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겨울의 도시 (3)
그렇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게 가능한 건 이동 속도가 느려서였다.
클레이오는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하늘의 귀족’을 상대하느라 또 에테르 고갈 상태에 가까워진 탓이었다.
식량이 들어 무거워진 배낭 두 개는 이시엘이 쓱 가져가, 그리 어렵지도 않게 어깨에 걸쳤다.
창고와 항구를 등 뒤로한 채 막연히 동쪽으로 걷다가 폰테카강을 발견했다. 부서져 있던 다리의 모양이 독특해 알 수 있었다.
거기부턴 더 쉬웠다. 강을 왼쪽에 끼고선, 멀쩡한 다리가 있는지 살피며 좀 더 조심스레 걸었다.
강 저편은 심각한 침식이 일어나 5레벨 검사의 도약력이나 6레벨 마법사의 마법으로도 건너뛸 수 없을 만치 틈이 벌어져 있었다.
물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혹한’이 일으킨 일이었다.
비교적 멀쩡한 오른편의 주택가 역시 상태가 좋진 않았다.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이 도시의 봉쇄 동안 일어날 수 있었던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지다가 멈춘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곧게 뻗은 도로 위엔 해체된 공장 기계가 실린 트럭이 길 가운데 멈춰서 있고, 키가 꽂힌 차들에 운전사는 없다.
거기서 스무 걸음 더 걸으면.
폭탄에 파이고 진흙탕이 된 도로가 나온다. 무너진 대전차호의 잔해가 스산하다.
거기서 열네 걸음을 더 걸으면.
손도끼로 부숴 장작처럼 패 놓은 고가구가 얼기설기 줄에 묶여 썰매 위에 고정된 채 얼어붙은 길 가장자리에 버려져 있다.
다시 아홉 걸음.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녹길 반복한 흔적이 남은 길 한 모퉁이엔, 벽돌 파편 사이 웬 신발 한 짝이 나뒹구는데 신발의 주인은 흔적조차 없다.
인간의 자취가 잔뜩 남은 장소이면서 인간 존재만이 온전히 삭제된 공간의 괴이함이 새삼 크게 와 닿았다.
클레이오는 불안을 억누르며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렸다.
강을 바라보며 쭉 늘어선 건물들의 상태는 들쭉날쭉했다.
흠 하나 없이 깨끗한 벽, 폭격으로 부서진 폐허, 그을음에 찌든 채 눈이 얼어붙은 창, 반짝이는 쇠시리 장식 너머 제라늄 화분이 상그럽게 빛을 발하는 발코니가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건물 하나하나마다 교차되었다.
깨진 유리를 합판으로 막아놓은 건물 다음에는 제국의 영화가 그대로 남은 듯, 푸른빛과 노란색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파사드가 온전히 드러났다.
하지만 다시 한 블록을 지나치자 눈 쌓인 채 골조를 드러낸 주택과 바랜 정치포스터가 붙은 건물이 나왔다.
본래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을 저택과 정원의 거리는 도시의 한 시기를 재현하고 있지 않았다.
건물 하나의 입면마다 각각 다른 연도의 계절과 상황이 지문처럼 찍혀 있었다.
뒤죽박죽 뒤엉킨 기억 속에서처럼 여러 해의 모습이 동시다발적으로 현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이 ‘기억된 세계’인 것이리라.
‘누구의 기억 속 세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리가 같은 장소에 속해 있다는 증거는 ‘혹한’ 마수가 차올랐다가 빠져나간 정강이 높이의 흔적뿐이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 모든 건물 1층의 기단부는 전부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고 외장재가 삭아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곳이었다.
괴괴한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클레이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문서를 모은다는 것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그렇고, 아슬란도 어느 정도는 기억된 세계에 관해 예측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 기가 막힌 순간에만 척척 나타나니 어떤 방식으로든 징조를 읽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래 봐야 곧장 마스터 클락엔 다다르지 못할 테니까, 우리가 너무 늦을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음… 일단 여기선, 어두우면 움직일 수 없어. 우리가 들어왔을 때 오후였으니 곧 해가 질 거야. 조금만 더 가다가 성해 보이는 집이 있으면 거기서 밤을 나자.”
동쪽을 향해 갈수록 성한 건물보다 파괴된 건물의 비중이 늘었다. 따스함이 남아 있던 청량한 일기도 어느덧 회색으로 가라앉았다.
이시엘은 감각을 곤두세워 검격 범위 안을 샅샅이 훑었다.
이곳에선 사람의 움직임이나 목소리는 물론이요, 마수에게서 나오는 에테르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없는 장소라면 해가 져도 걷는 덴 문제가 없어 보인다만.”
“아무것도 없는 게 문제가 될 거야.”
아무것도 없는 곳.
클레이오의 말 그대로였다.
아까 창고를 습격했던 한 무리의 마수가 물러간 후 공간은 줄곧 지독한 침묵에 빠진 채였다.
그런데도 전진을 멈춰야 한다면….
