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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229화 (229/489)

배움의 기쁨 (3)

‘하지만 그것이 강함 뿐 아니라 명예와 관련된다는 것이 또 신묘한 설계이긴 해.’

이 세계는 인간 전술병기들이 그보다 약한 인간들의 규칙과 명령에 복종하는 곳.

저 인외의 강자들이 명예와 기품에 연연하는 것 역시도, 어쩌면 무력에 의한 압제를 막으려는 신의 안배일지 모른다.

알비온의 기사들은 국왕에게 언약을 하고 브룬넨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공후에게 맹약을 한다.

우니카에서는 일족 회의의 장에게 맹세를, 세리카에서는 영예로운 무과의 관직에 들어 천자의 군사가 된다.

그러나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카롤링거의 기사들은 충성선언을 교수형으로 파훼한 탓에 착란을 일으켰고, 에텐셀 왕가의 몰락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혁명 정부에 투신한 기사들 중 죽지도 미치지도 않고 살아남은 이들은 보통의 병사와 큰 차이가 없는 하급 에테르 감응자들이었다.

빅투아르 모로의 통치기에 태어나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에테르 감응자들은 아직 상급 레벨에 이를 나이가 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카롤링거의 마수 피해는 타국보다 극심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더 우월한 능력을 가졌으니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으련만, 철저하게 인간의 법과 규약, 혹은 명예와 의무의 영광으로 묶여 있는 세계’의 이면이었다.

이 애들이 기사로서 제 몫을 하여 미래의 환란을 이겨내려면 정의롭고 명예로워야함을 안다.

그렇지만 클레이오로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서를 비롯한 아이들이 여전히 어리다는 사실을.

달칵.

회중시계를 꺼내 본 이시엘이 입을 열었다.

“아서 님. 시간이 늦었으니 이야기는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소식 전하고 들어가시지요. 클레이오 너도 쉬어야지 않겠나.”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아서와 클레이오의 컨디션을 생각해 한마디 건넨 거였다.

무릎을 탁 친 아서는 이제야 뭔가를 기억해낸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 맞다. 나 놀러 온 거 아니고 우리 다음 실습지 정해져서 알려주러 온 거였는데!”

“어딘데?”

본래도 실습이 적지 않은 수도방위대 학교였지만, 마수 출몰 이후로 현장 파견 횟수가 더더욱 늘어났다. 중간고사 이후로도 실습을 가야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바빠서 잊고 있었다.

“키시온 자작령이야!”

클레이오는 눈에 띄게 반색했다.

“원래 거긴 수도방위대 학교 실습지가 아니잖아? 웬일이람.”

안 그래도 한 번쯤은 자작령에 들러볼 핑계가 없을까 고심하던 차였는데 이런 방향에서 기회가 올 줄이야.

“이번에 병사와 기사들을 다 정식 등록했잖아. 그래서 실습지 허가가 났나 보더라고. 나랑 이시엘이 한참 못 돌아가고 있는 걸 알고서 학장이 실습지 배정을 손 좀 봐준 것 같아. 노인네가 제법이라니까.”

“너는 학장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냐.”

“어이! 너야말로 노인네가 기운이 뻗친다고 욕했잖아.”

“그건… 그냥 너무 시키는 일이 많아서 한 소리고.”

아서 이놈은 지도교수 욕하는 걸 뭘 그렇게 유심히 듣고 있다 사람 민망하게 하는지.

어쨌거나 제베디가 직접 배정해준 것을 보면 봄에 있었던 키시온 군영의 일은 제대로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시엘과 아서가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학장은 마음 쓰였던 것 같다.

말을 마친 아서가 자리를 정리했다. 클레이오도 미적미적 따라 일어나 두 사람과 같이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남녀 기숙사가 갈리는 입구에서 클레이오는 가방을 뒤적여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이시엘, 이거 새 건틀렛. 너랑 첼 거랑, 쌍둥이 거. 좀처럼 만나질 못해서 가지고만 있었는데 잘됐어. 네가 좀 전해 줘.”

이번 건틀렛은 지난번 것보다 더욱 호화로웠다. 마석 다이아몬드를 바탕으로, 제베디가 주입한 지식을 결합해 강도를 높인 [방어] 마도구 티플라움 건틀렛이었다.

완성이야 진작 했는데 야간에는 여학생 기숙사 출입이 안 되어 건네질 못했다.

클레이오는 그간 해가 뜬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온 날이 단 하루도 없었던 것이다.

