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269화 (269/489)

진주의 도시 (6)

그간은 원고를 고치는 데 급급해 읽어볼 수가 없었다.

색인도 없는 낱장을 파헤쳐가기에는 편집자 권한을 쓸 때마다 상황이 너무나도 위급했었다.

서사개입도가 상승하고 레벨도 오르면서, 이제는 드디어 이 원고를 거슬러 읽어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4장이 완성되고 5장으로 접어든 원고는 방대했다.

클레이오의 글 읽는 속도는 제법 빨랐지만, 그렇다 한들 이능의 개입 없이 저 많은 낱장을 8분 동안 낱낱이 읽어낼 순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원고를 조심스레 움켜쥔 클레이오는 거부할 수 없는 인력에 이끌린 것처럼 멜키오르에 관해 떠올렸다.

파르르륵―

그와 동시에 팔림프세스트의 낱장이 목적성을 가지고 펼쳐졌다.

[―색인 기능이 생성되었습니다.

현재 지정 항목:

인명 / 멜키오르 리오그난]

클레이오는 색인이 빛을 내는 페이지를, 아무 곳에서부터 읽었다. 서사시는 본디 그렇게 사건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아서를 북문 지하에 가둬두었던 한낮.

체계를 잃은 도서관에 자신의 기억을 빗대던 예정과 조화의 정원.

왕의 숲의 밤과 트리스테인의 겨울.

결코 발음될 수 없었던, 그가 잃은 신의 이름.

앞뒤로 오가며 페이지들을 훑던 클레이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이럴 수가….’

칼리오페가 원고 위에 새겨둔 이 세계의 정전, 인정된 역사는 클레이오 자신이 겪은 것과도 달랐고 멜키오르의 시점에서 「직독」한 기억과도 상이했다.

그 어떤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원고는 멜키오르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신을 거스르려는 자의 선언. 잔혹하든 지독하든, 진심이었던 모든 말은 핵심을 벗어나 무난한 욕망의 표현으로 고쳐 쓰여 있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지난 천 년의 역사에 기록된 이솔트의 생애가 불완전하기 그지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최종고에 나타난 멜키오르의 기록 역시 누락되고 변질돼 본래 있었던 일 그대로 기입되지 않았다.

이러니 멜키오르에게는 기록된 역사가 진실이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마침내 편집자 권한의 시간이 끝났다.

이야기는 몇 분 전으로 돌아간다.

클레이오의 목은 상처 없는 표면을 되찾는다.

자신의 스킬이 먹혔는지 확인하고 싶은 멜키오르는, 처음과 똑같이 묻는다.

“봤는가?”

“봤습니다….”

하지만 클레이오는 처음처럼 답할 수가 없었다.

그 미세한 망설임을 감지한 듯 멜키오르는 의아해했다.

“그대에겐 통하지 않는 성흔이라고 생각했는데.”

“성흔이 통한들… 제가 그 모든 간난신고를 보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헛된 수고가 아닙니까.”

마법사의 말에 서린 희미한 연민을 감지한 멜키오르는 가련하게 웃어 보인다.

저 마법사의 대답은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죄책감을 담은 것처럼 들린다.

신의 사자가 세계의 배반자에게 가지기에는 참으로 온당치 못한 감정이 아닌가.

“그래도 이제 그대는 이걸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

신의 대리인은 그를 알았으나, 여전히 그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해는 근본적인 조건이 동일할 때에만 성립 가능한 행위이다. 공감이나 연민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클레이오는 이따금 떨면서도 왕세자의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멜키오르는 그 헤이즐 눈동자 깊은 곳에서 허망한 탈진의 기색을 느낀다.

잠시 멈추는 듯했던 멜키오르는 얽은 상처로 가득한 양손을 뻗어 왔다.

‘또 죽이려 드는 건가?’

같은 수에 두 번 당할까.

클레이오가 미리 서클을 펼쳐놓으려던 때, 갑작스레 정원이 소란스러워졌다.

타타타타타탓!

리피와 레티샤가 들짐승처럼 격렬하게 정원을 질러오고 있었다.

아까 클레이오를 태워 왔던 운전기사 또한 모자가 다 뒤집힐 속도로 그 뒤를 따르며 쌍둥이들을 만류했다.

“아가씨들, 넘어집니다. 천천히들 좀….”

물론 만류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안 넘어져요.”

그사이 충분히 이쪽의 목을 꺾을 틈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멜키오르는 들어 올렸던 팔을 그대로 물렸다.

