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봄 (6)
청소년기는 벗어났지만 완연히 성인도 되지 않은 첼은, 중성적인 미모가 최대치로 개화하여 밤에 보는 남색 붓꽃 같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런 외모를 가지고서 전력으로 귀여운 아가씨들을 꼬여내고 다니는 만큼, 그녀에게 도착하는 러브레터의 분량도 엄청났다.
‘하급생 중에 아서 팬클럽은 없어도 첼의 팬클럽은 있댔지. 남녀공학인데도 학교 축제 때 늘 연극의 왕자 역을 첼이 맡는 건 다 이유가 있고. 아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그렇다.
학교에 재학 중인 진짜 왕자는 검술 연습밖에 모르는 데다, 그나마 있는 취미라곤 음주인 놈이다 보니 신문 기사만 보고 잔뜩 환상을 키웠던 신입생들이 실물을 보자마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오히려 실물이 사진보다 더 멋진 데다 매너가 산뜻한 첼이, 수도방위대 학교의 왕자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에즈라와 클레이오가 시답잖은 잡담을 하는 새, 순식간에 다섯 합이 더 오가고, 결국 아서가 승기를 잡았다.
아까 내리꽂은 첼의 검을 날 밑으로 잽싸게 받아내더니, 물러서지 않고 한 발 더 다가온 그녀를 리치의 안쪽까지 끌어들인 후 순식간에 검을 뒤집어 첼의 어깨를 베어냈다.
퓨슛!
첼의 대련복이 찢겨나가며 새빨간 피가 흰 천위로 파르르 번져나갔다.
‘꺄아아-!!’
‘어떡해!’
‘첼 님!’
어디선가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첼은 부상 따위 아랑곳 않고 다음 공격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의 성미를 잘 아는 로사와 게오르게가 얼른 시합을 끝내버렸다.
조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2학년 검사반 준결승, 아서 리오그난 승!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 학생은 바로 치료실로 이동합니다. 실시!”
첼이 뭐라고 항의하는 커다란 소리가 연병장을 울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리피와, 하우스 메이트의 난리를 못 본 척해 줄 정도의 융통성은 있던 이시엘이 곧이어 시합을 시작했다.
“저 사슴 같은 꼬맹이도 용맹하기는 표범 같으네~. 캬, 차기 장미의 기사에게도 훅 밀리질 않잖아! 하여간 977기는 보는 재미가 있어~.”
장미처럼 붉은 머리를 한 이시엘은 어느샌가 ‘차기 장미의 기사’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검술 과목이야 2학년 때부터 아서가 1등을 차지하고 안 내놓았지만, 여전히 전 과목 종합 석차는 이시엘이 1등이었다.
다 밤낮없는 수련과 정진의 결과인데… 이 흰털 난 마법사가 흥미 위주로 지껄이니 마음이 좀 식었다.
“세르게프 부단장님 재미를 드리려고 수련을 하는 건 아닙니다. 뛰어나고 성실한 친구들이죠.”
“어이구, 그걸 누가 몰라? 저 이파리 머리핀 머리에 단 애가 지금보다 키가 요만치 더 작았을 때, 우리 후배님을 번쩍 들고서 연병장을 파파팟 가로지르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못 해~.”
“아니, 그런 건 왜 기억하고 그러십니까.”
“야아~ 평생 두 번은 못 볼 광경인데, 어, 그걸 어떻게 까먹어~! 크흐흐흐.”
리피와 레티샤는 이제 키가 많이 커서 이시엘과 눈높이가 엇비슷해졌다.
레벨은 이시엘이 한 레벨 더 높았지만 숏소드와 레이피어를 함께 쓰는 리피의 공격은 꽤 상대하기 복잡했다.
“햐, 저 애들이 전부 내후년이면 수도방위대에 온단 말이지. 거, 옆 건물 쓰는 기사들이 아주 기대가 만발이야.”
수도방위대 학교의 졸업생들은 원칙상 2년간 수도방위대에서 의무복무를 해야 했다. 검사라면 예비 기사 기간을 보내고, 마법사라면 마법단 소속 수습이 되었다.
의무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는 정식으로 기사 위를 받을 이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기사 위를 받지 않을 이들이 나뉘곤 했다.
아서와 친구들은 전자도 후자도 택할 수 없다. 그러니 의무복무 기간이 끝나는 시점이, 서사의 분기점이 될 거라고 클레이오는 예상했다.
