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179화 (179/489)

예언자 마르키온 (1)

클레이오도 기억해냈다.

길라드 에클립시는 소환술을 시도해 퇴학당한 학생이었다.

그 때문에 클레이오와 아서가 일 년 전, ‘원형 극장’ 던전이 열리던 날 므네모시네의 문 경비를 서게 됐었지 않은가.

“딱 맞아. 그 목소리에다가 키는 좀 컸고, 살은 빠졌네. 에클립시 집안에서나 나오는 그 묘한 머리색이면 틀림없어. 퇴학 후론 소식이 안 들려서 어디 가서 뭘 하나 했더니, 이런 짓거릴 하고 다녔을 줄이야.”

“소환술 사건 직후 직접 만나보았지만, 에클립시는 그리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어떻게 두 해 만에 클레이오조차 알아볼 수 없는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지?”

“그러게 말야. 걔는 항상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변변찮은 마법사였는데, 이젠 에테르 색 때문에 메이지 마스터인가 헛갈릴 정도였어.”

“에클립시의 에테르에 색이 있었나?”

“응, 청보라색. 하지만 레벨 판별이 안 됐어. [에테르 감지]가 전혀 안 먹히던걸.”

첼의 대답을 들은 이시엘은 조금 더 딱딱해진 표정으로 클레이오를 쳐다봤다. 클레이오 역시 고개만 저었다.

예상되는 바는 있었지만 말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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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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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고 누우니 창밖은 이미 밝다.

새소리가 들리니까 잠이 안 왔다.

감은 눈 안으론 여전히 그 해석되지 않는 마법, 아니 정말로 마법인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기적극의 장면이 재생된다.

‘그건 어쩌면 진언의 힘이겠지.’

길라드는 분명 세계를 넘어서, 클레이오가 태어났던 이전 세상의 문장을 엿보았을지 모른다.

그 가능성 말고는 저 규격 외의 마법을 설명할 가설이 없었다.

내막은 짐작이 갔다.

클레이오가 이쪽 세상에서 다시 깨어난 날 길라드는 소환술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의 소환은 성공했다.

그러나 세계가 열린 순간 저쪽 세상에선 클레이오의 영혼 이상의 것이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가 저 마법이 된 것이다.

‘이거 역시 내 자리를 만들어 주려다가 생겨난 오류인 게 아닐까? 무리한 조정이 남긴 여파.’

이제 길라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참칭하며, 마치 멸망에서 사람들을 구원해줄 지도자처럼 군다.

‘그렇지만 그 예언은 절대 신의 의도가 아냐.’

***

닷새 후.

디오네는 클레이오가 손수건 위에 펼쳐놓은 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긴 단풍처럼 생긴 풀의 냄새를 킁킁 맡고선 핏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거 ‘오니로’잖아요. 핀토스 남부에서 자라는 환각성 약재죠. 유행이 너무 지나서 이런 건 아무도 안 하는데 말이죠.”

클레이오가 입수 경로를 설명하자 디오네의 분석은 더더욱 신랄해졌다.

“보통은 담배처럼 말려서 피는데 중독성은 없어요. 흡입하면 환상을 보긴 하지만 효능도 약하죠. 옛날 전쟁 때 진통제로 이용되기도 했어요. 내참 이런 수법으로 아직도 장사가 되다니!”

“장사가 되다 못해 대단한 흥행 중이었습니다. 가면을 써도 초대장으로 몇 번째 참관객인지를 알아보고서, 두 번째 이후는 일만 디나르는 내야 쇼를 보게 해 주던걸요.”

“와우, 거기 참석자가 몇십 명은 된다지 않았어요? 수완만은 엄청나군요. 하지만 작작 해야지, 그렇게 크게 해 먹다가 망하는 거라고요.”

강령술은 다 사기라고 취급하는 디오네가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처럼 법과 규칙을 잘 지켜 상업 활동을 하는 상인은 사기꾼들을 혐오하게 되어 있었다.

“귀신이 집세를 내나요? 예언자가 부동산 소개인을 찾아다니나요? 어림도 없죠. 다 개소리라니깐.”

“레이디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거 봐요.”

디오네는 강령회 저택의 현재 임차인과 라모르의 정체를 요령 좋게 조사해줬다.

서류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카롤링거의 귀족은 무슨.

‘검은 머리도 염색이었고. 원랜 더 밝은 색이잖아.’

흑백 사진 속 좀 더 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마담 라모르의 본명은 메리, 극히 평범한 알비온 이름이었다. 이것저것 시시한 사기를 치고 다니는 뒷골목 영매사가 그녀의 정체였다.

