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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196화 (196/489)

룬데인 발 테르게스티 행 열차 (4)

하늘로 치솟았던 바닷물은 곧 항만 시설을 향해 아래로 쏟아졌다.

땡땡땡땡땡―

경고의 종소리가 세차게 울렸으나 소용은 없었다.

배에 남은 선원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 중심을 잡고, 증기선 짐꾼들이 화물의 끈을 매려고 처절하게 애를 썼다.

이런 상황이니 배에서 내리라고 소리쳐봐야 짐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비켜날 리 없었다.

항구는 수용 한계까지 차 있었고 정박된 배마다 사람과 화물이 가득했다. 사람들을 몇 분 안에 전부 대피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마침내 가장 먼 곳에 나가 있던 연락선 한 척이 마수의 겹날개에 휘말렸다.

쿠쿠쿠쿵!

촤아앜!

충돌은 천지가 울리는 굉음과 빛을 일으켰다.

거꾸로 솟은 바닷물에 근처의 나룻배 서너 척이 완전히 뒤집혀 침몰하기 시작했다.

배에 올라서 있던 짐꾼들이 수면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구하려는 주변 사람들도 마수의 난장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클레이오는 눈을 부릅떴다.

‘저 마수가 항구 안까지 들어오게 해선 안 돼!’

클레이오 자신은 5레벨, 아서는 6레벨.

자신의 서클 범위는 80m, 아서의 공격 범위는 200m.

물에서는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단번에 마수를 처치하려면 클레이오가 평소 쓰던 마법이나 보통 때의 아서 스킬로는 안 된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내…!’

제아무리 신묘한 검사라도 수면 위에선 싸울 수 없는 법.

한 손엔 완드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론 발코니의 난간을 짚은 채 바다를 향해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클레이오는, 그제야 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젠 「이격」조차도 완벽한 방비가 못 되었다.

마수가 두려워서?

아니.

저 마수가 움직이는 물이 새삼스럽게 두려웠다. 더 이상 바다처럼도 보이지 않는 검은 질료가.

자신이 온전한 ‘클레이오 아세르’가 아니라는, 조금 남은 증거가 마법사의 발목을 잡았다.

클레이오는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몇 번 내쉬었다.

원형 극장에서의 따스한 비와 그를 위협하지 않던 물을 의식적으로 떠올렸다.

그러자 어머니 이명화의 조근조근한 말소리도 이어서 생각났다. 태풍을 두려워하던 어릴 적 자신을 달래던 말이었다.

‘괜찮아, 모든 큰 물이 널 해하지는 않어.’

기적처럼 떨림이 가라앉았다.

클레이오는 완드를 뻗어, 선명한 모양의 [도약][감속] 마법식을 펼쳤다.

그리고는 화물선 갑판을 향해 단숨에 뛰어내렸다.

화물선 갑판과 발코니 사이 거리는 클레이오의 서클 범위를 꽉 채운 80m에 가까웠다.

털푸덕!

갑판에 착지하며 균형을 잃은 클레이오는 비틀거리다 서클 바깥으로 넘어져 버렸다.

마법의 지지를 잃고 푹 고꾸라지려던 그를 이시엘이 재빨리 붙잡았다.

마수가 일으킨 파도 때문에 배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클레이오는 이시엘의 팔에 매달려 겨우 선 처지가 됐다.

꼴이 웃기긴 했지만 지체할 틈이 없어, 클레이오는 자신이 짠 계획을 다급히 전달했다.

“저 마수의 약점은 천으로 친 텐트의 꼭지 같은 데 딱 한 군데만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야. 일격필살로 처치하지 않으면 이 항구의 배가 모두 전복될 거야!”

클레이오와 마찬가지로 『마수 백과』를 완독한 이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몰의 옥타보가 맞았군.”

언제 노닥거렸냐는 듯 준열한 기세를 올린 아서는 미동도 없이 마수를 노려보며 응답했다.

“한 번의 검격으로 잡아야 한다고?”

“그래.”

자신의 검을 흘낏 내려다본 아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해 볼게. 무슨 수를 써서든.”

아서라면 제 공언을 반드시 실행해 내리라는 걸 클레이오는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당장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더라도 그릇 바닥까지의 에테르를 모두 긁어내어 일격에 담는다든지.

‘아니, 그게 아니고…!’

처얼썩!

철썩!

하지만 뱃전이 너무 흔들려 혀를 씹을까봐 빨리 말을 전할 수 없었다.

