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데인 발 테르게스티 행 열차 (1)
“뭔데 그건.”
“병맥주! 이젠 꽤 종류가 다양해. 예전 같은 코르크가 아니라 새로 나온 크라운 캡이라 맛도 안 변한다고! 프란, 넌 에일이지?”
크라운 캡은 왕관처럼 주름진 금속 캔 뚜껑이었다. 이전 세계에선 코카콜라 병에서나 보던 그것이 지금 세상에선 최신 발명품이었다.
그 발명품을 아서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좋아할 만도 했다.
금속 뚜껑으로 밀봉한 맥주는 맛이 좋았다.
아서가 펼쳐 보인 자루 안엔,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갈색 병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라거, 에일, 흑맥주 골고루 종류가 다양했다.
“흠.”
방금과 표정은 똑같았지만 프란의 기색에서 희미한 기꺼움이 피어올랐다.
칠월 말의 강가.
해가 비치는 부분은 눈부시도록 희고 나뭇잎이 수면에 자아내는 무늬는 푸르다.
산들바람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흔드는 그늘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
철혈의 활동가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배치였다.
아서의 훌륭한 준비에 마지막 크림을 얹으려 클레이오가 움직였다.
“잠시만 있어봐, 내가 얼른 온도를 낮춰 줄게. 가져오는 동안 미지근해졌네.”
파아아앗―
금세 서클을 연 클레이오는 맥주의 온도를 쑥 내렸다.
차가워진 병을 아서가 얼른 낚아채더니, 뱃전에 툭 두드려 병뚜껑을 땄다. 병따개도 필요 없는 숙련된 솜씨였다.
“자.”
프란은 사양 않고 병을 받아들었다.
“잘 마시겠다.”
아서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레이, 너는?”
“난 라거로.”
“좋아.”
가볍게 병의 몸체를 부딪쳐 건배한 세 사람은 한여름 보트 위에서의 맥주 한 모금을 즐겼다.
피부에 옅은 땀이 배는 날씨.
한낮에 마시는 얼음처럼 시원한 맥주는 환상적이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 가운데 각자의 병을 비우던 중, 프란이 문득 포옹의 반구를 가리켰다.
“그런데 아세르.”
“응?”
“아까 이 마도구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짝이 되는 반쪽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빛이 밝아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바로 지금 그런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 그럴 리가. 첼은 하류에서도 한참 내려간 데 있는 공작소에 제작 맡긴 걸 찾으러….”
두 사람의 대화는 낯선 소음에 방해받았다.
타타타타타탓―
이전 생애에서나 들어봤던, 경운기 모는 것 같은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인공적인 바람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세차게 헤집었다.
눈부신 여름 한낮의 하늘을 가르며 새하얀 복엽기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첼인가? …그런데 저거, 어째 기수의 각이 이상한… 헉.’
비행기가 급격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도로도 한 가닥 안 난 숲속이었다.
갈대와 들풀이 우거진 조그만 섬과 버드나무가 줄지어 자란 물가엔 문외한인 클레이오가 봐도, 정상적으로 이륙할 만한 곳이 없었다.
‘착수(着水)라도 하려는 거야? 아니 진짜!’
클레이오는 다급히 서클을 펼치며, 말이 되지 못한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첼은 [강화]를 써 빠져나온다 쳐도, 수상에 착륙하면 비행기가 무사할 수 없었다.
‘지금 저걸 부서트리면 우리 작전은 어쩌려고! 와, 미치겠네!’
그는 순식간에 다섯 겹의 [감속] 마법식을 펼쳤다.
제대로 된 진언을 생각해낼 틈도 없었다. 다급한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속도 줄여!]”
갈비뼈 안쪽이 설렁하니 비는 느낌으로, 에테르가 일거에 빠져나갔다.
그에 비해 마법의 효과는 어설펐다. 영 모양새 안 나는 진언 때문이었다.
그나마 기체가 가벼운 덕에 마법을 튕겨내지 않고 얌전히 붙들려 줘 천만다행이었다.
슈우우우우우우웃―
솨아아아아앗!
갈대와 관목이 우거진 조그만 섬 위에 비행기가 수직으로 내려앉았다. 정상적인 착륙이 아니라 [감속]에 힘입은 부자연스런 형태였다.
맥주병 따위 진작 내버린 프란은 재빠르게 선착장으로 올라갔다. 남은 맥주를 급히 넘긴 클레이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졸지에 수직 착륙을 시켜준 비행기의 조종석에서, 승마복 차림에 고글을 쓴 첼이 펄쩍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뒤돌아서 연료통 위의 뒷좌석에 앉은 이시엘이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균형 감각이 뛰어나고 운동신경도 좋은 이시엘이 어쩐 일인지 순순히 첼의 에스코트를 받아 조심스레 지면으로 내려섰다.
