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251화 (251/489)

외전2. 자유와 예속 (2)

당신과 알았던 처음 3년은 매일이 새로운 발견이자 모험이었다. 일어나면 또다시 앎의 범위를 넓히게 되어 기쁘고 즐거웠다.

어머니의 서재에 있는 장서를 모두 독파한 뒤 소일거리를 찾으니, 당신은 내게 브룬넨어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급료를 올릴 필요 없이 한 과목을 더 맡아준다는 당신의 말에도 재정 관리인은 그다지 반색하지 않았다.

‘마님의 방침이니 급료는 받으세요.’라고 전했을 뿐이다. 그게 어머니의 방식이었다. 다소 넉넉한 보수를 지불하되, 그 자리에 없는 듯한 잠잠함을 고용인에게 바라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 뒤의 3년은, 그렇다,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당신의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몇 년이 지나도 알 수 없었다. 한 번 전서구를 들킨 후로는 연락 수단을 바꾼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었다.

결국 당신은 수도에 근거지가 필요해졌다.

디에르 시 파업 이후 들불처럼 번졌던 동맹 파업은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멀리서 지시를 내리기에는 중간 연락책이 너무 많이 실종됐던 것이다.

멜키오르 리오그난의 탓이었다.

어린아이는 결코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처참한 상황이 부숴냈다.

사정이 조금만 나았더라도 당신은 왔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을 텐데.

왕세자가 되어 내무보안국을 제 수족으로 삼은 멜키오르 리오그난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차례로 안가가 발각되고 당신의 숨은 조력자들이 북문 지하로 하나하나 끌려가는 동안에도, 나는 정말이지 어렸다.

당신이 여전히 내 곁에 머무르며 당신 인생의 소명을 공유하는 것이 못내 기뻤다.

당신을 조르고 졸라 깃발의 학습 회합에 참여했을 땐, 그 열띤 토론을 나 역시 들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어른이 된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브를 둘러쓴 나는 당신의 비공식적인 동반자였다. 나중에는 종종 발언 기회를 얻기도 했다. 조직의 원칙은 평등이었기에 노소를 가려 발언 기회를 제한하지 않았다.

물론 내 실제 나이는 아무도 몰랐겠지만 두건을 쓴다 해도 어린애의 체구와 목소리는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의기양양했고, 걸신들린 듯 탐독했던 혁명과 진보에 관한 이론을 성급히 실제에 적용해보고 싶어 했다. 어려서 가지기 쉬운 급진성이었다.

늘 맨 뒷자리에 앉아서 거의 말을 않던 당신은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변해갈 때에만 적절한 시기에 개입해 화제를 돌리곤 했다.

나는 그게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라 여겨 분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내 얼굴은 정말이지 어려 보였다. 눈은 크고 뼈가 느리게 자라, 열네 살에도 여전히 열두 살로 보였다. 변성기는 기미도 없었다.

내가 변덕을 부려 어느 댁의 무도회에 들르거나,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임을 헤집고 다니는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나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브릴 블랑쉬라는 이름으로 보냈던 내 첫 기고문이 열세 살 때 <클라리온>에 실렸음에도 그랬다.

나는 어디서나 유별나고 호기심이 많은 도련님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런 내 행동을 부친은 은근히 조장했다. 어쨌든 내겐 비범한 점이 있었고, 백작은 그걸 남들에게 내보이길 즐겼다.

당시엔 베르너의 새 정부가 살롱을 운영했었다. 그녀와 함께 백작은 파티를 많이 열었다. 베르너도 나이가 들었다. 전처럼 여럿이 얽히는 연애 사건을 벌이기에는 몸도 마음도 식어버린 모양이었다.

백작은 늘 수많은 만찬회장을 누볐다. 놀라울 정도로 명민한 외동아들은, 젊음이 한풀 꺾인 백작에겐 꽤 자랑이 됐다. 사람 말을 잘 따라 하는 비단 앵무나, 맵시 있게 움직이는 자동인형 정도로는 말이다.

살롱의 교묘한 언어를 이해하고 성악 실력이 뛰어난 아이. 논리학과 천문학을 논하며 완벽한 카롤링거어를 구사하는 꼬마.

백작은 아들을 데려와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 하고는 곧 자신의 사교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지면 아이는 그를 어릴 때부터 돌봐온 튜터가 맡아 집으로 데려갔다.

그런 식의 시나리오였다.

백작의 어린 아들을 모시러 온 가정교사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연락책으로서는 최선의 자리였다.