이시엘은 말문이 막힌 듯 눈만 깜빡였다.

주머니 안을 슬쩍 들여다본 아서만 눈을 빛냈다.

“와, 다이아몬드! 이거 원 아까워서 끼지도 못할 만큼 반짝이는 마도구네.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쁘다더니, 이런 건 또 언제 손을 댄 거냐.”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고 하품을 하던 클레이오가 말했다.

“하암. 원래 일이 바쁘면 딴 일로 현실도피 하고 싶어지거든. 라센티 백화점 매장을 늘린 뒤 물품 대느라 고생한 레이디 디오네는 평생 안 하던 자수 놓기가 다 하고 싶어지더래.”

“이럴 수가. 피곤하면 그냥 자야지 왜 딴 일을 해?”

아서는 몸을 쓰는 일 전문인데다 아직 젊어서 모르는 모양이다. 피곤도 지나치게 쌓이면 자려고 누워도 눈이 말똥말똥하고 쉬이 잠이 오질 않는다는 걸.

사실은 아슬란 놈이 어깨에 보란 듯 두르고 다니는 ‘박편의 이창’만 떠오르면 자려다가도 짜증 나서 잠이 깬다는 사실을 클레이오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런 자잘하고 구구절절한 원한을 말해 봐야 이해 못 하는 놈이다.

“너도 안 자고 여기 와 놓곤 뭔 소리야. 아무리 검사가 잠을 줄여도 된다지만, 너희 둘 다 제발 사흘에 한 번은 좀 자라. 밤새 불 꺼놓고 대련하지 말고.”

“당연히 상태를 봐 가며 하는 일이다. 네가 걱정할 만큼 무리하지는 않는다.”

“그래! 이시엘이 얼마나 철두철미한데. 내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이제 가서 자라고 한다고.”

“너희 기준은 믿을 수가 없어.”

“우리 걱정보다 네 몸부터 챙기시지!”

세 사람의 끝도 없는 말 잇기는,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서서 서리를 맞고 있느냐는 류바 사감의 잔소리에 의해 끝났다.

오랜만의 다정한 밤이었다.

***

그 주의 일요일.

클레이오는 아주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간은 자료 읽고, 문헌 찾고, 찾아 정리한 것을 외우고, 결계 보강하고, 마법식 응용하느라 매일이 휙휙 지나갔다.

같이 공부하는 동기라도 있으면 발제나마 나눠서 할 텐데 제베디와의 수업은 늘 1:1.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전에 비할 바 없이 넓어진 에테르 그릇을 채우기 위해 에테르 순환을 거듭하느라 잠까지 줄여야 했다.

그 와중에, 아세르 저택에는 새로 나온 자동차를 한 대 사 두었다.

항시 머무르는 주인이 없다 보니 마사도 비고 마차도 없는 저택이었는데 좋은 대체품이다 싶었다.

최근 카롤링거에서 공기압 타이어가 발명되어 소량이지만 쓸 만한 자동차가 나오기 시작했단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구입했다.

그런 뒤 저택의 사용인 중 젊은 축에게 운전을 배우게 했다. 가장 두각을 드러낸 건 미라라는 어린 하녀였다. 그녀에겐 봉급을 더 늘려 주고 모자와 제복도 새로 맞추었다.

혹시라도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기면 저택은 두고 다 함께 차에 타고서 수도를 벗어나라고 일러두었다.

‘재산이야 얼마든 되찾을 수 있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에 캔튼 부인은 또다시 아들 군대 보내는 어머니의 표정이 되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그렇게 눈코 뜰 새가 없는 나날을 보낸 결과, 클레이오의 얼굴엔 그간의 과로가 고스란히 반영되고 말았다.

원래도 어둡던 눈 아래가 검게 퀭하고, 머리는 부스스 길었다. 간신히 조금 불어났던 체중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식 빠져나갔다.

부석부석하고 파리한 뺨을 쓸어보던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분명 디오네에게 한소리 들을 텐데.’

여전히 괴이한 취향을 자랑하는 젊은 사업가는 ‘그나마 봐줄 건 얼굴인데 이렇게 다루면 어떡해요!’ 라든지 ‘머리에 베르가못 오일이라도 좀 발라요!’ 같은 소릴 할 게 뻔했다.

눈속임도 안 될 건 알았지만 클레이오는 끝이 다 끊어진 머리에 빗을 대고, 평소엔 대충 묶는 타이도 거울을 보며 제대로 딤플을 만들어 맸다.

