볶은 양파와 리크를 넣고 껍질을 바깥으로 가게 해 구운 치킨 룰라드가 곧바로 서빙됐다.
‘여기 학교식당은 나라의 보물이다… 국보라고 해도 돼.’
먼저 따끈따끈한 튀김을 반으로 가르자 새하얀 치즈가 부드럽게 녹아 접시 위로 퍼졌다.
바삭하고 촉촉한 꽃의 질감과 치즈의 상큼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에서 하나로 녹아들었다.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너무 맛있잖아….”
“그러게, 장난 아니네. 방학 지나고 오니까 샬럿 부인의 주방 통솔력이 더더더 엄청나진 것 같아.”
“샬럿 부인?”
아서가 클레이오의 빈 잔을 재빨리 채워주며 학교식당의 총조리장인 샬럿 부인에 대한 얘길 줄줄 이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그때도 샬럿 부인이 네 늦은 식사를 챙기고 있었잖아. 학교 식당의 식단은 모두 샬럿 부인이 짜는 거야. 내가 톰슨 아저씨랑 연결해드린 덕에, 늘 술은 푸짐하게 얻어먹고 있지.”
건장한 체격에 뺨이 붉고, 항상 머릿수건을 쓰고 있는 샬럿 부인을 클레이오도 기억해냈다. 물론 아서의 행태는 본인의 설명과는 좀 달랐던 것 같지만.
“그게 얻어먹는 거냐? 뜯어먹는 거 아니고?”
“에이, 너도 잘 마시고 있으면서 말이 많다?”
“그건 그거고.”
클레이오는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하고 닭고기를 나이프로 썰었다. 겉은 바삭하지만, 안쪽은 연분홍빛이 남은 치킨 룰라드의 완벽한 익힘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학교 안에만 식당이 네 갠데 품질 관리가 이렇게 잘 되다니. 샬럿 부인도 뭔가 성흔이 있나? 하, 적폐학교라 인재유치에도 적극적이네.’
정말이지 감사한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사람 입은 다 비슷해서, 아이들 사이의 잡담은 진즉에 끊겼다. 커트러리가 접시에 닿는 아주 희미한 소리나 잔이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그때였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식당으로 뛰쳐 들어온 남학생이 있었다. 교복 재킷 안의 비단 조끼며, 화려한 검대를 보니 4학년이었다.
“모두 주목! 다들 들어 봐!”
몇몇 고학년들이 시큰둥하게 접시에서 고개를 들었다.
“뭔데, 마크.”
“오늘 저녁은 무지 맛있다고. 괜히 방해했다 별일 아니면 원망할 거야.”
마크라 불린 학생은 친구들의 냉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막 알게 된 소식을 퍼트리고 싶은 의욕이 앞서서였다.
“지금 밥이 문제냐? 들어 봐. 마법반 길라드 에클립시가 퇴학당했어!”
일순 식당 전체가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놈일 줄 알았다.’ ‘또냐.’ 따위의 웅성거림이 높은 아치형 천장 아래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