당신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언제 어디서 몇 건의 밀서와 암호문이 오갔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와 동행하여 이 저택, 저 저택을 방문한 당신은 귀족들이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서 잔을 부딪치는 동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당신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언제 어디서 몇 건의 밀서와 암호문이 오갔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댁의 하녀장이 깃발의 일원이고 어느 저택의 재정 관리인이 공화주의자인지는 그 장소에 있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한낱 연락책인 줄만 알았다.

그때에도 당신은 나에게 총체적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지하 활동은 설레는 모험이 아니라 피의 선택과 고통스러운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현실은 당신 혼자서 감내했다.

바지만 긴 것으로 갈아입었을 뿐 나는 여전히 학습실에서 카롤링거어 작문을 하고, 당신에게 문장과 필체 모두를 교정받은 뒤, 남는 시간엔 브룬넨 기술 사전을 읽는 도련님이었다.

당신은 그저 교사 노릇만 할 때에도 충분히 헌신적으로 직무의 본분을 다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교사였다.

그때 나는 계급과 교육에 관해서, 컨트리하우스와 타운하우스 바깥의 삶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알았다. 하급 젠트리의 아들이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주의 깊게 또박또박 흉내 내는 무난한 중류 계급의 억양과 수도 부근의 말씨가 얼마나 인공적인 것인지 깨달을 능력 역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열다섯 살.

가정에서 교양을 쌓기를 바라는 부친의 강권을 내치고 나는 사상 최연소 입학생으로 과학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과학 아카데미는 완전히 멜키오르의 영역이었는데도 당시의 나는 그 위험성을 몰랐다.

그야 당시엔 과학자들을 포섭하려고만 들었지 탄압하지는 않았으니, 당신이라고 미래를 알 순 없었을 테지. 왕세자의 충성스런 수하 여럿이 과학 아카데미에서 배출되었을 뿐이었으니까.

당신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정체가 발각된 적 없는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개인적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신처럼 이상의 실천에 인생을 저당 잡히는 대신에.

불에 매혹되어 평생을 살라 먹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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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두 번째 이름은 과학 아카데미에 들어간 뒤에야 알았다.

장 로베르.

카롤링거의 수도 루테티아의 33번째 대의원, 빅투아르 모로의 동료이자 고발자.

대의원 시절 당신의 목소리는 소란스런 의회에서도 선명히 울렸다고 들었다.

당신이 인민 공회 회의장에서 무장한 병사들에게 연행되어 나가던 대공포 시대 말엽까지, 당신의 연설은 한 번도 중도에 중단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빅투아르 모로는 장 로베르를 축출하기 위해 대의원 면책권을 졸속으로 폐기한 거야. 그 두 사람은 서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부터 카롤링거의 대통령과 대의원이 될 때까지 함께했어. 하지만, 그런 자리에 오르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과거의 사람과 함께 처분하는 법이지. 또 그들의 동료였던 마법사는 먼저 죽었는데….’

반골 성향을 숨기지 않던 내게, 속삭이듯 말을 전한 이는 과학 아카데미의 화학 교사였다.

기숙사 입소 절차를 밟기 위해 동행한 튜터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벼락에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자였다.

당신의 외모는 특징이 없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당신은 특이하게도 여러 언어를 오가도 목소리의 결이 온전히 꼭 같은, 드문 종류의 다언어 구사자였다.

화학 교사는 알비온보다 과학적 성취가 앞선 카롤링거의 앙리 꺄뜨르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인물로, 학창 시절에 카롤링거 혁명을 겪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보수적으로 처신하는 자이지만, 그의 눈 안에는 덜 연소된 불꽃이 남아 있었다.

대학 강의실보다 인민 공회 참관석이 익숙하던 학생의 꿈이.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신처럼 취급받았다.

현실 권력에 매이지 않아 영원히 옳은 자, 인민을 위하여 항상 그들 사이에 거하는 이.

이런 말을 들으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얼굴을 굳히고만 있었다.

내 인생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진짜로 중요한 일들이 벌어진 후 한참 뒤에야 진실의 일부를 파악하고 망연해지는 것이다.

당신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많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과거에 대해 으스대는 법이 없었으며, 결코 당신 자신을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신이 깃발의 지도자란 사실을 내가 알게 된 뒤까지도 그랬다.

그렇게나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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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꾸어놓은 인력이 당신이라면, 척력은 멜키오르로부터 왔다.

한때 나의 꿈은 과학자였다.

컨트리하우스의 모든 책을 읽은 나는 현재의 세계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한 이상이 참살당하고, 진리가 왕에 의해 정의되는 세계.