즉, 그녀는 바지사장이다.

귀한 화산암 석재로 외벽을 마감한 저택 역시 소유자가 스페쿨룸 공국에 있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저택의 진짜 임차인은 어느 사업가가 노반테스에 숨겨 둔 정부였다. 아마도 마담 라모르와 뒷골목 시절 알던 사이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진짜 몸통은 길라드 그놈이란 뜻이 되나? 이걸론 단서가 부족한데.’

***

초여름의 화창한 한낮인데도 수도방위대 마법단 기동조사 분과 소속 다리아 이사이 대위의 기분은 저기압이었다.

요 몇 주 내내 혼자서 에즈라의 감시를 맡고 있는 탓이었다.

마수의 출몰회수가 늘면서 원래는 에즈라의 개인 팀 같았던 ‘수도방위대 마법단 기동조사 분과’에도 책정된 예산과 역할이 함께 늘어났다.

그 말은 즉슨, 서류 업무 역시 폭증했다는 뜻이다.

에즈라의 부관인 아레미스 소위는 상사가 완전히 방기해놓은 서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다리아와 헤스터가 에즈라 놈의 뒤꽁무니는 쫓아다니는 판이 되었다.

타디우스 예츠켈 단장은 ‘연구마법사들만 그동안 재미를 많이 봤는데, 드디어 밖에서 발로 뛰는 너희도 빛 볼 날이 오나 보다.’ 따위의 평이나 남기며 빙글거렸다.

확실히 마법단 안에서 기동조사 분과는 이질적인 소수이긴 했다.

불을 일으키는 일에만 능숙한 다리아 자신, 환상생물에만 집착하는 에즈라, 노반테스의 서민 지역 태생으로 씩씩하게 뛰어다니며 치유 마법을 거는 헤스터, 서른 살도 넘어 하사관 시절에 에테르 감응력이 발현 돼 레벨이 낮은 대신 마법사 중에선 드물게 검술의 소양을 갖춘 아레미스.

기동조사 분과의 구성원은 출신과 상관없이 그리 고귀한 사람들이 못 되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마법사 상과도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콧대 높은 마법사들과는 잘 섞이질 못하는 것이다.

‘젠장. 이제 와서 빛 본다고 더 좋아지는 것도 없고.’

그 와중에 자신의 마법 파트너이자 단짝이고 동창인 헤스터 워드가 언니의 출산을 돕느라 휴직을 했다.

다리아는 화만 늘고 의욕은 줄었다.

언니의 출산 같은 건 하녀나 유모에게 맡겨도 될 것을, 직접 돌보겠다고 달려가다니. 헤스터는 진짜 착해빠졌다.

‘에즈라 새끼가 치는 사고는 그대론데 수습할 사람은 하나 줄어드니 나만 죽을 맛이고.’

헤스터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사려 깊고 친절한 친구였다.

다혈질인 다리아나 상식 없는 에즈라와 달리 남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지혜롭게 갈등을 풀어주었다.

마법사 중에서는 초 희귀종이라 할 만했다.

그런 헤스터의 빈자리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에즈라 개자식. 새로 만든답시고 시험 중인 마도구는 쓸모도 없으면서 사람 뺑이를 치게 하고.’

거기에 놈이 빽빽 우겨 ‘고문’이란 감투를 씌워준 새파란 어린애까지 나타나선 주제넘은 소릴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다리아는 에즈라가 소개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의심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저 자식과 어울리는 놈이 제대로 된 인간일 리 없다고. 그런데 감히 헤스터를 모함해?!’

“클레이오 경이 잘못 아는 거 아닌지? 헤스터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냐. 학교 다닐 때부터 최고의 모범생이자 지성과 성품을 갖춘 인재였지.”

다리아의 솔직한 경계를 받으며 클레이오는 쓴웃음을 삼켰다.

안 그래도 믿음 안 가는 에즈라의 소개로 내려온 낙하산이, 유능하고 인성 좋은 동료를 사기꾼 집단의 일원 아니냐 묻는다면 자신이라도 저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리아의 표정은 트리스테인의 추위보다 더 싸늘했다.

광택이 도는 구릿빛 머리카락에 초록빛 왼눈, 푸른빛 오른눈을 가진 마법사의 미모는 몹시도 화려해, 그런 식으로 노려보면 엄청난 박력이 있었다.

“지금도 언니의 출산을 돕느라 고향에 돌아간 것뿐 가을이면 복귀할 우리 팀 최고의 회복술사인데, 우리 부서의 인재에게 그런 모욕적인 혐의 제기를 하다니 몹시 불쾌하군.”