그때를 대비해 슐리만 키시온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물심양면 노력했다.
신년회와 탄신연에 모두 참석하도록 이시엘을 통해 설득하고, 첼이 줄을 댄 다른 하급 귀족과도 안면을 익히게 했다.
성실하고 무던한 무인 슐리만은 변경 군영을 운영하는 이들에게 호감을 사는 성미였다.
하나하나는 작은 지지이더라도, 만일의 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의 성명이나 상원에서의 표결이 영향을 끼칠 걸 생각한 안배였다.
클레이오가 차근차근 포석을 까는 동안, 원고는 한동안의 과속을 만회하듯 전개의 고삐를 늦춘 상태였다.
‘지난 원고가 완전 도움은 안 돼도 큰 틀은 그대로니까. 그 판본에서도 의무복무 중에 첫 결전이 벌어져 기사예비생들의 [언약]과 서임이 미루어졌었지. 아서가 멜키오르 상대로 [언약]을 하면 전개가 안 되니까… 그럼 이번에도 의무복무할 때쯤 일이 시작되겠지.’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미래였다.
클레이오 본인은 의무복무를 피하는 게 확정되어서 더 실감이 안 나는지도 몰랐다.
제베디의 연구제자로 알려진 그는, 수도방위대 마법단 부단장의 열렬한 추천서에 힘입어 졸업 후엔 수도방위대 ‘객원’ 마법사가 될 예정이었다.
객원은 수도방위대의 병영 숙소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고, 출근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되는… 매우 꿀보직이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 얻은 애제자를 절대 군대에 보낼 수 없다는 제베디의 의지와, 저 재밌는 마법사는 자신이 전담으로 데리고 놀아야 한다는 에즈라의 땡깡이 만나 이루어낸 공모였다.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던 마리아 교수는 아연한 듯 이렇게 평했다. ‘절대 화해 못 할 것 같은 두 사제를, 클레이오 군이 다시 이어놓는군요. 늘 생각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학생이에요.’
절대 그런 말을 들을 일은 하지 않았기에, 마리아 교수의 칭찬을 들으며 클레이오는 부끄러움에 등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정작 마수 피를 반출한 범인은 못 잡고, 남들에겐 에즈라 이 인간의 절친 취급을 받게 됐으니… 휴.’
1차 마수준동 사건이 벌어진 이후 온 세상에 마수 피가 지천으로 널리게 됐다. 마수 바르그에서 나온 부산물의 반출 경로 추적이 불가능하게 됐단 뜻이다.
‘마수의 피가 잔뜩 생겼으니 아슬란 일파가 만들던 히드라의 독도 양산 가능해졌을 거고.’
1차 마수출몰 사건 이후 최고영예훈장을 받은 아슬란은, 크뤼엘 기사단의 지휘관 자격을 청해 가진 뒤 서남수비군의 군영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쥴레이카 역시 신경쇠약을 핑계로 니네베 호수의 궁전에 가 있기 일쑤였다.
‘공작의 영지와 니네베 호수는 마차로도 반나절밖에 안 되는 거리지. 이건 우연이 아냐.’
모자가 거기 틀어박혀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슬슬 캐보려던 차, 쥴레이카의 부친인 프리드리히가 병석에 누웠다.
브룬넨의 황제 요아힘의 작은아버지이자, 아슬란의 외조부가 프리드리히였다.
2왕자는 외조부의 와병을 핑계로 쥴레이카를 수행해, 모친의 고향인 마인라트 공국에 콕 처박혔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이지. 진짜 병간호를 하러 간 건 아닐 테고.’
클레이오라고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히드라의 독을 추적하는 프란을 전력으로 지원했다.
지난 1년간 가장 놀라운 업적을 이룬 사람은 역시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였다.
본래라면 알비온의 과학기술 판도를 바꾸어 놓았을 열정과 의지로 그는 히드라의 독 조사에 천착했다.
페셀른 시에서 시작된 여정은 알비온 남부의 크뤼엘 영지와 브룬넨 서부를 돌아, 결국 핀토스 산맥으로 되돌아왔다.
최근 편지에선, 가수 게하임이 증언했던 것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마인라트 영지를 중심으로 발견된다고 했다.