이시엘은 생각했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들어오기 전에도 혹한의 마수가 룬데인을 뒤덮었을 땐 하늘이 어두워졌었지. 전후 관계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두워진 뒤 그것이 또다시 나오게 되는 건가?”
“맞아. 해가 지면 도저히 밖에선 버틸 수 없는 기온이 될 거야. 우리가 들어오기 전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추위는 다시 닥쳐와.”
‘그리고 아슬란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았거든.’
므네모시네의 문으로 뛰어들 때 아슬란은 덧신도 없었고, 차림새도 가벼운 경장이었다. 그를 따르던 기사들 역시 경갑에 얇은 튜닉뿐.
‘고생이나 실컷 하라지.’
스슷―
스스스스.
이시엘과 클레이오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원근으로 인해 가늘어지는 강과 길의 끄트머리에서, 석양을 잠식하며 검은 기운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이 블록에선 유일하게 성한 건물의 대문을 밀어 열며 클레이오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이시엘도 재빨리 클레이오와 보조를 맞추었다.
.
.
.
‘혹한’을 피하는 덴 야외보다 실내가 나았다. 또한 놈들은 바닥을 흘러 이동하니 한 층이라도 높은 곳이 버티기 유리했다.
지난 원고에선 몇 시간 지나면 다시 해가 나고 추위가 물러서는 패턴이었다.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라며 맞서는 대신 숨기로 했다.
‘바깥에서야 다른 사람들도 있고, 룬데인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애를 썼지… 여기선 굳이 뭐 하러 저거랑 맞서겠어.’
제한 시간이 대폭 줄기야 했지만, 도시를 샅샅이 뒤져 마스터 클락을 찾을 필요 없는 클레이오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에테르를 일으키면 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붙는 놈들이니, 지나갈 때까진 마도구로 버티며 잠자코 있는 편이 체력과 에테르를 아끼는 길이었다.
그걸 알지 못해서 지난 원고에선 저 내리깔리는 추위, 바닥을 기는 어둠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다 아서 일행은 큰 위험을 맞았었다.
‘하지만 이번에 거기 걸려드는 건 아슬란 놈일 거야. 놈은 아서와 달리 피신에 써먹을 전경화 스킬도 없지.’
아슬란은 반드시 망할 거다. 이번 던전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서너 시간만 기다려 보자. 아마 그때쯤이면 지나갈 거야.”
클레이오의 말에 이시엘은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 흐드러진 정원 가운데 세워진 저택 안은 아주 깨끗했다.
다만 한 세기쯤 방치된 듯 모든 것이 바스러지기 쉬워 보였다. 1층의 가구는 ‘혹한’의 습격으로 인해 다리가 모두 삭아 주저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중앙의 층계참을 올라 3층 중간 즈음의 객실을 골라 들어갔다. 안을 점검하면서 욕실도 살폈는데, 혹시나 했지만 식수를 얻을 순 없었다.
흐트러진 침대 아래엔 싸다 만 여행 가방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셔츠, 바지, 손수건, 양말. 너무 생생해서 이상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환상에 불과한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인가?
원래부터 기억이란 있는 그대로의 구체적 실체가 아니다.
‘기억’은 과거로부터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관한 치열한 투쟁을 거쳐 선별된 결과물이다.
거듭해 회자되고, 다시 불러일으켜지며, 문자와 시각으로 되새겨지는 과거. 세월에 매몰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잊히지 않기를 선택받은 과거이며, 특권적인 과거이다.
동시에 기억은 무사이의 어머니, 므네모시네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기억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깨트리지 않으면 반복되는 환상, 이미 사라져버려 실체가 없는 허위로 무엇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일까.
클레이오는 고개를 흔들어 잡상을 털어냈다.
‘아, 생각해 봐야 뭐해. 당장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미 까마득한 세월 전에 사라졌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느니 에테르나 한 바퀴 더 순환시킨 뒤 잠이나 자는 게 나았다.
수트케이스를 발로 대충 밀어놓은 클레이오는 코트를 벗고서 침실의 긴 의자 한쪽 팔걸이에 기대 누웠다. 침대에서 퍼졌다간 절대 못 일어날 거 같아서였다.
창밖은 어두웠다.
혹한은 바닥에 깔리며 포석을 깨고 강물을 멈추었다. 온 도시가 냉기로 인해 얼어 부서지는 소리로 텅텅 울렸다.
직접적으로 마수의 피해를 입지 않은 3층의 기온도 훅 떨어졌다.
이럴 때야말로 여름 정원의 케이프 코트와 마석 루비 덧신을 활용할 적기였다.
바깥에서 한참 걸어온 덕에 코트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클레이오는 소금물에 젖어 뻣뻣해진 코트를 넓게 펼쳐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간이 난로를 꺼내 허리 아래에 받쳤다. 삭신이 쑤시는 자의 슬픈 선택이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아구구. 그럼 나는 좀 쉴게. 이시엘 너도 잠시 긴장을 풀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론 내내 강행군일 테니까.”
“네 의견이 타당하다. 옆에 앉아도 되겠나?”
“얼마든지.”
