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데인의 영웅들 (1)
소년과 어머니는 불이 옮겨붙은 집에서 경황도 없이 뛰쳐나왔다.
그들의 집은 수도방위대 기사단이 미처 다다르지 못한 스콜라 지구의 뒷골목에 자리했다.
멀리서 보아도 궁성과 학교는 방벽으로 방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 쪽에선 불이 치솟고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이어졌다.
남은 선택은 하나뿐.
다리를 건너 궁성으로 가야 했다.
두 모자는 안타리오 다리에 닿기도 전에 불길에 발이 묶여, 광장 근처에서 몸을 웅크렸다.
불에 탄 기둥이 무너져 길이 막혔다. 다른 샛길을 찾기엔 사방이 다 불구덩이였다.
물로 끌 수 있는 불도 아니건만, 몸에 새겨진 관성이 모친을 물 가까이로 이끌었다. 분수대 아래 웅크린 어머니는 자그마한 아들을 꽉 감싸 안았다.
결계가 없으면 몸으로라도 불을 막으려는 각오였다. 저 마수의 재난이 아이를 해치지 못 하도록.
내내, 사방이 비명소리였다.
소년은 어느새 울음도 그치곤 그저 멍하니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불은 물로도 모래로도 꺼지지 않아 휘말린 이들의 몸을 살라 먹었다.
그 아비규환의 한복판에 한 방울의 물방울이 낙하했다.
톡. 토옥.
곧이어, 하늘을 하얗게 뒤덮은 운무가 비로 화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둑.
치이익.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어머니는 빗방울의 기척을 못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보았다.
“엄마, 엄마엄마! 팔! 비 맞은 데부터 낫구 있어!”
그를 감싼 엄마의 팔, 시뻘겋게 수포가 올라왔던 팔꿈치 아래가 빗속에서 아물어갔다.
“이게 무슨….”
울고 당황하여 기도하거나 욕설을 지껄이던 사람들, 성에서 먼 곳에 살아 때에 맞춰 외성벽에 들지 못했던 시민들이 하나둘 일어나 하늘을 쳐다봤다.
불이 쏟아지던 동안에는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던 하늘이었다.
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육안으로도 볼 있었다.
강 건너편 수도방위대 학교의 상공에 뭉쳐 있던 마수들이 비를 맞아 먼지처럼 휩쓸려가고 있었다.
수도 전역을 적시고 있는 영롱하고 오묘한 빗방울 속에서.
“마수의 불이 꺼지고 있어요!”
“화상이 진정됐어. 우리 애가 살았어. 어어엉. 어어엉.”
“축복의 비가 분명해!”
“세상에.”
“신께서 우릴 지켜주고 있는 것이외다.”
두 팔을 벌려 비를 한껏 맞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소년은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신님은 새를 타고 다니는 거야?”
“무슨 소리니?”
“저기 봐봐, 위에. 저기서 커다란 새에 탄 사람이 꽃비를 뿌려주고 있어.”
아이의 말이 맞았다.
불을 뿌리던 마수와 흡사하게 생긴 커다란 새 같은 것 위에 누군가 앉아, 새하얀 구름을 끝도 없이 펼쳐내고 있었다.
생명의 비를 자아낸 축복의 운무를.
.
.
.
발코니의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 멜키오르의 금빛 머리카락은 마법의 비에 젖어 예복 깃에 달라붙었다. 어깨 아래로 드리워진 결이 가는 금발은 영롱한 에테르의 빗방울에 물들어 자갯빛으로 반사됐다.
늘 부적절하고 늘 탈맥락적으로 아름다운 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신민이 될 이들은 성벽의 안팎에서 왕세자를 우러르는 대신, 저 하늘에 뜬 이에게 모든 주의를 빼앗겼다.
불의 재난을 종결한 마법사에게.
멜키오르가 말했다.
“신께선 애가 닳으셨는가? 저런 것은 내 생애 처음이야. 이솔트조차도 하늘을 날며 비를 내리지는 못했지. 새로운 기적극이 만들어져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엔 황홀한 윤기가 어려 있었다. 한때 이 세상에 마법을 가져왔으나, 이제는 서클을 열 권능을 박탈당한 왕세자는 천진하게 웃었다.
젖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은 인위적인 구름이 생성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마수가 모두 사라졌기에 왕세자를 지키고자 복귀한 태서턴은, 어느새 근위대의 기사와 자리를 바꾸어 발코니에 들어서 있었다.
왕세자 근위대의 단장은 제 망토를 끌러내 국왕 대리의 머리 위를 조심스레 가렸다.
빗물을 막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왕세자의 모습을 외성벽 안에 모인 신민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처사였다.
