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스 성 대작전 (1)
“생전 책이라곤 안 읽으면서 어디서 이런 건 다 알았대요? 하여간 엉뚱한 도련님이셔.”
“제가 문학엔 레이디 디오네만큼 소양을 가지지 못했지만, 미식엔 관심이 많아서 말이지요.”
“아하하, 이번엔 인정이에요.”
호르릅.
“이 차까지도 어쩜 이렇게 맛이 좋을까요. 이름이 뭐라고 그랬죠?”
“재스민차와 우롱차라고 하네요. 세리카 특산물이랍니다.”
“어쩜. 메리디에스산 차랑은 풍미가 달라요. 색이며 향이 너무나 향기로워요. 이거이거.”
찻잔 안쪽 바닥에 금붕어가 부조된 다기를 살피던 디오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클레이오는 디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건 돈 벌 궁리를 하는 눈인데….’
“아세르 상사는 마석, 마광석 거기에 제약 원료는 취급해도 식품류나 기호품은 별로 취급 안 하죠. 틈새를 노려 이거 저희 상회에서 수입해 볼까요?”
클레이오는 이미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전 세상의 지식을, ‘약속’의 힘을 빌려 후다닥 뒤져 봤다.
확실히 박람회 좌우로는 중국풍이니 일본풍이니 하는 것이 더 크게 유행하긴 했다.
“흠, 듣고 보니 시장성이 있을 것 같군요.”
“좋아요. 백발백중인 우리 도련님이 된다니 되는 거겠죠. 산업관에 부스가 있었는데 접촉해봐야겠어요.”
“아니, 그냥 감이니까 다 믿진 마시고요. 투자금 회수 못 해도 전 책임 못 집니다?”
“어이구, 그거 물어내라고 할까봐! 제법 사업 같은 걸 굴리고 있어도 도련님은 아직 애라니까. 그래 맞아, 댁의 형은 만났어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클레이오는 솔직하게 답했다.
“형님은 상업관의 알비온 기업관에 있을 것 같아서, 아예 거길 안 들렀습니다. 스페쿨룸 공국 전시관까지만 본 뒤 빙 둘러서 지나갔습니다만.”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어차피 가 봐도 안 마주쳤을 거예요. 아세르 상사 부스 책임자를 찾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말예요.”
“장사가 잘되나 봅니다? 저야 가업의 사업 쪽은 잘 모르니 말입니다.”
블라드와는 아예 연락을 안 하고 살고 기디온과는 드문드문 안부 편지나 보내는 입장이다 보니, 클레이오는 아세르 집안 사업에 대해서 디오네보다 아는 게 없었다.
“그럼요. 원래도 잘 나가던 에테르 전지에 티플라움 부품을 쓰게 돼서 효율은 두 배로 늘었고, 정기로 오가는 첸트룸 상단이 실어 오는 마석 금이야 늘 최상품이고. 최근엔 블라드 아세르 씨가 새로운 약재까지 독점으로 공급하게 돼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죠.”
“약재요?”
“아글라오포티스. 메리디에스에서도 내륙 고원지방에서만 자라는 작약 모양 풀이에요. 생육환경을 심하게 타서 옮겨 심는 게 불가능한데, 탁월한 안정 작용이 있다고 하지 뭐에요. 저레벨 [경감] 마법 같은 힘을 낸다나요?”
마법이 있어서 그런지 이쪽 세계의 약학과 의학 발전은 다소 더딘 편이었다.
스스로 [경감]을 못 거는 마법사는 진통제 성분인 인공 아세트아미노펜 합성만 손꼽아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런 클레이오에게 이건 또 눈이 번쩍 뜨일 희소식 아닌가.
“마법사 없이 그 정도 효능을 보여준다면 그 아글… 어쩌고 하는 풀을 노리는 기업들이 많겠군요.”
반가움은 커다랗건만 이름이 너무 길어서 제대로 부를 수도 없었다.
클레이오는 재빨리 「기억」을 돌려 8교를 탐색해 봤다. 그런 풀은 언급조차 없었다.
후후 하고 웃던 디오네는 자신들의 히트작이었던 아공간 동전지갑을 딸깍,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말린 꽃잎이 한 줌 들어있었다.
분홍빛, 자줏빛을 그대로 남겨 건조한 걸 보니 마법으로 후처리한 모양새였다.