다리아가 탁! 하고 위협적으로 발을 구르자, 그녀 주변에서 거의 자동으로 서클이 열리며 파르르 불꽃이 피어올랐다.

“워, 워. 다리아 조금만 참아~. 안 그래도 더운데~ 불은 그만.”

“이 자식이! 누구 때문에 일이 늘어난 건데!”

5레벨 마법사인 다리아는 화염 마법의 달인이었다.

야간 전투 혹은 수색 시 조명을 밝히거나, 우거진 숲에서 서클 안으로 화기를 제어하여 길을 내는 일에 뛰어났다.

공격력이 낮다 해도 불은 불.

이렇게 가까운 데서 서클을 펼치면 머리카락 정돈 쉬이 태울 수 있다.

클레이오는 방어 마법을 발동할 준비를 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리고 다리아의 의견을 토대로 적절히 말을 꾸며냈다.

“헤스터 대위님이 사기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이 아니라, 워낙 뛰어난 재원이시다 보니 사기집단에 잠입하는 비밀임무를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이 한껏 물러난 중재안은 에즈라에게 곧바로 반박당했다.

“헤엥~,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데~, 후배님. 생각을 해 봐. 국왕 대리께서 멍청이도 아닌데 그런 임무가 우리 부서에 올 리 없잖아아~.”

에즈라 뒤에서 다리아가 한 손으로 뒷목을 잡는 게 보였다. 확실히 부서의 장이 할 말은 아니긴 했다.

‘그야, 뭐….’

에즈라의 분과 사무실과, 바로 곁에 붙은 그의 연구실은 꼴만 봐도 기밀을 처리할 만한 공간 같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몇 년간 공들여 애를 써 어지럽힌 결과 마침내 미로를 만들어버린 수준으로, 마수 피 부산물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티도 안 날 만큼 엉망진창인 장소였으니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인사 파일을 구해 봐도 헤스터의 이력은 오랜 친구인 다리아가 말한 바와 꼭 같았다.

제베디가 학창 시절 성적표에 써놨던 구절 그대로, 타의 모범이 되며 지덕체를 갖춘 마법사였다.

‘진짜로 잘못 짚은 건가. 흠.’

허탕을 친 클레이오가 일어나려는 때 에즈라는 갑자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후배님후배님후배님, 잠시만, 가지 말아봐~.”

“네? 이야기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아아니~, 그게~ 뭐냐, 내 빤짝이 가져가!”

횡설수설하던 에즈라는 한참이나 쓰레기장 같은 책상을 뒤지더니, 마석 수정을 둥글게 깎은 마도구를 꺼냈다.

딸각.

그가 원 중심을 더듬어 힘을 주자 구는 복잡한 이음매를 드러내며 두 개로 갈라졌다. ‘약속’이 메시지를 띄웠다.

[포옹의 반구

?등급: 최상품

?두 개의 구는 에테르 반응에 힘입어 서로의 위치를 추적 가능.

?주: 1회용]

척 봐도 품질이 뛰어난 마도구였다. 클레이오는 너무 좋아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걸 왜 제게….”

“혹시 모르니 그 저택 주소를 놓고 이거 들고 가라고~. 일정 이상의 에테르 반응이 감지되면 경보가 발동돼. 그럼 나와 다리아가 달려가 줄게~.”

“저택은 노토스 지구 외곽인데 거기까지 신호가 갑니까?”

“그럼그럼. 나 천재 에즈라가 만든 신호기 베타 버전인걸~. 전에 시험해 본 거야~. 좋지? 엄청나지?”

다음 일정이 촉박한데 에즈라가 계속 시간을 끌자, 회중시계 뚜껑을 몇 번이고 딸깍이던 다리아가 더 참지 못하고 화를 폭발시켰다.

“좋고 염병이고! 자, 이렇게 써볼 일이 생겼으니 나와 아레미스는 그만 괴롭히고 업무 좀 봐! 클레이오 경, 너는 이제 가시고요.”

“으아, 이건 진짜 되는 빤짝이라니까~!”

다리아가 불이라도 피워 올릴까 걱정된 클레이오는 그대로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물론 신호기 역시 날름 챙겼다.

“네, 알겠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과한 방비일까 싶긴 했지만, 에즈라의 손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서였다.

에즈라가 꼬라지는 저래도 대단한 마법사이긴 하잖은가.

***

그러니까.

신호기는 전혀 오버가 아니었다.

세 번째 회합은 두 번째와 시작부터 달랐다.

무도회 도중에 이르자 열광을 넘어선 광란 가운데 실신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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