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
그런 와중에도 출석 일수 관리는 해야 하는 게 또한 인생이었다.
유럽의 미래를 논하던 얄타 회담 중에도 목욕물의 온도는 중요하고, 누군가는 이천만 명이 사망한 전쟁의 폐허에서 면도용 거울을 그러모아 비치해야 하는 것이다.
제베디 교수에게 직접 연락은 못 해도 사람을 보내 우회적으로 사정을 알아볼 순 있었다.
마지막 학기 수업을 못 듣는 클레이오였지만 그간의 연구 실적을 바탕으로 참작을 받아 수업 일수를 채우지 않아도 졸업장은 줄 모양이었다.
‘작년부터 주말까지 연구실 나가서 구른 날짜 다 환산하면 절대 날로 먹는 건 아니니까.’
수도방위대가 낳은 금세기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클레이오에게 출석 일수 부족으로 졸업장을 안 줄 수도 없으니 교직원들이 생각해 낸 궁여지책인 모양이었다.
그 외에 신경 쓸 거리라면 자신이 왕세자를 시해하려 들었다는, 실로 사실에 가까운 추측 정도일까.
그 소문은 터무니없는 음모론으로 취급받는 듯했다.
‘진주의 도시’가 파훼될 때 클레이오가 마법식을 펼치는 순간의 내막은 아이들조차 모른다.
그저 커튼 끈에 목이 조여 진언을 못 말한 것인 줄만 알았다.
이렇게 근거를 댈 수 없는 사안은 선수를 치고 여론을 장악하는 게 중요한데, 첼의 기억된 세계 보고서 유출본이 신문에 나돌 때까지 가만히 놔두는 걸 보면 멜키오르는 이 건을 그냥 넘기기로 한 거다.
기억을 하든 하지 못하든, 그런 구실을 이용하진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타인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 이상으로 천형처럼 주어진 생애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이이니.
‘더 큰일을 벌일 거라면 그에게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
오히려 화제가 되는 건 첼의 보고서 쪽이었다.
80%의 진실과 20%의 허구를 섞은 91페이지짜리 문서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 룬데인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신비로운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데다 모험담다운 필치가 더해져 아주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멜키오르가 요술을 부리는 세계의 파수꾼을 이기는 전개로, 친구들의 분투나 저 자신의 스킬 획득에 대해선 입을 싹 씻었다.
레벨은 감지가 되니 숨기기 어렵지만 스킬은 쓰지 않는 한 은폐가 가능했다.
‘무능하다고 욕 좀 듣고, 첼의 스킬 중력의 구를 숨길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드러낸 힘보다 숨겨둔 힘이 더 큰 도움이 되니까.
오로지 마도구를 얻기 위한 직진이었기에 이번 던전 진입은 멜키오르의 입지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도구이기야 하겠지.’
멜키오르는 제가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아버린 뒤의 세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평가될지 하등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터.
하지만 클레이오는 그다음을, 이어질 싸움과 미래를 생각했다.
생사도 모른 채 장장 51일간 사라졌던 국왕 대리의 무책임한 행동이 룬데인 정계의 지형도를 완전히 뒤틀어버렸다.
아서에게는 유리한 판세였다.
‘이거 역시 살아남았을 때의 대비이지만.’
죽기를 생각하고 장래를 계획할 수는 없잖은가.
‘아무튼 지금은, 멜키오르 본인이 나서서 기억된 세계에 들어간 게 각료들에겐 다 알려져 있지. 검사로선 레벨이 높지 않은데 만용을 부렸다고 귀족원에선 씹어대고 있고.’
왕세자의 동태에 관해 귀족들이 살롱과 스모킹 룸에서 떠들어대는 소문을, 디오네의 전화를 통해 얻어들을 수 있었다.
가택 연금이래 봐야 저택에서 쓰는 전화를 끊어놓은 것도 아니니 디오네와 통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디오네가 걸고 캔튼 부인이 받은 뒤 클레이오에게 넘겨주는 식으로 대충 면피는 했다.