클레이오는 이시엘에게 매미처럼 매달려서야 겨우 뒷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죽을힘을 다하란 건 아니고. 내가 도울게. 우리가 같이 나가는 거야. 날 붙들고 저기 쭉 늘어선 증기선들을 건너뛰어서 최대한 마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어?”

아서는 즉답했다.

“가능해. 그런데 뭘 하려고?”

먼 거리를 나는 비행 마법의 조합은 불가능했다. 잠시 몸을 띄우더라도 서클 범위를 벗어나면 곧바로 추락한다.

하지만 짧은 거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내 서클 범위에 마수가 들어오면 네 몸을 [체공]으로 띄울게. 가까이 따라붙어서 핵을 베어 줘. [진격의 원]보다 직접 베는 게 더 위력이 세잖아.”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마법사가 최전방에 나서는 예도 드물거니와, 그런다 하더라도 기사와 합이 맞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기사와 마법사는 반응 속도도 심각하게 차이가 났고, 전투에 대한 이해방식도 달랐다.

위험한 상황에서 마법사가 자신의 몸을 지키며 기사를 보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 역시 마법의 보조를 효과적으로 받으려면 숙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그런 기술을 익힌단 말인가?

수도방위대 학교의 동기로 조를 짜 내내 실습을 같이하고, 늘상 얼굴을 맞대는 친구가 드물디드문 전투마법을 구사하지 않는 한.

하지만 아서와 클레이오는 달랐다.

아서가 6레벨로 오르던 때에 함께 싸워 그런지 클레이오와 아서는 놀라울 정도로 협업의 효율이 높았다.

그렇다 해도, 마법사에겐 지나치게 위험한 계획이었다. 아서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짧은 시간 동안 그 모든 요소를 검토해본 아서는, 클레이오의 두 번째 제안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이 이상의 수를 생각해낼 수 없어서였다.

“그래. 바로 가자.”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고마워, 이시엘. 널 믿는다. 그럼 레이.”

“응.”

아서는 얼른 한 팔을 뻗어 클레이오를 접어 맸다.

몸이 반으로 구겨진 채 6레벨 검사의 종횡무진 움직임을 체험하니 속이 울렁거렸지만 클레이오는 눈을 부릅뜨고 참았다.

아서는 [도약] 마법 없이도 마치 마법을 입은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가 뱃전과 뱃전을 뛰어넘을 때마다 마수와의 거리가 훅훅 좁혀졌다.

가장 멀리 대어져 있던 연락선의 갑판을 디딘 아서는, 이내 항구의 입구에 둥둥 떠 있는 선박의 파편 위로 뛰어내렸다.

증기선 선원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뭐야!”

“여기서 갑자기 뛰어내리면 안 돼!”

폭풍이 부는 것 같은 바다 위에서, 부서져 나간 배의 갑판 잔해에만 의지해 섰는데도 아서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절묘한 [강화]와 균형감각의 산물이었다.

쿠콰쾅!

쏴아아!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옥타보는 바닥으로 내리깔려 있던 여덟 겹 낱장들을 순식간에 위로 접어 방어막을 형성했다.

바다는 격렬하게 뒤집히며 몸부림쳤다.

등줄기가 굳고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도 이를 악물고 버티던 클레이오는 드디어 마수가 자신의 서클 범위 안에 들어왔음을 인식했다.

아서 역시 금세 낌새를 챘다.

베그의 검에서 아서의 키만 한 검기가 뻗어 나왔다.

물을 기화시키고 불을 바래게 할 듯한 찬연한 검기가 밤바다 위에 횃불처럼 피어올랐다.

“지금이야!”

파아앗―!

서클의 전 범위를 밝히며 [도약][체공], 그리고 [추적][가속][증폭]의 다섯 겹 마법식이 수면 위에서 떠올랐다.

물 위로 상승한 서클은 물질성이 느껴질 만큼 견고해, 해저로 사라진 왕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화물선에서 필사적으로 배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던 선원들도, 뒤집혀버린 구조보트를 붙들고 있던 연락선의 탑승자들도 자신들의 처지를 잊고 그저 그 마법의 놀라움에 넋을 잃었다.

클레이오를 붙든 아서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마법사는 꽉 죄인 목구멍을 열어 진언을 뽑아냈다.