“여기, 이건데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네 어쩌네 하며 댁의 형이 갖다 안기기에 좀 받았어요. 이름은 아글라오로 줄여서 불러요. 이게 올해의 대히트 예감 아이템이랍니다. 워낙 생산량이 적다 보니 수도상인조합 소식지에 홍보할 물건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클레이오는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풀을 한두 장 집어 살폈다.
‘약속’은 별다른 메시지를 띄우지 않았다.
정말로 그냥 약재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런 건 어디서 나왔지.’
단순한 약재 거래도 그 속 검은 블라드가 하는 일이니 어딘가 찝찝하게 여겨졌다.
“귀중한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샘플 저도 몇 장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긴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어머, 감사히 받아들이죠. 우리는 약재를 다루진 않으니까 나눠 줄게요. 새 사업 아이디어로 구상해 올 거 맞죠?”
“너무 기대는 마시고요.”
디오네의 오해를 풀기도 그렇고 키우기도 껄끄러워 클레이오는 말을 흐렸다.
“아무튼 일 이야기는 이걸로 마무리해요. 그럼 당신은 오늘로 박람회 구경은 끝인가요?”
“네, 내일부턴 지방의 축제를 구경하려 합니다. 호텔에 부탁해 기차표도 미리 구해놨습니다.”
클레이오는 두 번 다시 2등석 기차를 탈 순 없다는 각오로 호텔에 체크인하자마자 컨시어지에게 기차표부터 수배를 부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축제를 보러 다닐 예정’이라 이시엘과 아서의 검, 박람회에서 구매한 귀중품 등은 그레이어 상회 귀중품 행낭에 실어 룬데인으로 배송을 부탁했다.
그 철저한 준비내역을 듣던 디오네는 마지막 잔의 차를 따르고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요. 소년소녀들은 모험을 하며 성장하는 거죠. 즐거운 여름 방학 보내도록 해요. 너무 크게 사고 치지는 말고요.”
이젠스 성과 관련해 디오네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했는데, 앉아서 천 리를 보는 사업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덜커덩.
덜컹.
“초특급 관광열차도 흔들리는 건 똑같구나.”
이젠스 노선의 관광열차는 포도원 축제 즈음에만 특별 투입된다고 했다.
열차의 내부는 안락하고 화려했다. 기물 일습이 모두 고급품인 특등석은 자리까지 넓어, 객차 한 칸 전체를 일행이 독점하는 형태였다.
객차 안의 칸을 나눠 뒤편에 욕실, 앞편엔 침실로 만들고 가운데에 응접실을 두어 이어지도록 했다.
돈이 정말 좋긴 했다.
열차 응접실의 벨벳 소파에 퍼져 앉아 금술 달린 쿠션을 팡팡 두드려보던 아서가 하는 소리가 저랬다.
클레이오는 한심하단 듯 아서를 일별하고는 대답도 안 했다.
“야아, 무시하고~.”
“대답할 가치가 없는 소리니까 그렇지. 좀 영양가 있는 소릴 해라.”
“흠. 어디보자, 영양가 있는 소리라… 그럼 난 옷 안 갈아입어도 돼?”
“어. 넌 지금 그게 딱이야.”
“역시 짐꾼 역인가.”
“잘 아네.”
커튼을 모두 걷어둔 차창에서 들이친 여름 한낮의 빛이 아서의 마구 뻗친 갈색 머리를 비췄다.
오늘 아침엔 면도도 하지 말라고 했더니 약으로 수염조차도 갈색으로 변해, 평상시와 같은 아서의 허술한 차림새와 찰떡같이 어울렸다.
“그럼 프란이 도련님 역?”
클레이오는 대답 대신 슬쩍 턱짓만 했다.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고 침실에서 나온 프란이 응접실 벽에 붙은 거울에 불만스런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안에서 클레이오와 프란의 눈이 마주쳤다. 프란의 입매가 한층 더 빼족해졌다.
“아세르, 필요하다니 입긴 했다만 이건 마도구가 아니잖아.”
크라테르 부스에서 출품한 기성품 실크 정장은 라펠을 재단한 모양새가 날렵하니 우아하고, 같이 팔던 커프스 링크나 행커치프도 묘하게 알비온의 유행보다 색이 과감했다.
핏빛으로 검붉은 루비 커프스 링크와 옅은 회색 모닝코트는 프란에게 꽤 잘 어울렸으나, 확실히 너무 잘 노는 도련님처럼 보였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설계한 변장이 꽤 흡족했다.