이시엘은 클레이오가 꾸물럭 비켜서 내준 긴 의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에테르를 일으키면 그에 반응하여 혹한 마수가 들러붙을 테니, [강화]를 쓰는 것보다 동료의 체온과 마도구를 활용하는 편이 합리적이란 판단 같았다.
제 코트 자락을 펼쳐 이시엘의 무릎 위까지 덮도록 채비를 마친 클레이오는 곧 에테르 고갈과 피로로 인한 잠에 빠져들었다.
기후마법을 쓰고, 기억된 세계로 들어오며 바다에 빠지고, 식량 창고에서 또 마수와 대치했다. 그의 체력으론 도저히 더 깨어있을 수 없었다.
어느새 실내에서도 숨이 김처럼 희게 서리고, 어두운 창밖을 새하얀 서리가 뒤덮기 시작했다.
고개를 모로 꺾은 클레이오는 곧 고른 숨소리를 냈다. 이시엘은 동료의 고개를 바르게 놓아준 후 멜라미드의 검을 꽉 쥐었다.
그녀는 추위가 도시를 잠식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
여섯 시간 동안 도시를 점령했던 추위가 물러난 뒤, 폰탄카강을 끼고 동쪽으로 오다가 마린스키 궁전을 향해 북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7킬로미터 좀 못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수 때문이었다.
도심의 중심부에 접어들수록 주변은 소란스러워졌다.
또 한 무리 떠오른 ‘하늘의 귀족’들은 이따금씩 높은 곳에서만 포격을 흩뿌릴 뿐 가까이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서 깊은 건물의 상부를 장식하던 조각들이 두 사람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각양각색 조각상들은 움직이는 것이라면 모두 도시의 침입자로 간주하는지, 클레이오와 이시엘을 마구 공격해왔다.
키이이이익!
카가가가각!
다음 모퉁이를 돌자 이번엔 사자와 독수리 조각이 살아 움직이며 이시엘과 클레이오에게 덤벼들었다.
맹수와 맹금의 발톱이 클레이오가 급히 친 [방어] 마법에 부딪혀 불꽃을 일으켰다.
날아오르는 마수에겐 클레이오가 황금의 활을 쏘았다.
가까이 달려드는 마수의 눈에는 어김없이 이시엘의 세검이 꽂혀 들었다.
키에에엑!
꿰엑!
이젠스 성 사건 이후의 엄청난 수련은 이시엘의 검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기억된 세계의 유일한 혜택인 경험치 3배 적립에 힘입어, 싸우는 도중에도 점점 더 이시엘의 칼놀림이 정교해졌다.
끊긴 길과 벽이 부서져 내부를 그대로 드러낸 저택 사이를 지나, 마침내 두 사람은 겨울 궁전의 지척에 도달했다.
아드미랄테이스키 대로의 초입에는,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부터 뛰쳐나온 거대한 청동 기마가 날뛰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히이이이잉!
본래 저 기마상의 기수로 올라타 있었을 표트르 대제의 조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수 없는 말은 한 세기 동안 제 발밑에 눌려 있던 뱀에게 목을 감긴 채 주둥이에서 침을 줄줄 흘렸다.
뱀의 독니에서 샌 독이 뚝뚝 흐르며 바닥을 시커멓게 녹였다.
푸르르륵! 푸륵.
치이이익.
‘약속’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수 잃은 청동 기마
―분류: 마수
―레벨: 6]
이 던전에서 나온 마수 중 가장 높은 레벨이었다.
청동 기마의 움직임에 조응하듯 광장 너머의 네바강이 뒤집혀, 강물이 들이쳤다.
바닥의 균열은 성 이사악 성당 앞까지 깊게 뻗어 왔고, 검게 고인 물은 수심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본래 이곳은 늪지 위에 세워진 도시.
핀란드만의 파도가 ‘혹한’으로 붕괴된 토대를 잠식하고 있었다. 마수들이 날뛰면 날뛸수록 침식은 더더욱 빨라졌다.
이 비참한 풍경의 한가운데 영화로웠던 성 이사악 성당의 금색 돔은 회칠로 빛바랬고, 목이 잘린 천사상들은 머리 없이 그들을 내려다본다.
도저히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궁전으로 가는 다른 길은 막혀있었다. 물에 가라앉거나 건물의 잔해에 파묻혀 버렸다.
청동의 말이 바닥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폐허가 된 성당 앞이 푹푹 파였다.
말은 가까이 오지도 않았는데, 온갖 잔해가 뒤섞인 흙탕물이 높이 치솟아 순식간에 이시엘과 클레이오를 덮쳤다.
철썩!
촤아아아!
클레이오는 「지각」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청동 기마’의 영역. 다른 마수들은 이 대결에 끼어들지 않을 모양이었다.
‘좋았어,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야. 이시엘을 레벨업 시켜줄 기회!’
흙탕물에 젖은 쥐새끼 꼴이 된 클레이오는 결연히 말했다.
“놈을 해치우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겠다.”
클레이오의 복잡한 계산 따윈 모르는 이시엘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