왕이 기적을 독점하고 그의 통치 권력을 신으로부터 증명받는 세계는 잘못된 토대 위에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세계의 토대를 바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엄정함으로.

과학적 발견으로 계몽의 이상을 이룩하고, 인간이 처해 있는 삶과 조건을 더 진보시키고 싶었던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꿈.

연구는 적성에 맞았다. 카롤링거만은 못 해도 과학아카데미는 일류의 교육기관이었다. 실험과 공부에 파고들자 엄청난 속도로 두 해가 흘렀다.

당신과는 드물게 만날 수 있었으나 언제 만나도 여전했고, 건네는 책들은 강렬한 지적 일깨움을 선사했다. 방법론은 다르지만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는 유대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같다. <클라리온>에 기고문을 보내는 일도 드물어졌다.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만심 어린 희망에 찼었다.

그러나 꿈은 단명했다.

멜키오르 리오그난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차원이 인간 존재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각인시켜주었다.

그리하여 내게는 피의 맛이 나는 맹세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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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일어났던 아카데미 진압의 밤.

왕족시해죄는 멜키오르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들을 몰아갈 구실일 뿐이었다. 문에 못질된 채 불타오르는 아카데미 기숙사에선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마법식을 새겨 막아둔 지하도의 입구 틈은 몸집이 아주 작은 사람만 통과할 수 있는 크기였다.

화학 교사는 그곳으로 나를 내보내 주며 당신의 은신처 주소를 다급히 읊었다. 시민 장 로베르에게 경고를 부탁하면서.

그는 그날 죽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의 대화재로 시체도 찾지 못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불타오른 이유 역시도 나는 훗날에야 알았다.

당신이 반대했던 멜키오르 암살 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베스나 드리스콜의 개들이 온 사방에서 날뛰던 시절이었다.

조직은 와해 위기였다. 내무보안국을 피해 활동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템푸스 선착장에 나타난 당신은, 수배된 동료들을 배 밑바닥에 숨겨 보냈다.

포리고로 떠나는 밀항선 선장은, 당신 덕에 단두대 코앞에서 살아 나온 옛 카롤링거의 해군 출신이었다.

밀항선이 포리고에 닿길 기다리며 당신이 은신해 있던 선착장 근처의 외딴 창고 역시 당신의 피신처 중 하나였다.

나는 모르고 당신의 옛 추종자는 알던 장소.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보냈던 마지막 날의 저녁을, 나는 기억한다.

이것이 기록이라면 너무 여러 번 넘겨봐서 책장이 모두 닳아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당신이 깃발의 조직원 중 하나인 줄로만 착각하다가, 그날에서야 당신의 진짜 정체를 알았다.

깃발의 사람들은 당신을 지도자라든지 대표라는 명칭으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신의 의견도 반박을 받았으며 당신의 중재가 항상 성공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당신이 깃발의 원로 중 한 명이리라고만 믿었다.

지하도를 통해 와 구정물에 흠뻑 젖은 나는 머리도 닦지 못한 채 화학 교사의 말을 당신에게 전했다.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지 마시오, 깃발을 높이 든 이여.’

물론 당신은 화학 교사의 간곡한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진실 가운데 근원 모를 배신감에 떠는 내게 따스한 찻잔을 쥐여 주며, 당신은 난처하게 웃었다.

“내가 깃발을 높이 든 이라는 사실이 나도 잘 믿기지 않는걸. 음… 나는, 따지자면 제대로 된 지도자 타입은 아니지. 일단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인물이 아니고.”

나는 당신에게 뭐라고 답했던가?

아마 거짓을 입에 담지 말라고, 주제넘은 준엄함을 흉내 냈던 것 같다.

감정을 하나도 숨길 줄 모르고 제 성질에 못 이겨 불타오르는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던 어린아이.

그게 나였다.

“어허, 어두워도 네 표정이 어떨진 뻔히 알겠구나. 그렇게 날 보지 마렴. 나는 나를 알지. 최대한 좋게 평하자면 현상유지형 정도가 아닐까? 전달하는 손 말이다. 깃발이 구겨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잡고는 다음 손으로 넘어갈 때까지 벌벌 떨며 한 발, 한 발 딛는 거지.”

죽을 때까지도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서, 당신은 자신의 약함과 두려움을 쉽게도 언급했다.

아마 당신은 당신 입장에서의 진실을 말했던 것이리라.

당신에 대해 생각할 때면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인간의 강인함과 연약함, 고결함과 범상함에 대해 가르친 것은 당신이다.