“기적극의 유행은 이미 몇백 년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하하, 언제는 유행을 따른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을 하는군. 너도 망령치고는 위트가 있어.”
망토를 펼쳐 든 태서턴의 팔을 벗어난 왕세자는, 기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난간 가장자리에 섰다.
천 년의 수도에 옮겨붙은 마수의 불이 마법으로 정화되는 광경은 새롭고도 혼란스러웠다.
무질서.
그것은 지금의 멜키오르 리오그난이 가장 기껍게 여기는 미덕이었다.
“봐.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 최초의 혼돈, 구원이라는 이름의 어긋남 앞에서 멜키오르는 웃는다. 종결의 의지로 가득한 기쁨에 젖어.
아르모리크 공작은 자아가 풍화될 만한 세월 후에야 재발견된 미소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를 침묵을 지킨다.
***
일주일 후.
클레이오는 아세르 저택 침실의 카우치에 몸을 푹 파묻은 자세로 늘어져 있었다. 완전히 퍼진 채 손만 뻗어 그의 다리에 주둥이며 이마를 부비는 베헤못을 살살 쓰다듬었다.
앞에는 읽어야 할 보고서며 자료, 신문이 커다란 뭉치로 쌓여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털뭉치에서 손을 떼기 싫었다.
‘현묘의 밭’ 포도원에서 보내온 루아르 블랑 와인을 잔뜩 마시고 만족스레 퍼진 고양이는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웠다.
“못아 와인은 어때? 네 밭에서 난 건데 괜찮아?”
“훌륭하다. 부케를 걸어놓은 것 같은 향이군. 네놈도 이제는 제법 본묘의 시종으로서 자세가 잡혔구나.”
“아이쿠, 칭찬 감사합니다, 현묘님이시여.”
“어째 말투가 불손하다?”
“불손하기는. 나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
“흥.”
옹냥거리는 주둥이를 떼고서 앞발로 클레이오의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내리친 베헤못은 펄떡 뛰어 테이블 위에 올라앉았다.
할짝.
찹찹찹찹.
물그릇에 남은 와인을 싹싹 핥아먹기 위해서였다.
와인은 바로 베헤못 소유의 밭에서 난 산물이었다.
루아르 블랑 품종을 주력으로 재배하며 수십 년간 좋은 와인을 생산해온 일가는, 몇 년 전 전대 주인의 급병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런 사연으로 포도원이 시장에 나온 것을 클레이오가 인수했다.
종전의 운영 방식이나 제품 제조 형태는 그대로 두고 다만 포도원의 이름만 ‘현묘의 밭’으로 바꿔 붙였다.
‘현묘의 밭’은 와인 라벨에서뿐만 아니라 서류상으로도 베헤못의 포도원이었다.
물론 레비 씨는 정말로 포도밭의 실소유주로 고양이를 올리는 게 맞냐고 세 번이나 확인을 했다.
클레이오는 태연하게 세 번 다 그렇다고 대답한 뒤 과거의 사례를 제시했다.
이전에 오레일스의 땅을 살 때 토지 구매와 임대에 관련한 주요 판례집을 읽어둔 게 도움이 됐다.
법인 소유의 농지는 공동소유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도 서류에 올릴 수 있었다.
키우던 동물을 상표에 넣고 홍보에도 활용한 앵무새 자두 농장의 주인 덕에 클레이오도 같은 편법을 쓸 수 있었다.
‘이쪽의 법률에선 판례가 중요하다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되네.’
뭐가 됐든 돈을 쓰면 일은 어떻게든 성사되는 법이다.
전 주인의 자식인 포도원의 책임자는 넉넉한 투자 덕에 다시 농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며, 끝까지 판매하지 않고 남겨 둔 과거의 그레이트 빈티지 몇 병을 클레이오에게 보내왔다.
신이 난 건 베헤못이었지만, 클레이오 역시 베헤못이 옅은 금빛 와인을 할짝거리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고양이가 술 먹는 거나 보고 있어도 되는 이 평화로운 순간이 너무나도 값지게 느껴져서였다.
‘다들 무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세르 저택은 4층 지붕 아래에 있는 캔튼 부인의 방과 앞마당만 조금 불탔을 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처음에 보통 화재인 줄 알고 하인과 하녀들이 불을 끄느라 물을 끼얹어서 실내장식이 망가진 것 정도가 추가 손실이었다.
물론 캔튼 부인에게 일이 생길 뻔했다는 걸 알고선 클레이오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 고양이가 제 은인이에요. 잠시간 손수건을 찾으러 방으로 돌아갔을 적 사납게 화를 내며 옷자락을 끌어당기기에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그 덕에 무사했답니다!’
라고 전하며, 캔튼 부인이 눈물을 찍어냈다.