점심과 티타임 사이에 걸려오는 디오네의 전화는 갇혀 있는 입장에선 아주 반가웠다.
[변환][차폐]를 새긴 티플라움 메달을 서로의 전화기에 설치하고 통화를 하면 교환수에게는 강아지와 고양이 울음소리로 들릴 뿐이라 이야기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처음엔 에즈라가 환수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본래의 개발 목적을 달성하는 덴 실패한 마도구였다.
그게 어쩐 일인지 디오네에게 전해졌고, 디오네는 신문물을 클레이오에게도 전파했다.
덕분에 통화가 한층 쾌적하고 편안했다.
마도구를 쓴 후에는 대화를 빙빙 돌리지 않고, 수도방위대 마법단 기동타격단의 다리아 이사이 대위에게 클라이페다 풍경화를 쓴 안부 엽서를 대신 보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헤스터 워드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는 다리아에겐 유용한 선물일 것이다.
이래저래 소재가 끊이지 않다 보니 디오네와의 통화는 늘 길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왕세자 저하의 얼굴을 두 달쯤 안 보면 앞자리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자들도 딴말을 하게 되나 봐요.
언제는 문으로 뛰어 들어간 게 영웅적인 군주의 처사라더니, 같은 입으로 너무 성급하고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냐고 씹어대지 뭐예요?
웃겨, 그러면 평소에 왕세자 저하에게 알랑거리지나 말든지.
아무튼 여론은 별로 안 좋아요. 자릴 비우기에 두 달은 너무 길죠. 무도회 한 시즌이 지날 동안 모습을 감춘 건, 그들의 세계에선 한 세기간 룬데인을 떠나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상류계급의 파티광들은 그런 자들이죠.”
“그렇다 해도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바람을 피워 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야 당연하죠. 룬데인에 자연풍이 어딨어요. 게다가 이 판에서 감히 부채질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잖아요.”
함께 말을 멈추어 온전한 적막에 둘러싸인 두 사람은 같은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다.
쥴레이카 샤를로테 카스틸리엔.
“오늘자 <프레센티아>를 보니, 비전하 주변의 충신들은 나라의 앞날에 근심과 걱정이 많더군요.”
“어유, 말도 말아요. ‘카라파스가 곡창지대를 새까맣게 덮고, 문명세계의 수도가 셉티의 토사에 파묻힐 때 왕세자께선 어디에 계셨나이까?’ 이거 말이죠. 가슴을 울리던 명문이던걸요!”
오늘자 사설을 게재한 논객은 크뤼엘 공작령 출신이었다. 크뤼엘은 아슬란을 지지하는 최대의 세력이며 쥴레이카의 공개적 숭배자였다.
라인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인지 사설의 막바지 결론엔 면피용으로 아서가 끼워 넣어졌다.
산중에서 자란 철부지 막내 왕자도 저만큼이나 훌륭히 국왕의 역할을 하는데, 그보다 대단할 것도 없는 당신이 왜 국왕 대리의 자리를 꿰차고 있느냐 하는 논조였다.
아슬란 일파는 2왕자의 앞을 닦기 위해선 그들이 살해한 여인의 자녀까지도 몰염치하게 이용해먹었다.
‘칭찬처럼 보이게 언급해놨지만 쥴레이카나 헤스터라면 저들이 모욕당하거나 뒤처졌다 느꼈을 때 치받은 분노의 값을, 아서에게도 따로 받아내려 들겠지.’
저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국새를 아서가 얼렁뚱땅 집어 든 것도 모자라 위기를 이겨내고 빼어난 능력을 증명해버린 것은 그야말로 천재지변일 것이다.
그 천재지변이, 집에 갇혀서 별로 할 일 없는 클레이오에겐 이 이상 재미날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였다.