‘마인라트 영지는 키시온 영지에서 핀토스 산맥을 넘으면 바로 나오는 브룬넨 땅이지. 쥴레이카의 고향. 아슬란이 개짓을 하는 근거지도 거기일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
프란이 이뤄낸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지브릴 블랑쉬란 이름으로 <클라리온>에 기고를 계속하는 그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자유 기고가였다.
‘뭘 해도 될 놈이라니까.’
또한 최근 알비온 운송조합수도지부의 파업을 촉발시킨 파업촉구 포스터의 익명 작성자, 통칭 세인트 폴리오도 프란인 게 분명했다.
‘인쇄된 텍스트에 성흔의 기운을 띠게 할 수 있는 놈이 두 사람 있을 리 없잖아. 아니, 있어도 곤란하지.’
머잖아 프란은 조사를 마무리할 것 같았다. 실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편지가 지난달에 도착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으니, 슬슬 다음 편지가 올 때도 됐군. 내일은 우체국 사서함을 확인해봐야겠어.’
클레이오가 딴생각에 빠져 있는 걸 알았는지, 에즈라가 빈 컵을 클레이오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후배님? 후배니이임~? 정신이 빠져나간 건가? 유체이탈~?”
“아닙니다. 듣고 있었습니다. 새 환수를 만들어보려 하신다고요? 토순이는 엡실론 버전에서 더 안 만드는 겁니까?”
“할 건데! 그전에 먼저 할 일이 생겼어. 이번에 파견 나갔다가 어, 유니콘의 뿔이라는 화석을 샀단 말이야!”
“이번에도 사기당한 거 아니고요?”
“아니~야, 아냐, 아닐 거야. 후배님이 한 번 감정 좀 해 줘. 디오네가 그러는데 후배님은 감정도 천재라면서어~.”
“감정 비용만 지불하신다면야 언제든지요.”
“아마 진짤 거야. 시간의 금모래랑 마석 오팔은 구해 놨고, 마석 은발굽은 제작하려고 해. 거기에 뿔이 있으면 유니콘을 시도해볼 만하다고.”
“흐음. 다 만든대도 말이죠, 제가 알기로 유니콘은 순결한 자에게만 곁을 허락하지, 아니면 그 뿔로 찔러 사람을 해친다지 않습니까?”
“그건 문제없어! 나! 나 완전 순결해! 티 하나 없이 순결한 몸이야!”
에즈라가 양 주먹을 꽉 쥐고 벌떡 일어난 바람에 컵이 깨질 뻔했다. 재빨리 [감속] 마법을 펼쳐 유리컵을 구해낸 클레이오는 180%의 진심이 담긴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만 말하세요. 안 알고 싶습니다.”
“나도 후배님이 알라고 한 말은 아니고… 그게… 있지… 디오네가 편지 답장을 안 주는데… 유니콘 만들면 또 놀러 오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마까지 불그레하게 붉힌 채 손을 꼼지락대는 에즈라는 못 봐줄 꼴을 하고 있었다.
‘유니콘이 아니고 유니콘 할애비를 데려와 봐라, 레이디 디오네가 신경을 쓸지. 쯧.’
차라리 유니콘의 뿔이 만병통치약이라 갈아서 건강 관리식품으로 양을 불려 팔아치우면 떼돈을 번다는 소릴 하는 편이 답장을 받기 쉬울 것이다.
“하나만 묻지요. 레이디 디오네가 이전엔 세르게프 부단장님의 편지에 답장을 줬습니까?”
에즈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었다.
“…마수들이 많이 나올 때는.”
“그럼 또 마수가 나오길 기다리세요.”
“안돼에. 싫어~. 마수가 나오면 행사가 다 중지되잖아. 유니콘을 같이 타고서, 올해의 만국박람회에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접근하다간 천 년이 지나도 디오네에게 다가갈 수 있을 성싶지 않지만 그의 연애사에 조언을 해줄 의리까진 없었다.
그래서 다른 부분만 지적했다.
“올해 박람회 개최지는 브룬넨입니다. 정말 유니콘을 만들어 내신대도, 그걸 타고 갈 만한 거리는 아닌 것 같군요.”
“브룬넨이었어? 박람회는 늘 룬데인에서 하는 것 아냐?”
클레이오는 수도방위대 부단장이란 자의 몰상식함에 말을 잃고, 얼음이 녹아버린 스프리츠만 한 번에 원샷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