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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274화 (274/489)

마담 리스의 연인 (3)

열 번의 반복 동안 분절되어 이어진 이 집요한 추적은, 천 노인이 런레이의 회중시계를 맡겼다는 파크 호텔의 야간 근무조 직원을 수소문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맨 처음에 두 사람이 다다른 건 하나의 통일된 결론이었다.

드라마 속 괴팍한 의사 선생 말마따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

그런 경우 전방위적 효력을 보여주는 약은 돈이다.

클레이오는 첫 벽에 부닥치자마자 천 노인에게 물어 믿을 만한 보석상부터 찾았다.

실제 금속인 금보다 훨씬 귀한 마석 금을 그냥 순금으로 감정받고 은전으로 바꾸었다.

실로 근묵자흑이라, 여왕의 정원 즈음엔 첼이 1억 원치 마석 인을 태운 데 경악하던 클레이오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공간이 리셋되면 찾지도 못하는 마석 금을 던전에서만 통용되는 은전으로 바꾸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지난번 영원한 겨울의 도시에서 아공간 지갑이 한계까지 차도록 얻은 게 마석 금이었다.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찾아낸 파크 호텔의 야간 근무조 직원을 돈으로 회유하여 런레이의 행방을 캤더니, 상하이 경마장에 종종 나타난다는 답을 들었다.

‘여기 파크 호텔에선 경마장이 내려다보이니 경마에 취미가 있는 손님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습죠.’

경마장 마권 판매소의 아가씨는 첼이 포섭했다. 포섭했다고 쓰고 미인계로 꾄 것이라 읽으면 된다.

‘런레이 씨요? 자주 오는 분은 아니에요. 항상 다른 사람과 와 귀빈석에 앉는데, 돈을 거는 덴 관심이 없어 보이죠.

눈꼬리가 길고 키가 큰 데다 자태가 우아해서 눈에 띄는 신사분인데… 으음, 어쩐지 설명하자면 어려운 얼굴이네요. 그분을 아는 사람이….’

그런 한두 마디 말에 의지해 여정이 이어졌다.

빨랫줄이 머리 위에 드리운 서민 주거지 농탕의 골목, 상하이 특유의 주택인 스쿠먼의 계단 아랫방에 세 들어 사는 문인을 찾는가 하면, 사기꾼, 모피상, 기자, 무희 등, 별별 종류의 사람을 다 만나야 했다.

그 끝에 기자의 전 애인인 무희가 말해준 단서가 결정적이었다.

‘흐응. 파라마운트 댄스홀의 급사 류샤춘이 그 신사분과 자주 말을 나눈다고 했는데, 매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와서 팁을 준다는군요. 뭔가 다른 목적이 있지 싶어요. 계집애들 치맛속이나 보러 다닐 사람 같진 않았거든요.’

반복되는 하루는 늘 8월 12일 토요일 오전 아홉 시에 시작됐다.

물론 던전이 재현하는 날이, 구체적인 1937년 8월 12일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은 이미 알았다.

도시는 전쟁의 불안 대신, 정해진 종말 직전의 파괴적 화려함에 휩싸여 있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 과거가 가장 유혹적인 웃음을 짓던 시절의 환영.

불야성은 무너질 것이다.

런레이에게 가까워져 가고는 있지만, 시간 역시 줄어들고 있어서 약간 초조해졌다.

먼젓번 반복에서 찾은 마지막 단서는 웨이터 류샤춘에게 있었는데, 그는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클레이오와 첼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

밤 아홉 시를 넘긴 시각에야 간신히 류샤춘을 만날 수 있었다. 돈을 좀 쥐여 주며 런레이 선생에 대해 물으니 바에서 기다리면 곧 올 거라고 순순히 말해주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제한 시간에 임박해 류샤춘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돈만 받고 튀어 종적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서 곧바로 마담 리스의 편지를 열어보았더니 내용은 이랬다.

[다시 돌아가 무희의 치맛자락 사이에서 답을 찾아보세요.

―리스]

첼은 새로 받은 편지의 내용을 전해 들을 때부터 위험한 얼굴이었다.

‘그 새끼가 우릴 속인 거였네.’

그로부터 장장 12시간 뒤, 그녀는 상대로부터 원하는 것을 뜯어냈다.

런레이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

.

.

카페 콘스탄틴의 웨이트리스는 싸늘하게 답했다.

“손님, 방금 수도가 고장 나서 오늘 영업은 더 못합니다. 다른 날 들러주세요.”

“마담 콘스탄틴도 안 계신 건가요?”

“아, 마담은 오늘은 빨리 들어갔어요. 오후 나절까진 있었는데. 무슨 일이시죠?”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런레이 씨라고 들어봤습니까? 마담과 막역한 분이라 들었는데요.”