‘아슬란도 멜키오르도 죽 쒀서 아서 준 셈이지.’
클레이오는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 구구절절한 사설 덕에 국왕 대리로 재직하며 아서가 얼마나 잘 해냈는지 알 수 있어서 좋더군요.
<이브닝 스타>나 <스위프트 가제트> 같은 신문에 실리는 것도 물론 기쁘지만, 아침 식탁에서 신문을 펴 봤다가 아서의 이름자에 속이 부글부글 끓을 독자는 <프레센티아>에 더 많을 것 같거든요.”
“어유,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봐.”
전화선 너머로 디오네의 한심해하는 표정이 보일 지경이었지만 클레이오는 굴하지 않았다.
“<룬데인 스탠다드>조차도 이번엔 아서를 띄워줬단 말입니다.”
“뭐, 우표 판매대금을 재원으로 삼아 보상 법안을 밀어붙인 솜씨가 제법이긴 했어요. 딱, 임시 국왕 대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권력을 이용한 부분을 높게 쳐드릴게요.”
“레이디 디오네, 평가가 좀 짭니다.”
“짜긴 뭘 짜요. 진짜로, 세리카식 형벌처럼 소금통에 파묻혀 볼래요?”
“뭐 소금 말고 세리카식 소스라든지 그런 거라면 좋겠네요.”
“내참! 막 기억된 세계에서 돌아왔으면서 어디서 귀신같이 냄새는 맡아가지고.”
“무슨 말씀이신지?”
디오네가 수화기를 반대쪽 귀에 바꿔 끼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말아요. 예측 성흔이 가르쳐준 것 아니에요?”
“성흔은 카드 운세 같은 게 아니라니까요. 알아들을 수 있게 자비를 좀 베풀어 주십시오.”
“흐음, 뭐냐면요 전에 박람회에서 맛봤던 세리카 음식 같은 걸 찻집에서 내면 어떨까 해서, 활용할 만한 식재료를 물색 중이었거든요.
우리가 먹었던 남부식 음식 말고 내륙지방 식재도 조금 받아봤는데, 직원들은 영 입에 안 맞아 해서 전부 남았어요.
근데 자긴 트리스테인풍의 음식 좋아하잖아요. 막 빨갛고 맵고 짠 거요.”
클레이오는 조금 억울했다. 자신이 자극적인 맛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커리도 맵다고 하는 알비온인의 입맛이 여린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납작 숙여야 할 때.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대략 어떤 식재가 있습니까?”
“불이 나듯 매운 조그만 고추며 새카맣게 삭힌 오리알이나 화하게 쓰라리고 얼얼한 맛이 나는 후추 모양 열매에요.”
클레이오의 대답은 당연히 네, 네, 네 뿐이었다.
‘쥐똥고추에 피단하고 산초인가?!’
기대감에 군침이 다 돌았다.
전화를 끊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레이어 상회의 사환이 커다란 꾸러미를 자전거 짐칸에 실어 왔다.
반지하층의 조리실까지 달려 내려가 보퉁이를 열어본 클레이오는 환호성을 질렀다.
말린 쥐똥고추, 산초 열매, 유리병에 넣은 두반장, 굴소스, 건두부, 생간장, 숙성간장, 흑식초, 말린 가리비와 중국 햄에 더해 피단까지 있는 알짜배기 꾸러미였다.
이 세계에 이금기 소스를 만든 이금상은 안 태어났을지 모르지만, 그에 준하는 귀인이 있어 모진 세상에서 MSG의 축복을 받았더랬다.
‘산초 열매까지 갖춰졌으면, 시도해볼 만하겠네. 거기다 고수는 쌀 요리에 쓰니까 부엌에 이미 있고.’
쥐똥고추와 산초 열매를 구할 수 있다면 다음에 할 일은 하나였다.
유사 사천요리 제조.
우선은 가엘과 함께 마라유부터 만들었다.