한 인간이 여러 얼굴을 괴리 없이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실천으로 알려주었다.

“그러다 이렇게 퍽, 엎어진 거고. 아이고, 운도 없지.”

고작 몇 제곱미터, 어두운 지하 은신처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밖에 없었으므로 밤이 이울도록 말이 길었다.

도대체 매혹이란 무엇이냐고, 당신 이상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냐고 내가 물었다.

“아직 네가 보지 못한 것일 뿐, 그런 인물은 존재한단다. 시대가 그를 위해 움직이는 것 같은 순간이 있는 자. 그런 자들이야말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이들이지.”

당신이 묘사하고 있는 인물은 이웃 나라의 피도 눈물도 없는 학살자 빅투아르 모로였다.

빅투아르 모로를 회고할 때 당신이 내비치는 감정은 배신감이 아니라 동료애였다.

당신의 왼팔을 자르도록 직접 명령한 남자를, 당신은 친애와 우정 속에서 회상하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나 인간에 대한 일말의 환상조차 가지지 않은 냉철한 당신이.

나는 볼썽사납게 울면서 주절거렸던 것 같다.

그 우스운 여자 이름 따윌 가진 살인마를! 이라고.

그렇다. 빅토르가 아닌 빅투아르는 여성형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은 전혀 우습지 않아, 프란시스. 빅투아르는 어릴 때 유모의 손에 숨겨져 치마를 입고 자랐지.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교회의 출생 신고서에 여자아이로 기록돼 있었거든. 덕분에 무사히 자라 어른이 됐지.

빅투아르는 말이야, 어여쁜 이름과는 다르게 키가 크고 건장했다. 잘 생기기도 했지. 그가 채소 상자를 뒤집어놓고 올라가 연설을 하면 아낙네들이 앞치마에 담아온 꽃을 단상 위로 던졌어.

붙어 다니니 비교도 많이 당했지. 얼굴로 혁명을 하는 건 아니지 싶었지만, 음, 앞에 나서서 이끄는 이에겐 외모도 중요하긴 했어.

그건 눈과 코의 모양, 턱과 이마의 조형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육신의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고유의 존재감이란다.

그는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길 좋아했지. ‘나는 내 이름이 자랑스러워 승리의 수호성인과 같은 이름 아닌가.’ 빅투아르의 단골 농담이었고, 사람들은 그 얘길 들으면 이미 여러 번 들은 말인데도 늘 처음처럼 웃었다.

사실 그에겐 왕의 사촌, 자애공 샤를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본인 입으로는 진실을 밝힌 적 없었고 남들이야 아무렇게나 떠들도록 놔두었지.

샤를 대공에 대한 진실?

이제 진실은 알 수 없지. 빅투아르는 직접 서명한 공안 재판소의 사형 선고장으로 그를 단두대에 보내버렸거든.

변호사들을 자기 보신에만 밝은 중류 계급의 서류쟁이들로만 보지 마렴. 모든 변호사가 혁명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혁명가는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빅투아르 역시도! 물론 난 아니고.

내가 그랜드 투어를 한답시고 카롤링거의 수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빅투아르는 노동자 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었지.

젊고, 재미있고, 매력적인 친구라고 여겼어.

나뿐 아니라 루테티아의 시민과 귀족들 모두가.

빅투아르는 진보연하던 자애공 샤를의 돈을 뜯어 야학을 개설했단다.

어영부영 그와 휘말려 다니던 나는 수학 교사가 됐지.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다 끊었더니 돈이 없었어. 모퉁이 거리의 5층에 살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지붕 아랫방이 방세는 제일 쌌거든.

검은 빵에 요리용 와인을 마시고 장작은 방의 물이 얼 때만 뗐지. 나나 그자나 옥양목 조끼에 붉은 모자를 쓰고서는 역사를 우리가 써나간다는 기분을 만끽했던 것 같아.

당신과 선생님으로 나뉘는 2인칭 대신에 공평하게 ‘너’를 쓰는 카롤링거어가 얼마나 해방적이었는지, 외국인인 나는 완벽히는 모르지. 그렇지만 입에 익는 건 금방이더구나.

내 학생들과 나는 서로를 같은 2인칭으로 불렀지.

처음엔 그들에게 품삯을 제대로 계산하는 법을, 나중엔 물리법칙을 활용해 바리케이드의 내구도를 높이는 법을 강의했지. 음, 값진 수업이었어.”

그랜드 투어를 갈 정도의 집안 자제였다면 평민은 아니었군요.