“마담이 끼고 다니는 사내가 한둘이어야 말이죠.”

야외 좌석의 의자를 거둬들이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운 좋은 조기 퇴근을 막고 서 있는 남녀가 마뜩잖아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첼은 웨이트리스의 냉대에도 아랑곳 않고 한층 더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지갑을 꺼냈다.

“음. 늦었다는 건 알겠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거기 메뉴판 맨 위의 샴페인 한 병 포장해줘요. 거스름돈은 없어도 돼요.”

다 늦은 시간에 나타난 초면의 손님이 하는 요구 따위 단칼에 자르려던 웨이트리스였다.

그러나 거스름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며 건넨 금액이 심상치 않았다.

샴페인 값을 제하고도 25원은 됐다.

월수입의 4분의 1이나 되는 돈! 멋진 새 가죽 하이힐을 맞추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혹시 마담의 집이라도 좀 알려주실 순 없을까요?”

“으응,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알려주긴 좀….”

“정말로 말씀 하나만 물으려는 건데요.”

다른 직원에게 보이지 않도록 지폐를 잘 접어 손바닥 안쪽에 쥐여준 첼이 심장을 간질이는 눈웃음을 쳤다.

은빛 눈은 어스름 가운데 세공품처럼 반짝였다.

어느새 웨이트리스의 날 선 태도가 누그러졌다.

돈과 미모의 결합은 언제 어디서든 막대한 힘을 발휘함을, 클레이오는 톡톡히 깨달았다.

“마담, 지금은 애인 집에 살걸요. 하트 로드의 에딩턴 하우스요. 둥그런 발코니 달린, 작년에 지은 데 알죠? 호수는 가서 경비에게 물어봐요. 그 댁 아저씨 성은 보그다노프예요.”

“호오, 보그다노프 씨도 그러면 마담처럼 망명을 온 분인가 보군요.”

“천하의 한량 같은 백계 러시아인인데, 사실은 코민테른의 물주란 소문이 있어요. 진실이야 알 수 없죠.”

개인정보 보호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 덕을 봤다.

웨이트리스가 종이봉투에 넣어준 샴페인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트 로드면 가깝네. 말 들어보니 양쪽으로 하얀색 발코니 달린 그 건물 말하는 것 같아.”

“얼른 가 보자.”

두 사람은 기대감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늘은 허탕이었다.

보그다노프 씨의 집은 아파트의 6층 오른편 끝이었는데, 불은 꺼져 있었고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다.

한껏 끌어올린 클레이오의 「지각」에도 인기척이 안 잡혔다.

그걸 확인하자 클레이오의 등이 더 구부정해졌다. 하루치의 에너지가 완전 끝난 거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눈앞에 남은 시간을 보았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 / 남은 반복:

00:34:23 / 14:00:00 / 14회 ]

친구의 어깨를 붙들어주며 첼이 씨익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시간이 거의 안 남았어. 너도 더는 못 움직일 것 같고.”

“그래. 피곤하긴 하다. 내일은 여기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오늘은 마무리하자.”

첼은 손에 든 병을 슬쩍 기울였다.

“그럼 이건 어떡하지? 조금 뒤면 사라질 텐데.”

콘스탄틴에서 파는 달콤한 아르메니아 샴페인이었다.

알비온의 기준으로 봐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달콤해서 처음엔 낯설게 여겨졌지만, 몇 번 마시니 또 나름 익숙해졌다.

클레이오는 완전 방전된 배터리를 5분쯤 충전기에 꽂아놓은 정도의 기세로 살아났다.

“마실까?”

“집에서?”

시간은 이제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거리는 인파와 자전거, 인력거와 자동차로 붐볐다.

쉬에 저택까진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가는 동안 이번 반복이 끝날 공산이 컸다.

샴페인병과 클레이오를 번갈아 바라보던 첼이 대안을 제시했다.

“그보단 강이 어때? 그쪽이 더 가깝고.”

“뭐, 너 좋은 대로.”

“강으로 가자.”

첼은 능숙하게 택시를 세워 가든 브리지 앞을 행선지로 불렀다.

세계가 반복될 때 일행이 떠오르는 곳은 항상 이 가든 브리지 부근이었다.

철근으로 뼈대를 올린 가든 브리지는 꽤 현대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 항상 클레이오에게 묘한 감상을 줬다.

그리고 첼은 그 낯선 형태, 현대적인 철근 구조물을 인 다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세계의 끝을 휘감은 강물은 찬찬하고도 유장하게 다리 아래로 흘렀다.

다리 부근의 벤치에 드러눕자 저녁나절 내내 부산하게 도시를 누빈 피로가 몰려왔다.