클레이오는 별다른 제지 없이 연못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엉거주춤 선 친구에게 쌍둥이가 와락 달려들었다.

“레이!”

“진짜 레이다!”

“와아아아!”

한 명은 뒤에서, 한 명은 앞에서 껴안아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품새가 아주 능숙했다.

그냥 감겨들었다가는 이 마법사가 다시 물에 빠져버릴 걸 아는 친구들다운 대처였다.

쌍둥이는 클레이오에게 달라붙어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괜찮아? 무슨 일 없었지?”

“물먹었나?”

반가움 반 놀라움 반으로 클레이오가 쌍둥이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난 멀쩡해. 너희도 들어왔구나.”

“너 가고 바로 따라왔어.”

“나왔을 땐 그 똥물색 강이던데.”

“여긴 도대체 어떻게 찾았어?”

클레이오가 묻자 리피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하하, 말 통하는데 뭘 못해! 일행이 실수로 물에 빠졌는데 때에 안 맞는 코트에 머리가 갈색 장발이고, 초록색 머리끈을 맸고, 아주아주 기다란 청년이라고 주변에 물어봤거든.”

“뱃사공들이 그러는 거야. 천 노인이란 사람이 물에서 건진 허연 청년을 데려가더라고 해서.”

“그래서 그 천 노인이 일한다는 저택을 찾았지.”

“여기 저택 문 앞에서 저기 운전사 아저씨를 만났는데, 네 친구라고 하니깐 우리도 귀한 손님이라잖아!”

쌍둥이들 뒤로 첼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좀 더 판을 크게 볼 줄 아는 그녀는 친구를 아는 체하는 대신, 막 못 가의 석계에 발을 디딘 멜키오르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기억된 세계로 올 때에는 물을 거치는 법이라 불편을 겪으셨군요.”

여기에 들어오기 전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서 멜키오르와 태서턴이 벌인 난장에 대해선 시침을 뚝 뗀 반응이었다.

멜키오르는 더없이 태연하게 첼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무더운 일기이니 물에 든 것이 그리 불쾌하지 않군. 생각해 주어 고맙네, 첼레스테스 경.”

“저하를 수행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불편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믿지 않더라도, 바로 그렇기에 계속할 수밖에 없는 연극이었다.

3왕자의 동료가 입에 담는 그럴듯한 외교적 언사에 멜키오르는 화사한 미소로 응답했다.

정원의 여름꽃이 일거에 무색해지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잘 부탁하겠네.”

.

.

.

쉬에 저택의 식당은 청록색과 금색으로 꾸며진 아르데코 양식으로, 천정에는 실링팬이 돌아가고 한쪽에는 무려 에어컨이 틀려 있었다.

멜키오르가 알아서 빠져준 덕에 식사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했다.

옷의 매듭 장식을 만지작대며 리피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칼라 높은 옷은 고상한데 귀여워.”

“매듭도 깜찍하구.”

밝은 초록빛에 무늬가 귀여운 치파오를 입고 머리를 올려 묶은 쌍둥이들과, 점잖은 남색 마 창파오를 턱하니 갖춰 입은 첼은 관광객 분위기로 즐거워 보였다.

클레이오의 옷 역시 세정 마법 걸 새도 없이 하인들이 거둬가 버려서 첼과 비슷하게 입기는 했는데, 몸이 너무 말라 볼품은 없었다.

일행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식탁엔 착착 음식이 차려졌다.

천 노인이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만찬을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부디 편하게 즐겨주십시오. 마님께서 결코 대접이 미흡해선 안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야 일행들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 동안 이걸 다 차려냈으니, 자신이 꾸린 사용인들의 솜씨가 자랑스러울 법도 했다.

각종 진미로 가득 찬 식탁을 앞에 두고 클레이오는 기가 질렸다.

‘세상을 구할래도 멸망시킬래도 일단 밥은 먹어야 힘을 쓴다, 뭐 이런 건가.’

이미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쥔 쌍둥이들은 준비태세가 만만이었다.

“와아아아!”

“엄청 맛있겠어요!”

“저희 쉬에 저택의 음식은 황푸강 서쪽에서 제일이랍니다.”

던전이 중국이라고 대접도 중국식이었다.

손님이 음식을 남기지 않으면 대접이 아니라는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차림새였다.

클레이오의 이전 생애 지식을 뒤져봐도 이름을 전혀 모르겠는 음식이 대다수였다.

처음에는 냉채였다.