심지어 당신은 혁명 이전의 카롤링거어를 쓰잖아요. 내게도 그렇게 가르쳤고.

“네 부모님이 6년간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내게 주급을 줬던 건, 상대를 동지 아무개 씨로 부르는 자들의 카롤링거어를 가르치라는 의도에서가 아니었거든.”

이중적입니다.

“직업윤리라고 해 두자”

그 밤 나는 평생 동안 당신에 대해 알아 왔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위험의 한가운데, 당신의 목숨조차 풍전등화이고 실수가 있었다간 나까지 말려들어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당신이 나를 동등한 동료처럼 대하는 것이 지독하게 슬프고 죽도록 기뻤다.

“날이 밝지를 않는구나. 시간이 더디게 간다. 강의라도 할까? 넌 강의 듣는 걸 좋아하는 정말 이상한 학생이었지.”

이런 어둠 속에서 펜과 종이도 없이 강의라니, 옛 신녀들처럼 낭송이라도 하겠습니까?

“흠! 좋아.”

로베르는 성한 오른손을 내밀어 공중에서 책을 넘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상으로 빠끔 난 창에서 희미한 가스등 빛이 들어와 당신의 손등 윤곽만을 간신히 비추었다.

“지난번에 보낸 책은 다 읽었다고 했지? 자, 38 페이지를 다시 펴 봐. 맨 윗줄. 신의 죽음을 야기한 것은 무엇인가. 줄 바꾸고, 묵독의 발명이 신을 살해했다. 찬가의 음운, 암송을 위한 운율은 신성을 상실했다. 좋아, 좋은 문장이지.

하지만 문자가 기억의 장녀로 자리매김하고, 찬양이 그라모폰으로 대체되며, 신녀의 암송이 대량 인쇄로 교체된 시절에도 연설과 변론은 살아남았단다.

그 살아있는 말, 공론장의 열기.

혁명조차도 사람이 하는 일인 걸 알아두렴. 대의만으로는 부족한 한 뼘을 인간이 메우지.

그런 존재들이 있어.”

빅투아르 모로 이야기지요. 그는 에테르 감응자였습니까? 고유 스킬이라든지요.

“전혀. 에테르의 흐름 한 줄기 못 느꼈지. 그건 그냥 순수한 인간의 힘이었어. 아, 나를 감상주의자라 경멸하지 마렴.

너도 언젠가는 그런 자를 만나게 될지 모른단다. 인생은 기니까.”

그건 꽤 끔찍한 소리로 들리는데요. 개인숭배가 악습이라고 가르친 건 당신입니다.

“선출직 정치인의 매혹과 개인숭배의 위험성은 동전의 양면이야. 둘 중 하나만 가질 순 없는 거지.

처음에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도였던 것이 자신의 반대자를 살해하는 국가 폭력의 기구 창설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와 연관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하룻밤 만에 왕을 죽이는 것은 아니니, 폭력이 내리막의 사선에 설 때까지는 운동에너지의 축적이 필요하다 이거지.

하지만 마침내 때가 도래해, 이제까지는 모두가 법칙이라고 믿었던 상하관계를 전복할 때 느끼는 거야.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감각을.

달리기 시작한 전차를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야. 그건 악의나 고의에서 시작되는 일도 아니지. 그런 걸 사람들은 역사라고 부른다.”

새벽. 항구를 밝히는 가스등조차 꺼져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목소리만이 들려오던 밤.

일시적으로 짙어진 친밀감에 고무되어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그 끝에,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됩니까? 무엇으로 태어났다고 알려지게 될까요?

당신은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이렇게 답했을 뿐이다. 냉소적이고 연약한 웃음을 지으면서, 였을 것이다.

‘학살자와 착취자, 배신자가 골고루 섞인 가계의 말예로 기록되겠지.’

그 말이 끝이었다.

새벽이 밝아오자 당신은 내게 수면분을 뿌려 잠들게 해버렸다. ‘오래 살아라.’라는 말은 들은 것인지 나의 환청인지 모르겠다.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그 뒤 멜키오르는 당신을 살려 보냈고, 나는 맨발로 뒷골목을 뛰어다니며 당신을 찾으려 들었고, 당신이 멜키오르의 손에 키스를 하며 무릎 꿇는 장면을 보았고, 단편적 사실에 연연해 당신을 변호하지 못했고, 당신은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게는 저주 같은 성흔이, 죄의 증거와도 같은 붉은 나팔의 각인이 새겨졌다.

그것이 내겐, 다시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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