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06화 (306/489)

재와 강의 도시 (7)

첫 번째 청동 거울 조각을 지키는 마수 중 가장 센 놈이 지네였던 모양이다.

법원 앞엔 조경수를 바짝바짝 말려 죽이는 귀신들이 우글거렸지만 상대하기 어렵진 않았다.

클레이오의 마법을 펼 것도 없이 아서가 방패로 밀어붙여, 심마가 속에서 불타오르는 시커먼 시체 무리를 쓸어버렸다.

머리와 가슴에 불을 품은 귀신은 그 수가 물경 백은 넘었으나 아이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크에에에엑!

아서의 반격을 피해간 검은 뼈다귀들은 첼과 레티샤가 차례로 차근차근 밟아 눕혔다.

클레이오가 방어막을 켜놓고 선 자리까지 도착할 수 있는 마수는 한 마리도 없었다.

인간의 힘을 한참 넘어선 파괴력을 발휘하는 친구들을 앞세우고, 클레이오는 차만 대 놓고 뒤에서 구경했다.

공짜 버스를 타는 건 아니다. 자신이 이번 턴엔 운전사 아닌가?

마침내 대법원 주변의 모든 마수들이 먼지로 돌아가고 앞길이 훤히 뚫렸다.

에스톡과 숏소드를 촤악 펼쳐 검은 먼지를 떨어낸 레티샤가 경쾌하게 소리쳤다.

“이제 여신상만 찾으면 되나? 어딨을까나.”

클레이오는 같은 자세로 오래 서 있어 결리는 무릎과 허리를 펴며 손을 쭉 내밀었다.

“저기 안에 봐봐. 바로 정면에 보여.”

“진짜네!”

대법원 청사의 중앙홀, 대법정 출입문 위에 자리한 정의의 여신상.

목표를 발견한 레티샤가 다람쥐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 단칼에 조각상을 부쉈다.

카가가강!

뭉텅뭉텅 조각난 여신상 안에서 고대하던 청동 거울 조각이 나왔다.

스트레칭을 하던 클레이오는 자기 팔을 붙든 자세로 입을 헤벌렸다.

아이들에겐 이게 단순히 이계의 모험이겠지만 클레이오 입장에선 감회가 달랐다.

90년대 이래 내내 신문 사회면에서 보던 조각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걸 보는 건 좀 묘한 기분이었다.

“자, 여기.”

“잘했어, 레티샤.”

“이제 나머지 다섯 개만 더 모으면 되지?”

“어.”

첫 번째 청동 거울 조각은 클레이오가 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어느덧 해가 정수리에 뜬 점심시간이었다.

클레이오는 차 트렁크에서 주섬주섬 코펠과 라면, 생수병을 꺼냈다.

“그럼 점심 먹고 갈까?”

“이 건물 로비 그늘이 시원하니 좋네!”

“그렇지. 점심은 내가 준비할게. 매운 거 어때?”

“이시엘 없으니까 괜찮지. 히히.”

“알겠어.”

이전에 트리스테인 영지에서도 매운 음식을 곧잘 먹던 아이들이었다.

클레이오는 코펠을 분리한 뒤 냄비 두 개에 각각 물을 붓고 인덕션 크기로 [발열] 마법 켰다. 물은 곧 파르르 끓어올랐다.

한쪽은 신라면 세 개, 다른 한쪽은 진라면 세 개를 끓였다. 하는 김에 햇반 몇 개도 [발열] 마법식 안에 밀어 넣어 두었다.

볶음김치와 장조림 캔도 땄다. 물에 빠졌다 건져냈어도 그 기간이 길진 않은지 김치 맛은 멀쩡했다.

어차피 설탕과 기름이 든 자극적인 맛인지라 괜찮은 듯했다. 보존식의 과학 만세였다.

원체 가리는 것 없는 검사들은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에도 아랑곳 않고 라면과 밥을 후룩후룩 잘도 해치웠다.

이번엔 클레이오도 검사들 못잖게 열을 내며 포크를 놀렸다.

그 꼴을 그냥 보아 넘길 레티샤가 아니다.

“레이, 너도 엄청 배고팠구나.”

“원래 핸들 잡으면 배고파.”

“평소에도 이렇게 좀 잘 먹지.”

첼이 실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럼 평소에도 운전을 시키면 되겠네.”

“미라의 일을 뺏지 말아 줄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이후엔 모두들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오전부터 실컷 날뛰었던지라 허기질 만도 했다.

삽시간에 코펠이 전부 비었다.

심지어 자기 그릇에 남은 라면 국물을 후르르르 완식하는 아서의 폼이 타고난 듯 안정적이었다. 역시 어딜 던져놔도 생명력이 잡초 같은 놈이었다.

“잘 먹었다.”

“이거 자극적인데 묘하게 입에 착 붙는단 말야. 레이, 넌 어떻게 알고 이런 걸 다 찾아왔어.”

“여신의 축복이니 여신께 감사하도록 해.”

“꺼으윽. 역시 환시보다는 예언이 쓸모가 있는 것 같아.”

아서와 클레이오 사이의 실없는 대화를 듣던 첼만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 먹는 데만 집중했다.