두 사람 뒤로 멋진 복엽기가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오렌지빛 목재 뼈대에 빳빳한 캔버스 천을 씌운 날개가 새의 깃처럼 넓었다.
리시프로 엔진과 나무로 깎은 프로펠러가 달려있고, 뒤쪽엔 고정익이 붙은 네모반듯한 상자연 모양 비행기였다.
클레이오에게서 짜증이 가시고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린 시절 공룡, 배, 비행기, 자동차 중 하나를 좋아해 보지 않은 남자는 드물 것이다.
이전 생애의 소년 시절 그가 빠져들었던 건 비행기였다.
‘이거 실물 보니 나까지 좀 설레는데.’
정작 그 근사한 비행기의 앞바퀴는 풀숲에 푹 처박혔고, 날개에는 나뭇잎이 잔뜩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꽤 안정성 높은 설계 같은데, 왜 첼은 운전대를 저따위로 잡아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이 선착장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첼과 이시엘의 대화가 간간이 귀에 들어왔다.
“머리가 엉망이 됐네. 다음엔 모자를 써야겠어. 아하하!”
“아니, 다음은 없다. 이후의 탑승은 사양하겠다.”
“오늘은 벌써 6킬로미터를 날았잖아! 다음엔 더 멀리까지 비행할 수 있을 거야!”
뻗친 머리 사이로 고글을 올려 낀 첼은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이시엘 주위를 빙그르르 돌며 거의 에즈라처럼 굴고 있었다.
평소의 우아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흥분된 분위기 가운데, 마침내 네 사람이 선착장 위에서 만났다.
“여어, 레이! 아이쿠, 전 동급생 양반도 있었군! 오랜만이야!”
“이게 다 무슨 짓이야, 첼.”
큰 마법은 아니라 해도 지나치게 급작스레 서클을 열었다 닫은 탓에 피로해진 클레이오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클레비던스 씨에게 이번 작품을 인도받고 있는데 포옹의 반구가 빛을 내잖아. 바로 시험비행을 해볼 때라고 생각했지!”
“이시엘까지 있는데 꼭 그랬어야 했냐….”
어쩐지 평소보다 낯이 파랗게 바랜 이시엘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나도 동의하고 탑승했다. 숲길을 거슬러 오면 두 시간 걸릴 거리를, 저 물건을 타니 칠 분도 안 걸렸군. 굉장한 발명품임은 분명하다.”
“그렇지, 굉장하지! 이번 기체인 CC-2는 시속 45km까지 속도가 나와.”
“그 속도가 나는 기종의 첫 비행에 이시엘을 태워 왔다고!?”
“그럼 혼자 오리? 하하. 레이, 혹시 모르니 네가 준 방염 마도구는 이시엘에게 걸어줬어.”
평소 같은 교복 차림의 이시엘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장갑을 벗고 제 손목에서 팔찌를 끌렀다.
청색 에나멜로 복잡한 문양을 새긴 마석 백금 팔찌는 불을 막아주는 기능을 가졌다. 클레이오가 저가로 매입해 복원한 마도구였다.
“잘 어울리는데 그냥 하고 있지….”
“아니. 확실히 알겠다. 이건 첼 네가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마도구다. 물론 이게 필요한 일이 가능하면 없었으면 좋겠군.”
엔진이 폭발하거나 타기 쉬운 기체에 불이 붙을 때를 대비해 클레이오가 그레이어 상회 창고에서 골라온, 8교에도 언급된 유물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길 잠자코 듣고만 있던 프란이 드디어 팔짱을 풀고서 입을 열었다.
“글라이더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곤 들었는데, 그게 벌써 저런 형태까지 발전했군. 정확히 뭐라고 부르는 거냐?”
첼은 은빛 눈에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프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비행기. 비행기라고 불러! 기체명은 CC-2, 제작자 클레어 클레비던스의 명작이지!”
“탕페트 드 네쥬, 네가 이걸 이용해서 나와 아세르가 빼낼 물품을 산맥 너머로 이송하려는 건가?”
“바로 그거야! 기차를 타면 크뤼엘 공작령까지 한참 돌아야 하지만 산을 넘으면 직선거리가 짧지. 내용물은 프란 네게 설명을 들어야 한다며? 뭐든 괜찮아. 난 그런 모험을 아주 좋아해, 후후.”
“저어기, 첼. 네 얘기와 달리 저 비행기의 안전성이 심히 의심된다만, 괜찮은 거냐?”