하루 종일이 아닌 건 순전히 기후 때문이었다.

상하이의 8월은 무더웠다.

태워버릴 듯한 열기가 내리쬐어 한낮엔 영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 뜨거운 대기, 강렬한 냄새로 가득한 공기.

하천변에 지붕을 맞댄 가정집들의 하수,

파리가 들러붙은 채 상한 냄새를 풍기는 돼지고기 난전, 오와 열을 지은 병사들에게서 나는 땀과 철의 날선 냄새, 민물고기의 어망에서 나는 비린내, 골목길 어딘가 열어둔 부엌 들창에서 나는 팔각과 정향의 진한 향, 고급 백화점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운 향수 냄새, 사향과 재스민, 수선의 향.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공중 보건 개념을 확립하고 쓰레기 수거 체계와 상하수도를 보급한 마법의 도시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생함으로, 모든 감각이 과도하게 자극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더 피곤한 것 같단 말이지.’

던전이 리셋되면 한숨 푹 자고 난 듯 피로가 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클레이오는 기본적으로 체력이 없었다.

그런 그라도 샴페인 코르크 따는 소리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첼은 어느 틈엔가 슬쩍 해온 카페 콘스탄틴의 물잔에 샴페인을 나눠 따랐다.

두 사람은 미지근한 술을 머금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기억된 세계’의 경계 안에는 클레이오가 익히 아는 별들이 떠 있었다.

나중에 이 도시의 하늘은 매연과 공해로 오염돼 별을 찾기 어렵게 된다고 들었지만, 지금 재현된 시기는 그때가 아니다.

아직 이 하늘엔 인공위성이 떠 있지 않고 저 천상의 빛은 모두 신과 자연의 것이다.

물론,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어린 시절 짚어보던 별자리의 위치와 별의 이름은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상관없지,’

클레이오는 이전 생애, 학교 도서관에서 탐독하던 과학동아 과월호를 「기억」으로 불러일으켰다.

해의 잔영이 완전히 가신 하늘에 뜬 북극성과 목성, 금성과 화성.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려울 별들도 ‘약속’의 이능을 통해 좀 더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조금 김이 빠진, 설탕이 너무 들어간 샴페인을 홀짝이는 클레이오는 어머니가 사 주신 사이다를 아껴 마시며 밤하늘을 보던 추억을 떠올렸다.

이젠 거의 떠올리지 않게 된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밤하늘이었다.

한 잔을 금세 다 비우고 새 잔을 따른 첼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곳은… 가끔은 진짜 세상처럼 느껴지는데 하늘을 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어. 별자리가 다르군.”

이 시대의 파일럿은 항해사들과 다르지 않은 도구를 가지고 창공을 항해했다.

‘약속’ 같은 것 없이도 하늘의 별들이 떠오르는 계절과 방위를 모두 아는 파일럿이, 그녀다운 감상을 표했다.

백일몽에서 깨어난 클레이오는 쪼르륵 새 잔을 받으며 살풋 웃었다.

“별의 위치는 다르지만 이곳의 사람들도 별들에 이름을 붙이고 별자리에 신화를 새겨 놓지. 이를테면 저기 동쪽에 뜬 별, 저건 화성이라고 불러.”

“아하. 화성은 군신의 별이지?”

“어떻게 알았어?”

“아까 댄스홀 구조를 알아볼 때. 별자리 점을 보는 나제즈다에게 들었지. 후후.”

클레이오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첼은 던전에서까지 순조롭게 정보원을 포섭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훌륭한 스파이이자 사립탐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제즈다의 어머니는 스파스코예라는 작은 읍의 귀족이었는데, 혁명과 함께 작위와 재산을 빼앗기고 도망 나왔다고 해.

이 먼 타국에서 자란 자긴 병약한 어머니를 모시려면 무희가 될 수밖에 없었다잖아. 무희를 하고 있지만 사실 자기 외조모는 무슨 대문호의 연인이었다고 그러네.”

“그 말을 믿어?”

“다른 건 몰라도 쫓겨난 건 사실이겠지.”

“그래서 정보료를 넉넉하게 쥐여줬구나.”

“낭비라고 생각해?”

“아니.”

내일 사라져버릴 환상이라도, 그 은전이 오늘 신시어 백화점의 스타킹 한쪽이 되어 나제즈다를 잠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거기에서 첼이 기쁨을 느낀다면 클레이오는 아무래도 좋았다.

첼은 최고의 파트너였고, 클레이오는 일을 쉽게 풀어내는 파트너의 도락에 관대한 후원자였다.

카롤링거의 망명 귀족에게 이 방탕한 도시는 고향처럼 잘 어울리지 않는가.

망명자와 이방인의 도시. 고향이 없는 자들의 피난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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