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165화 (165/489)

영구하지 못한 평화를 위하여 (5)

베헤못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고르르륵― 도르륵―.”

최근 수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에스프리 레스토랑의 쉐프 스페셜, 메리디에스 식재료로 꾸린 14 코스 정식을 모두 해치운 베헤못은 클레이오의 침대에 푹 퍼져 있었다.

리오그네스 블랑 드 블랑으로 시작해 그랜드 빈티지의 톨리툼 글리씨니, 부디갈라 와인을 거쳐 브랜디로 끝나는 주류 곁들임 마라톤을 베헤못은 기꺼이 완주했다.

‘저거 뱃살이… 이제 원시주머니로 핑계 댈 수준을 넘은 것 같지만, 잘 먹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쩌겠어.’

키시온 자작의 반역 혐의 조사, 아니 이제는 ‘브룬넨 초소습격 사건’이라 불리는 일 이후 세 번에 걸쳐 은혜 갚음을 실천하고 있는 클레이오였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고양이는 잘 먹여놓으니 퉁퉁 불어나 이제는 펼치면 카펫처럼 커다랬다.

옆으로 축 처진 뱃살을 살살 조물거리며 클레이오도 생각을 가다듬었다.

술을 잔뜩 마시고 곯아떨어진 베헤못은 만져도 수염만 옴찔대지 후려치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열어놓은 창에서 완연한 초여름의 공기, 노릇한 석양의 냄새가 풍겼다.

‘올해는 장미도 제대로 못 봤네.’

때는 어느덧 유월. 벌써 기말고사가 지척이었다.

술기운을 떨쳐내며 작문 과제를 꺼내 놨지만 영 건성이 된다.

클레이오는 대충 끄적거린 과제를 밀쳐두고서 매물로 나와 있는 포도원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했다. 후보는 서너 군데로 좁혀졌는데 그중에서도 니네베 호수 부근에 있는 루아르 블랑 품종 포도밭의 와인이 가장 베헤못의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베헤못과 자신을 위해, 와인 몇 배럴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포도원을 사겠다는 결심을 실천하는 중이었다.

‘돈 벌어서 뭐 하겠어. 몸 멀쩡하고 운신에 자유가 있을 때 써야지.’

아이들과 함께 학교로 돌아온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때로 그는 일상의 평온이 새삼스러웠다.

학교 시계탑의 종소리와, 숲을 흔드는 바람, 연구실의 그늘에서 보내는 오후.

이 모든 것에 예상보다 훨씬 더 마음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아서가 풀려난 다음 날, 조간은 초소 습격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멜키오르는 기사의 통제가 불가능한 걸 깨닫자, 아예 정보가 범람하여 오염되도록 풀어버렸다.

프란의 사진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사진에 찍힌 내용이 곧 진실로 간주되던 시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룬넨의 대사는 자신들이 지시한 작전이 아니며 일부 기사의 일탈이라 발뺌했고, 알비온 측은 올해 데르니에 대륙 교역 회의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엎어져도 맨손으론 안 일어나는 국왕 대리가 계시니 어련할까.’

여전히 지독히도 경제적으로 활동하는 작자였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비록 [언약]의 뜻은 못 이뤘다 하나, 아서의 군사적 기반이 될 키시온 자작령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태서턴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해봤다.

‘거기다, 키시온 자작령과 브룬넨의 접경지역에 침잠의 오닉스가 매장돼 있었다니. 그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냐고.’

헤브론 성으로 복귀한 트루데에게 듣기로, 트리스테인 공작이 한 주머니 분량의 마석 오닉스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 정도 분량이면 꽤 오랫동안 왕세자의 스킬 후유증을 막아 줄 것이다.

어쨌거나 키시온 영지의 사병은 브룬넨의 폭주한 귀족 기사 덕으로 면죄부를 얻었다.

‘키시온 자작이 우직한 애국자인 게 알려져 있기도 했고.’

왕실 자문위원회에서 이뤄진 슐리만 키시온의 자기변호 역시 차근차근 받아들여졌다.