차가운 해수에 정신이 씻겨나가, 오히려 자구가 더 선명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별이 빛나는 하늘의 눈들을 지나

설백의 심연을 개척하러 뛰어들지니,

죽음과 혼돈과 밤은

우리가 비상하는 소리로부터

폭풍의 권능에 쫓긴 운무처럼 달아나리라」1)”

쏴아아아아!

클레이오의 마법진으로부터 거센 에테르 폭풍이 일어나 검푸른 바닷물을 멀리로 밀어냈다.

해저가 드러날 정도로 격한 에테르의 움직임에 반응하듯, 마수의 너덜너덜한 곁날개가 파르르 찢겨나갔다.

“가! 아서!”

아서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는 가라앉아가는 연락선의 잔해에서 벗어나 일순간 중력에서 해방되는 가벼움을 느꼈다.

‘발목에 날개라도 단 것 같아.’

극도의 집중, 자신의 것이 아닌 에테르가 온몸을 휘감는 기묘한 안정감, 찬연한 빛무리의 폭풍은 자신을 위해서 불어오고, 이 세상의 모든 제약을 벗어난 전능함이 자신의 것만 같다.

샤아아아앗!

샤샤샷!

파르르르르륵!

에테르 반응을 느낀 옥타보는 점점 더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켰다.

클레이오는 애를 써 버텼다. 증기선의 파편을 붙든 팔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부우웅!

뻗어 있던 아서의 검기가 일거에 빛의 창처럼 길어졌다.

클레이오의 마법식 주변을 회전하던 모든 에테르가 일시에 아서의 검으로 빨려들었다.

그렇게 마법사는, 아서의 손에 또 한 번 빛나는 칼을 쥐여주었다.

시간이 천 분의 일처럼 느려진다.

아서는 이 순간을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보는 듯한 환시를 느낀다.

극도로 확장된 시야는 거의 전능감에 가까운 감각을 아서에게 안긴다.

마수의 핵이 코앞의 과녁처럼 선명하게 보이고, 새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떠는 클레이오의 등 역시도 그만큼 분명히 보인다.

항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동시에, 바다 아래에서 떠 있는 배의 닻과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가능한 건 일격 뿐.’

반격을 받는다면 클레이오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서는 차분히 움직였다.

지켜보는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아서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6레벨 검사의 힘과 공전절후한 마법이 그의 검 위에서 결합해, 사람이 낼 수 없는 신속을 구성했다.

스으으으읏.

몇 겹의 빛이 겹쳐 희게까지 보이던 검기가 단번에 옥타보의 핵심을 갈랐다.

몸을 미끄러트려 날을 피하려던 마수에게, 검기가 마치 생물이라도 된 듯 곡선으로 휘어져 달라붙었다.

날이 잘 든 페이퍼나이프에 종이가 잘릴 때처럼 마수는 소리도 없이 낱장으로 분해되었다.

한 겹 한 겹 흩어진 마수는 끄트머리부터 너덜너덜해지더니 이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솨솻솨솨솨삿!

초저녁 하늘을 극광으로 물들이며 마수가 소멸했다.

쏴아아아아!

마수의 파편은 하늘하늘 이리저리 흩날렸다.

바다는 이내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아서의 검기와 클레이오 마법의 잔상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됐다. 제대로 해냈어….’

모든 마법식이 완전히 스러졌다.

에테르를 한 방울도 남기지 못한 클레이오는 힘이 팍 풀려 주저앉았다. 입 안에서 찝찝한 피맛이 났다.

콰아아아앙!

소리는 움직임보다 뒤늦게 당도했다.

스러지던 마수의 잔해가 물에 닿자마자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여파는 곧 해일 같은 파도로 뭉쳤다.

거대한 물의 장벽에 압도된 클레이오는 몸이 굳어져 마스트를 잡았던 손을 놓고 말았다.

‘아, 젠장!’

만의 바닷물이 울부짖으며 수면으로 떨어진 아서와 돛대의 파편을 놓친 클레이오를 삼켰다.

물결 속으로 목에서 넘친 핏물이 잉크처럼 번져나갔다.

아서 역시 몸이 굳었다. 일거에 에테르를 모두 뽑아낸 참에 마법까지 풀리자, 한순간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몇 초의 경직이 풀리자마자 아서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클레이오의 힘 잃은 몸은 아서의 손끝을 스쳐 더 깊은 바다로 끌려들어 갔다.

“레이…!”

1) 『Prometheus Unbound』 Act IV, Percy Bysshe She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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