‘적금발이 딱이었어. 눈 색도 세트로 바꿔주는 건 이번에 처음 나온 신제품이라더니… 효과 한번 끝내주네.’
프란의 회색 머리를 붉은 기가 강하게 도는 금발로 바꾸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도구는 아니지만 네 치수에 맞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 입고 온 상회 사환 같은 복장을 하면 머리색을 바꿔도 널 알아볼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지 뭐야.”
“…….”
사실이라 반박할 말은 없지만 여전히 자기 꼴이 마음에 안 드는 프란은 한숨만 내쉬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아서가 또다시 촐싹댔다.
“그러고 있으니 프란, 너 진짜 도련님 같긴 하다.”
“저기, 아서… 프란도 일단은 백작가의 자녀거든.”
“헉! 그랬지, 참.”
아서는 방정맞게 두 손으로 헙 하고 입을 막았다.
“내가 알비온의 3왕자에게 그런 말을 들을 계제는 아닌 것 같고, 복장에 있어선 아세르 네 의견이 옳은 것 같다. 안경도 벗는 편이 좋겠지?”
달칵.
프란은 의외로 선선히 안경을 접어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꽉 조인 웨이스트 코트와 구김이 잘 가는 실크 재질 때문인지 몸가짐이 평소와 달랐다.
허름한 면 재킷에 플랫캡을 눌러 쓰고 있어도 안경 너머 눈빛이 예리한 프란은 지나치게 똑똑해 보이는 편이긴 했다.
일단 옷을 바꾸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수도에서 집필에 집중하다 보니 그을렸던 피부색도 본래대로 밝아졌고, 거칠어진 손은 장갑이 가려주었다.
그 타고난 고귀함, 푸른 피를 방증하듯 오만하게 들린 턱, 빳빳이 편 등은 복장과 몹시도 잘 어우러졌다.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본인은 절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평이겠지만.’
눈치가 비상한 프란이 혹시라도 자신의 속내를 짐작할까봐 클레이오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협조해 줘서 고마워, 프란. 이제 꽤 그럴듯한 변장으로 보여.”
“흥.”
본인의 거부감과는 별개로 프란은 합리적 선택을 내렸다.
그는 꽤 융통성이 있는 실용주의자였다.
이젠스 성 사람들에게 괜히 정체를 들켰다간 일이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일행 중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도 저쪽이 좀 더 취향에 맞았을 것 같은데.”
프란이 손을 뻗어 가리킨 후에야 클레이오는 이시엘이 응접실에 나와 있는 걸 알게 됐다.
“…나 말인가?”
욕실에서 염색 물약을 먹은 뒤 망토를 두르고 나온 이시엘은, 등 뒤에 서 있으니 진짜로 존재감이 안 느껴졌다.
밤색이 된 머리카락은 그나마도 보이지도 않게 모자 안으로 갈무리되었고, 곧은 어깨에 망토를 떨쳐 두르니 얼핏 봐서는 청년 같았다.
이시엘의 신장은 170cm에도 못 미치니 남자라고 치면 약간 작은 편이지만, 자세가 버팀목처럼 똑바르고 검을 오래 배운 자 특유의 정갈한 걸음걸이를 가져서 마치 일행의 호위처럼 보였다.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멜라미드의 검 대신 대장간에서 새로 산 무기를 차고 있어도 여전히 고수의 느낌을 풍겼다.
아서가 짝, 하고 손뼉을 마주쳤다.
“와, 멋진데, 이시엘!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던 전설의 방랑기사 같아.”
“아서 님. 낯부끄러운 소리는 좀 자제하십시오.”
“아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짠데.”
“압니다.”
둘이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자란 사이치곤 아서에게 꽤 깍듯한 이시엘이지만, 제 주군 입에서 나온 ‘전설의 방랑기사’ 어쩌고 하는 소리까진 못 참겠는지 이만 닥치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아서는 닥치지 않았다.
“자아! 그럼 프란은 도련님이고, 나는 짐꾼, 이시엘이 호위면, 클레이오 네 역할은 뭐야?”
“뭐, 나?”
이 모든 일을 지휘한 클레이오는 여름용 면으로 지은 베이지색 외출복 차림새였다. 그나마도 덥다고 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웨이스트코트만 입은 꼴이었다.
잘 뜯어보면 재단과 세부, 부자재가 고급스러운 맞춤옷이었으나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수수해 보이는 복장.
그러니 역할이 궁금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