징계는 벌금으로 끝났다.

미등록되었던 병사, 무기, 무소속 기사들이 모두 제대로 된 군적을 얻었다.

돌입 당시의 인명 피해는 비교적 적었지만 재산상의 피해는 막대했기에 그에 대한 보상안도 마련되었다.

신청해도 오지 않는 마광석 철 무기, 기사 증원을 요청해도 답신이 없는 중앙 군부의 행태는 폐기 서류 캐비닛에서 키시온 자작의 편지가 발견되어 더더욱 비판받게 되었다.

신문 기사가 나간 후 한 주도 지나지 않아 동북 수비군으로 갈 자원을 횡령한 혐의로 군수부 행정관 하나가 자살했다.

그는 아슬란 일파인 램즈데일 백작 측에 선을 대고 있던 자였다.

꼬리 자르기가 분명한 씁쓸하고 흐지부지한 마무리였다.

‘조지프 크뤼엘이 날뛰도록 방조했던 멜키오르도, 진짜 브룬넨이 침공했을 때 키시온 영지가 곧장 뚫리긴 원치 않았던 거지.’

멜키오르는 반드시 알비온의 왕으로서 대관 일식을 일으켜야만 할 테니까.

키시온 자작령의 일은 연막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사태를 일으킨 주목적은 [언약]의 강제 같았다.

클레이오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쌍둥이들이야 아버지와 유명인 고모가 보호를 해 줘서 어떻게 잘 지나갔지만, 이시엘은 정말 큰일이었지.’

자신의 주군은 심문실로 끌려가고, 존경하는 부친은 영지에 구금됐으며, 동료들의 소식은 알 수 없고, 나고 자란 성이 반파되기까지 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견뎌내기 어려웠을 재난이었다.

풀려난 이시엘은 어려움을 내색 않고 오히려 아서와 친구들의 안부를 먼저 챙겼다.

멜라미드의 장원에 구금된 동안 태어나 처음 보는 외가 식구들에게 박대를 당했던 것 같았는데, 내심은 첼에게나 조금 털어놓았을 뿐 안으로 삭이는 게 보여 안타까웠다.

본래도 미소가 넉넉한 소녀는 아니었지만 자작령의 일 이후론 영 웃지를 못해 클레이오는 마음이 안 좋았다.

‘그리고는 한다는 게 또 그 지옥훈련이고. 오죽하면 로사 교수가 다 만류를 할 지경이냐고.’

누가 남매 같은 사이 아니랄까 봐 아서나 이시엘이나 행동 패턴이 꼭 같았다.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리면 스스로를 단련하며 마음의 혼란을 잠재우는 것이다.

본래도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훈련을 하던 이시엘은, 이제 개인 시간이란 걸 두지 않고서 공부와 수련에 매진했다.

그나마 하우스 메이트인 첼이 이시엘이 부러지지 않도록 살살 달래고 있어 다행이었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다시 시작된 학교생활이었다.

결석을 대체할 실습과 과제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써야 하는 나날이 돌아온 것 자체가 선물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1급 반역 혐의에까지 연루되었던 학생들이 마찰 없이 복귀할 수 있었던 배경엔 제베디의 헌신이 자리했다.

그 일주일간 제베디는 사방으로 뛰느라 바빴다고 들었다.

야밤에 자신의 학생을 연행해간 내무보안국 측으로 정식 항의를 보내고, 왕실 마법감의 이름으로 상원 교육 행정 위원회를 소집하기까지 했다.

평소에는 의회 개회와 폐회 말곤 강도 건너가지 않는 노인이,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벌인 구명 활동은 눈물겹도록 절절했다.

거기에 쌍둥이들의 고모로부터 비밀스런 연락을 받은 안젤리움 자작까지 상경하여 키시온 자작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데 주력했다.

막후의 협상 끝에 977기 멤버들의 결석은 귀족 가문간의 알력싸움 탓으로 무마되었다.