“오, 이 마법사는 너무 걱정이 많군! 이착륙 때 외엔 안전해. 클레비던스 씨의 반듯한 상자연 모양 비행기는 다른 제작자들 것과 달리 조종하기도 쉽고, 방향타를 움직일 때도 안정적이야.”
“대부분의 비행 사고는 이착륙 때 나잖아. 이를테면, 방금 전처럼 물에 착륙시키면 동체가 남아나질 않는다고.”
“흐응, 클레이오 경. 이런 일엔 관심 없는 척하더니 정말 잘도 아시는군요? 뭐, 우리 마법사님은 항상 그랬지. 그래서 기체를 강화하기 위해 초강수를 썼다고. 이걸 봐.”
여전히 신이나 발이 땅에서 떠오를 것 같은 첼은 프란과 클레이오를 이끌고서 비행기를 향해 다가갔다.
가죽 장갑에 감싸인 첼의 손끝이 엔진의 측면을 가리켰다.
강화 다이아몬드와 [증폭]의 식이 새겨진 조그만 티플라움 판이 기체에 땜질되어 있었다.
“내가 전에 다이아몬드 하나 달라고 했잖아? 이렇게 썼어. 이거에 강화를 전도하면, 전나무 뼈대에 아마포를 덮은 기체라도 쉽게 파손되지 않아. 그래서 내게 맡길 이송 물품은 도대체 뭐야?”
첼의 질문은 프란을 향한 것이었다.
프란의 시선이 그녀의 상기된 얼굴, 이시엘의 침착한 표정, 배를 매어놓은 뒤 슬슬 걸어와 아이들 뒤에 차분히 멈춰 선 아서를 차례로 스쳤다.
저들의 이해관계는 프란과 같지 않다.
저들이 바라는 미래 역시 프란이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불의하게 흐른 피를 막고자 한다는 목적만은 같았다.
프란의 낮은 시선은 아이들의 면면을 휘돈 뒤, 이 모든 일을 조직해낸 마법사의 얼굴 위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여전히 힘없이 유약해 보이는 도련님 같은데, 저 애의 지휘 아래 전혀 상상치도 못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프란에게는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그가 바라는 것,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가 헌신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것의 목표는 무엇 하나 정확히 파악되지가 않았다.
‘마치 나아가는 것만이 목적인 역사의 흐름처럼. 아니, 이런 건 사람에게 할 비유는 아니군.’
느리지만 거스를 수 없는, 장엄한 흐름.
제게 밀어닥친 낯설고 거북한 경이감을 해석해보려 애쓰던 프란은, 당장 답이 나오지 않을 난제를 마음속의 ‘장기적인 숙고 요망’ 항목에 밀어 두었다.
지금은 당면한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마인라트 공작의 여름 피서지인 이젠스 성에는 비밀리에 조성된 실험실이 있다. 현재 그곳에서 왕비와 2왕자 일파가 벌인 실험의 결과….”
***
8월의 첫 주.
휴가가 끝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출발하는 사람도 많은 룬데인 동역은 여행객으로 붐볐다.
짐꾼과 마차꾼, 개인 여행객들, 자전거를 들어 맨 학생 하이킹 클럽 회원들로 플랫폼이 북적였다.
“어이, 레이. 레이! 너 정신 차리고 있는 거 맞지?”
“…정신 사납게 좀 하지 마.”
캔튼 부인이 플랫폼까지 따라 나와 손수 짐꾼들을 지휘하고 출발 수속까지 처리했는데도, 그녀를 졸졸 따라오기만 한 클레이오가 지쳐 늘어졌다.
열차가 출발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났지만, 자다 깨다 하는 클레이오는 여전히 넋이 나가 보였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인파를 헤치고 나온 것만으로도 물에 적신 종이같이 흐늘흐늘해진 친구가 웃겨서, 아서는 놀림을 못 멈추고 그 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이는 거였다.
보다 못한 이시엘이 점잖게 아서를 제지했다.
“아서 님, 장난도 조금 자중하시지요.”
“어, 음… 내가 심했나?”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만, 더 하셨다간 클레이오가 서클을 열 것 같군요. 달리는 열차에서 마법을 쓰도록 만드는 건 공리적 측면에서 좋은 행동 같지 않습니다.”
“그건 무서운데. 알았어, 그만할게.”
잔뜩 들뜬 아서는 내버려둔 채, 클레이오는 등받이에 고개를 댔다.
치이이이이이익―
플랫폼에 선 역무원이 소리쳤다.
“룬데인 발 테르게스티 행 열차가 벤윅 역을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