마늘과 리크에 기름을 부어 향을 뽑은 뒤 그 솥에 산초와 건고추를 넣어 뭉근히 맵고 얼얼한 맛을 뽑아냈다.
창문을 모두 열어도 주방 안은 기름 증기로 매캐해졌다.
[바람] 마법식을 펴 공기를 순환시킨 클레이오는 솥단지 앞을 떠나지 않고 붙어 서서 내용물을 살폈다.
완성품 마라유는 들여다보면 눈이 따가우리만치 새빨간 기름이었다.
가엘은 마라유를 빵에 찍어 조금 맛을 보더니 ‘작은 삼촌이 좋아할 것 같은 얼큰한 맛’이라고 평했다.
그 뒤는 미리 준비해 둔 닭육수를 거른 뒤 커다란 포르치니 버섯을 얇게 썰어 넣어 풍미를 더하고, 얇은 페델리니 면을 삶아 말아서 후르륵 먹었다.
대략 마라탕면 먹는 기분이 났다.
파가 없어서 리크를 고명으로 쓰고 젓가락이 없어서 포크를 써야 하는 것 정도는 흠도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조리대 앞에 서서 훌훌 그릇을 비웠다.
잠옷에 가운만 걸치고 방을 벗어난 것부터가 예의와는 극도로 거리가 먼 행동이었지만, 막내 도련님이 뭘 먹겠다고 의욕을 부리는 일에 캔튼 부인은 말을 얹는 법이 없었다.
집에서 불난 것 같은 냄새가 난다고 야단을 부리던 베헤못은, 클레이오가 건져준 큼직한 닭고기를 앞발로 찍어 핥아보더니 너의 취향이 나쁘다며 펑 하고 꼬리를 터트렸다.
그 꼴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못아 넌 뭐든 잘 먹는 줄 알았는데 매운 건 못 먹는 거야?”
“켸에에에에엨! (매워도 정도가 있지 이게 음식이냐!)”
클레이오는 얼른 차가운 이젠스 와인을 물그릇에 따라 베헤못을 달랬다.
“그래, 이건 내가 먹을 테니 와인으로 혀 식혀.”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첨잔하고, 새로운 메뉴를 파악하는 차원에서 진지하게 탕면 맛을 보는 가엘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음식은 원하시던 맛입니까?”
“그래. 늘 수고해주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가엘은 데면데면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작은 노트에 조리법과 재료 용량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에선 저택의 주인에 대해 대마법사이니, 왕자들 간 정쟁의 희생양이니, 너무 높이 날다 추락한 오만한 자이니 말들이 자자했다.
하지만 가엘이 직접 접하는 클레이오 경은 그냥 좀 게으르고 트리스테인풍 음식을 좋아하며 너그럽다 못해 방치형인 고용주였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잘 줬고 휴가도 많았다. 이 저택엔 특별히 텃세를 부리거나 괴롭히는 고참도 없었다.
‘어쩌다 저런 양반이 그 복마전에 다 끼여선.’
요 뼈가 앙상한 도령이 기억된 세계에 두 달이나 머무르다 돌아온 뒤, 저택의 책임자인 캔튼 부인은 조용한 분노를 불태우며 도련님 모시기 특명을 내렸다.
그런 와중 세리카식 식재로 만든 요리를 저리 좋아하니, 오늘도 문간 너머서 부엌을 살핀 캔튼 부인은 만족스럽다는 표시의 눈짓을 했다.
분명 다음 주 주급은 평소보다 넉넉할 것이다.
이 저택에 텃세가 없는 건 하우스키퍼인 캔튼 부인이 워낙 엄하면서도 너그럽게 저택 안을 다스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용인 하나하나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썼다.
돈도 돈이지만, 이곳에선 가엘 자신의 능력이 인정받는 것이 기뻐 더 분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도령은 살이 좀 붙어야 정치 싸움이든 연구든 할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