부인의 허리춤에서 저택의 열쇠 꾸러미가 움직임에 따라 짤랑거렸다. 불이 나도 하녀장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고 열쇠는 꼭 챙겨 나온 것이 부인다웠다.
사건 당일, 에테르 소진으로 탈진해 침실에 누워있던 클레이오는 열쇠가 부딪치는 소릴 듣고서야 확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오기 시작했더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싹싹 핥은 그릇을 쓱 밀어둔 고양이가 앞발을 할짝이며 클레이오를 눈으로 살폈다.
“그냥.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
“츳. 남 생각하기 전에 제 몸이나 챙길 것이지. 기후 마법을 진짜 쓸 생각을 하다니. 요 앞뒤 못 가리는 천둥벌거숭이 놈.”
“야, 그래도 연못을 말려버리진 않았잖아. 서클 주변의 수분을 빨아들이는 대신 운무의 아게이트로 구름을 만들어 냈으니까.”
“에이그, 에이그! 본묘가 붙어서 지도하는데, 일 년이 지났음에도 학교 연못을 가뭄난 바닥으로 만들던 수준이면 네가 장래의 대마법사 소릴 들을 자격이나 있겠느냐?!”
2학년 때, 국왕 서고에서 알아낸 기후 마법을 시험해 보다 학교 연못을 물 한 방울 없이 날려버린 적이 있었다.
제베디에겐 술 마시다가 그랬다는 핑계를 댔었다. 에테르의 흔적을 보면 그게 아닌 줄 알 텐데도, 학장은 금주령만 내리고 마법에 대해선 넘어가 주었다.
베헤못은 그 사건의 숨겨진 종범이었다.
“근데 장래의 대마법사 어쩌고는 내가 붙인 호칭 아닌데?”
“그래서 더 문제인 거다. 네가 지어 붙이지 않은 이름을 들이밀며 네가 그 이름에 걸맞은 자이길 증명하라는 요구가 생길 걸 모르느냐?
므네모시네의 문이 저리 활짝활짝 열리는 건 천 년 전과 같은 마수 준동을 예비하는 사건이다. 운무의 아게이트 같은 희귀한 마석이 늘 손에 있지 않을 터, 또다시 기적을 일으키길 종용받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고양이는 털을 부풀리며 클레이오에게 화를 냈다. 걱정해서 하는 소리였다.
클레이오는 스르르 카우치 아래로 내려와 베헤못을 폭 껴안았다. 폭신폭신. 따끈따끈. 말랑말랑. 절로 웃음이 났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나름 방비도 해 뒀고. 이젠 이 정도 마법을 써도 기절 안 하잖아. 난 무려 최연소 상급 마법사라고.”
고양이가 꼬리를 마구 부풀렸다.
“캬오옼. 그게 뭐라고 고작 6레벨인 놈이. 웃을 일이냐! 웃을 일이야?”
제법 아픈 솜방망이로 냥냥펀치를 맞으면서도 클레이오는 연신 히죽거렸다.
이 영묘는 이전 세계도 세계의 반복도 입에 담지 않았으나, 여러 번 살았던 세계에 관해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양이에게도 자신에게도 서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가장 가까운 친구.
베헤못의 걱정이 기껍고도 미안해서 클레이오는 고양이의 털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그의 심기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영묘의 말은 맞았다. 밖으로 터져 나올 기억된 세계는 적어도 하나가 더 남아 있다.
8교에서 므네모시네의 문을 심적색으로 물들였던 던전, ‘영원한 겨울의 도시’.
그때를 대비하여 마석 벚의 로즈쿼츠를 잘 모셔두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또 무슨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에테르 순환해서 에테르나 실컷 쌓아놓는 수밖에.’
어쨌든 기후 마법을 쓴 것 자체는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다. 그날, 혼신의 힘을 다해 수도를 지켜내길 잘했다.
‘덕분에 이렇게 고양이와 다시 대작할 날도 오고.’
처음에는 제베디가 목숨을 걸고서 마수들이 풀려나는 걸 막았고, 뒤에는 클레이오가 편집자 권한에 기후 마법까지 써가며 애를 썼다.
덕분에 수도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큰 짐을 덜고 나자 오레일스의 땅값이 걱정되기는 했다. 마수가 출몰하는 게이트를 낀 도시에 누가 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데 들려온 소식에는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는 공시지가가 또 상승했으며 매수 의사를 타진하는 지방의 대영주가 있단 레비 씨의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기분이 좀 얼떨떨했다.
“땅값도 올랐다고 하고. 그 난리통을 겪고도 가격 방어가 철통인 게 충격이긴 하지만.”
“돈 못 벌어 죽은 유령이 붙어 있나, 에그그그. 쯔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