디오네가 새로 보내준 재킷을 걸치고 머리 리본도 사용했다. 그녀의 말은 순순히 따르는 편이 뒷감당이 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주 만의 외출이었다.

디오네의 사무실과 멀지 않은 세인트 리저벳 스퀘어 맞은편에, 건물 앞부분부터 처마 장식으로 꾸민 세리카식 찻집이 문을 열었다.

비단옷을 입은 점원의 안내를 받아 올라가자 디오네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늘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소이지만 주요 출자자인 디오네는 한적하고 전망 좋은 2층 테라스 자리를 딱 차지하고 있었다.

“왔어요, 도련님? 완전 얼굴 까먹겠어요. 머리도 많이 길었네요. 에그, 낯빛 상한 거 보래. 이게 뭐예요!”

“미안합니다, 레이디 디오네. 그간 공부하느라 정말로 바빴습니다.”

“요즘 열심히 한단 소린 들었어요. 나무라려는 거 아니니까 얼른 앉아 봐요. 우롱차는 내가 주문해 놨어요. 우리 상회에서 공급하는 최상품이죠.”

두 사람의 자리에는 대나무 차판과 자사호 같은 다구 일습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꽤 본격적인 세리카식이군요.”

디오네는 찻잎 뜨는 용도의 스푼인 차칙에 새겨진 연꽃 부조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국 흥취를 파는 델 어설프게 꾸려 놔선 금세 바람이 꺼지죠. 저도 투자만 했지 와보는 건 처음인데, 세세한 부분까지 제대로 해 두어 마음에 드네요.”

“레이디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수도 시민들에게도 대단히 인상적인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돼야 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오늘은 좋은 소식이 많으니까 기대해요.”

레비 유한회사 사무실에 들렀다 온 디오네는 서류 가방에서 익숙한 봉투를 꺼냈다.

클레이오의 3분기 수익을 정리한 장부였다.

‘어째 평소보다 봉투가 좀 두툼한데.’

“짠! 이거 봐요. 드 네쥬 에스트 호텔 부지 임대료를 새로 조정했어요. 지가가 워낙 올랐으니 특약이 발동된 거죠. 임대료를 500만 디나르로 올렸어요!”

부동산에 관련한 유지ㆍ보수ㆍ관리와 비밀유지 비용까지 더해, 연간 임대료 총액에서 8%의 수수료를 받는 그녀의 수익 역시 급상승했단 뜻이다.

고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클레이오는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재계약은 5년 후가 아니었던가?

“특약이요?”

“그때 계약서 다 읽었잖아요. 설마 잊은 건가요?”

이미 아득하게 느껴지던 재작년 봄.

디오네와 카타리나가 함께 작성한 계약서를 보기는 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머리에 남아있었냐면, 당연히 까먹었다.

클레이오는 재빨리 ‘약속’의 기능에 매달렸다. 떠오른 「기억」의 두루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파르르 돌아갔다.

“음, 그러니까, 연 임대료가 공시지가의 4% 이하 금액에 도달할 경우 5년 이내에도 재조정이 가능하다…는 특약 말이군요.”

“맞아요! 역시, 수도를 구한 대마법사답게 기억력이 비상하네요. 자세한 건 직접 읽어 봐요.”

자신의 치부를 부러 드러내 보일 이유는 없기에 클레이오 역시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서류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달각.

쪼르르륵.

그동안 디오네는 능숙하게 첫 찻물을 버리고 녹신녹신해진 찻잎에 다시 따듯한 물을 부었다.

차를 내리는 일은 선생을 구해다 배웠는지 능숙해 보이는데, 어째 움직임이 부산한 걸 보니 정말로 들뜬 모양이었다.

젊은 사업가로 두각을 드러내는 그녀이지만 쏠쏠한 현금의 원천이 되는 클레이오의 부동산 관리 일은 놓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심장을 얽어맨 계약한 사이가 아닌가.

“동안의 기차역에 새 결계를 설치하기로 한 뒤 호텔 부지의 지가가 아주 천장을 뚫었어요. 동안의 지가가 서안을 추월한 건 역사상 처음이에요. 드디어 1억 디나르 돌파입니다.”

1억 디나르.

이젠 자산 전체가 아니라 순수하게 부동산 가치만 천억 원에 이르렀단 뜻이다.

클레이오는 손안의 서류를 다시금 내려다봤다.

두 번 봐도 실감 나지 않는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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