‘하지만 오월 무도회는 완전히 물 건너갔고. 리피랑 레티샤가 실망한 것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네.’

1892년의 오월은 폭풍처럼 닥쳐왔다가 휩쓸리듯 지나갔다.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에는 더 시급한 일을 해결하느라 흘려보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고 화나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멜키오르가 했던 협박의 내용이었다!

‘지나고 보니 진짜 어이가 없네. 토지 몰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그 엄청난 왕실 소유지부터 먼저 토지개혁 하시지.’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죽창질을 당하는 데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고작 최하급 귀족이자 도시 부르주아지 나부랭이의 아들인 자신이 왜 왕족이자 광산주에게 그런 협박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클레이오는 실로 오랜만에 원색적인 욕설을 속으로 되새겼다.

‘신에 대한 원망이라면 한 수 물러주겠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잖아!’

토지 매매와 등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법규에 속한 일이니 그에 따라 판단해야 옳다.

하지만 신의 목적을 탐구하는 일은 다르다. 신의 뜻은 토지대장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문서가 아니다.

최종고의 읽기란, 지독한 연무 속에서 구절구절을 되씹으며 불확실한 진리를 더듬어가야 하는 고독한 추측의 작업이었다.

삽시간에 마음이 설렁해진 클레이오는, 어느새 똬리를 튼 자세가 된 베헤못 뒤에 살며시 몸을 누였다.

그대로 팔을 뻗자 거대한 고양이는 클레이오의 품에 한가득 들어찼다.

마구 묻어나는 털뭉치에 코를 박고서, 한참 미뤄두었던 주제를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 본다.

‘8교 이전의 원고는 알 수 없지만, 8교의 문제는 확실해. 저자는 결코 이 세상의 에테르가 폐하길 원치 않는 거야.’

「기억」은 레지나의 호소를 코로스의 합창처럼 머릿속으로 울리게 한다.

‘부디 저자의 뜻을 이루어 줘, □□아. 저자가 선택한 왕이, 저자가 선택한 왕국이, 저자가 선택한 기술이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아서가, 알비온 왕국이, 에테르에서 비롯된 기술이 미래를 가지는 것.

이 세계의 신이자 저자는 바로 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알비온 왕국의 왕자>를 다시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멜키오르 같은 규범외의 인물이 판면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할 위험을 안고서도.

‘므네모시네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게 에테르를 폐하고 신과의 연계도 끊는 방법이라면, 왜 원고가 알비온을 배경으로 가져야만 했는지는 알겠어.’

이 세상 전체에서 오로지 알비온에만 므네모시네의 문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신은 자신의 영향력이 끼치는 장소를 서사의 무대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 세계는 이전 세계와 달리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미와 이유가 부여된 곳인데, 알비온이 신의 마지막 시험장이 된 것이 우연이겠는가.

‘그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에테르 활용 기술 역시 알비온이 단연 뛰어나. 카롤링거는 마법 학교와 교회 문에 못을 박고 여신상을 태워버렸지. 브룬넨 인들은 일껏 일군 과학 기술로 신무기 개발에나 열을 올리는 쪽이고.’

지난 원고에서도 알비온보다 산업화 시기가 뒤쳐졌던 브룬넨은 군사력으로 자신들의 열세를 만회하려 들었다.

그 결과가 알비온 침공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결국 왕자의 난으로 발전해, 멜키오르가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는 것으로 끝난다.

클레이오는 저 낙원의 시대가 피와 철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역사의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 여겼지, 결코 일어나선 안 될 비극이라 여기지 못했다.

지난 세상의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 초엽까지를 살아낸 기억을 가진 그였다.

이전 세상에선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사시는 역사에 자리를 내어주고, 신화는 과학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알비온 왕국의 왕자>에서 인류가 신의 요람을 벗어나 에테르를 잃는 것까지도, 저자가 의도한 결말이라고만 생각했다.

정작 신이 보기에 ‘마지막 세계’가 맞은 여덟 번째 결말은 좋지 않았고, 온당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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