놀랍게도 와인비네거로 맛을 낸 가리비 관자는 동서양의 기법을 함께 쓴 요리였다.

쪄낸 뒤 소흥주에 담가 차게 식힌 닭고기는 향과 질감이 완벽했고 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 노인이 음식에 대해 순서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손으로는 바쁘게 젓가락질을 하고 귀는 천 노인에게로 열어두었다.

“자아, 냉채 다음엔 이 탕을 들어 보십시오. 옌두셴이라고 하는데 상하이의 맛 중에서도 제 일선의 탕입니다. 연한 죽순과 돼지고기를 끓인 뒤 죽순 기름으로 향을 냈습니다.”

떠주는 대로 국그릇을 받아 한 스푼 입에 넣자, 말 그대로 눈앞에서 봄의 대숲이 빗소리를 내며 이파리를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

매운맛이 없고 달콤한 풍미에 향이 부드러운 음식은 그간 먹어본 중국 음식과 또 달랐다.

‘상하이 요리, 그것도 문화혁명 이전 버전인가.’

이것이 바로 상하이가 자랑하던 담미인가 보다, 그런 생각이 뒤통수를 훅 스쳐 갔다.

천 노인의 설명은 유창하게 이어졌다.

“민물 새우를 마늘종과 화댜오주, 해산물 육수로 맛을 내 아삭바삭하게 볶은 허샤정옌은 우리 요리사 임 씨의 특기인데, 민물 날것의 흙맛이라곤 하나도 없지요.”

노인의 말 그대로였다.

작은 민물새우의 껍질과 살 사이에 육수가 배여 깊은 맛이 났다.

“또 이쪽 털게는 양청 호수에서 잡아 온 상품인데 생강을 띄운 흑식초에 찍어 드시면 됩니다. 철이 좀 안 맞는 게 아쉽습니다.”

노인이 뚜껑을 연 찜통 안엔 주홍빛 고운 털게가 그득했다.

게의 등 껍데기를 젖히자 통통한 살과 노오란 알이 뽀드득 씹히는데, 꽃게와는 향이나 질감이 달랐다.

아무런 말도 없이 전투적으로 게를 까먹던 쌍둥이들은 한참 뒤에야 감탄의 말을 덧붙였다.

“뭐가 아쉬운 거죠? 이거, 이런 게는 생전 처음이에요.”

“알이 꿀맛이에요.”

조용하지만 빠르게 손을 놀리던 첼 역시 찬사를 덧붙였다.

“게에 곁들인 이 식초는 오래 숙성시킨 술처럼 향기롭네요.”

손님들의 열렬한 반응은 천 노인을 기쁘게 했다.

“하하, 잘 숙성한 흑식초는 술처럼 풍미가 풍부하지요.”

돼지고기 삼겹살을 노유와 팔각에 잘 조려서 표면이 수정처럼 매끄럽게 반짝이는 홍사오로우는 젓가락 끝만 살짝 대어도 슥 갈라질 만큼 부드러웠다.

거기에 따듯한 야채 요리와 오리선지탕이 연이어 나왔다.

끝도 없던 요리가 쌍둥이들의 공로로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 금박과 에나멜을 입힌 멋진 도자기 튜린을 하인 둘이 쟁반에 받쳐 날라 왔다.

이미 요리로 가득한 식탁 가운데에 튜린을 놓은 천 노인은 멋지게 뚜껑을 열었다.

호사스런 도자기 볼 안엔 각종 한약재와 향신료 사이로 자라가 웅크리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내심 꺼리는 마음이 있었는데 모험심 강한 쌍둥이들은 요리사들이 눈앞에서 자라를 해체하기 무섭게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와, 젤리 같은데 향긋하고.”

“국물이 혀에 달라붙네, 막.”

애들을 따라 호로록 마셔보니 과연, 그랬다.

자라 역시 딱딱한 등 껍데기만 남기고선 완전히 사라졌다.

이미 먹을 수 있는 한계는 진작 지났는데 젓가락을 멈출 수 없는 식사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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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일행이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시후롱징차를 맛보고 있을 때에야 멜키오르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부시도록 흰 창파오 차림이었고, 그 기묘한 조합은 또한 눈길을 끌었다.

더운 오후의 해를 가려놓은 덧문 너머 희미한 빛이 그의 주변을 떠돌았다.

광채를 반사하는 백금빛 머리카락을 어깨 한쪽으로 묶고 흰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려 입으니, 몇 시간 전 그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마법사조차도 순간 압도될 만한 자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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