식사를 마친 뒤엔 [세정] 마법을 걸어 그릇을 정리하고 후식으론 다 같이 초코바와 새콤달콤을 나눠 먹으며 잠시 쉬었다.

그야말로 초등학생 간식 시간 같은 메뉴였지만, 수년 만에 맛을 보니 인위적인 인공 향 단것과 인스턴트까지도 이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이 던전은 청동 거울 조각과 유관한 장소 외엔 마수도 생명체도 없는 공간이라, 다음 스팟에 가기 전까진 편하게 있어도 괜찮았다.

‘8교에서도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에테르 반응을 추적해 마수들을 하나하나 때려잡으면서 파훼했으니까. 난이도가 너무 높으면 오래 머물 수가 없지.’

난이도 측면에서는 영원한 겨울의 도시보다 훨씬 쉬운 장소였다.

다만, 한국의 7월인 점이 문제였다.

날씨가 끔찍하게 습하고 더웠다.

일행은 하나둘 자연스레 법원 로비의 돌바닥에 드러눕게 됐다. 클레이오 역시 사양 앉고 몸을 눕혔다.

배도 채우고 여유가 좀 생기자 뒤늦은 민망함이 끼쳐왔다.

클레이오 아세르 20세, 약관의 나이에(이전 생애까지 치면 35세), ‘서초동 대법원 로비에서 마법으로 라면을 끓여 먹은 시민’ 타이틀을 얻고 만 것이다.

‘유튜브고 LTE고 뭐고 전부 다 사라진 세상이라 다행이네.’

그래도 라면은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던전에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마석과 마도구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제아무리 생생한 물성을 지닌 것이라도 모두 사라진다.

이제 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면, 자신이 스스로 개발하지 않는 이상 인스턴트 라면은 영영 맛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실컷 즐기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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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의 갈색 머리카락이 열린 창에서 바람을 받아 리본과 함께 흐트러졌다.

레티샤는 도르래식 손잡이를 파바박 돌리더니 차창을 모두 열고 몸을 반쯤 밖으로 내밀었다.

습기 찬 바람이 하나로 묶은 다갈색 머리카락을 깃발처럼 날리게 했다.

부르르르릉!

반듯한 대로를 꽉 채웠던 자동차는 세찬 물결에 휩쓸린 듯 도로 양편으로 처박혀, 폐차된 것처럼 납작하게 짓눌렸다.

신호 표시기 역시 수숫대처럼 꺾여 아무렇게나 휘어져 마천루의 흠 없는 창을 깨놓았다.

덕분에 속도를 내는 덴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대낮의 테헤란로에서 시속 100km 밟는 짓을 했더니 확실히 여기가 환상의 공간이란 실감이 났다.

이곳은 자신이 살았던 도시가 아니다. 경외하면서도 진절머리를 내던 그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뭐랄까.’

대학 시절. 추가근무가 이어진 야간 아르바이트 뒤. 죽을 것처럼 피곤한데 막차까지 끊긴 밤.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던 자신이 상상하던 멸망의 풍경에 가깝지 않은가.

청소년기에는 오로지 자신이 이명화의 아들이자 애비 없는 자식이 아닌 장소로 탈출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문제집을 풀었다.

그러나 이 익명의 도시, 자신이 누구의 자식도 아니게 되는 삭막한 장소는 그에게 감당키 어려운 비용을 청구했다.

몸을 눕히고 배를 채우는 물질적 비용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비용을. 모멸과 체념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가장하기 위해 은폐해야 하는 박탈감을. 공허와 소진을.

낡은 차체는 속도를 못 이겨 덜덜거리고, 아서는 차가 덜컹일 때마다 천정에 머리를 부딪히다 못해 아예 차체 전체에 [강화]를 전도했다.

클레이오가 운전하는 차는 경쾌하게 직선로를 달렸다.

지하철 입구의 유리 천장이 모조리 부서지고 계단은 토사에 막힌 강남역을 지나 금세 삼성역에 닿았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은 제 높이를 못 이기듯 모로 쓰러져 코엑스를 짓뭉개고 있었다.

그 가운데를 질주하는

각진 구형,

새빨간 프라이드.

모든 게 말이 안 됐다.

정말 한편의 부조리극이 따로 없었다.

저도 모르게 클레이오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전염성이다. 웃음의 연원을 모르는 레티샤가 클레이오를 따라 웃었다.

핸들 위에 얹은 왼손이 따끈따끈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약속’이 과부하를 일으킨 건지 클레이오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웃음은 비극처럼 불멸성을 지닌 가치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잊히고 말 것이다.

그건 이 도시가 맞이한 꽤 합당한 결말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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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20분도 안 걸려 목적지 근처에 닿았다.

클레이오는 잠실역을 조금 지나,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석촌 호수 사거리 앞에 차를 세웠다.

길이 있었대도 롯데월드타워가 붕괴되며 남겨놓은 파편이 빼곡해 차로는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

유럽의 성을 조잡하게 흉내 낸 뾰족한 성채의 지붕이 모로 꺾여 잔잔한 수면에 처박힌 모습은, 몹시 전형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의 배경으로 보였다.

수면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잔해를 디디며 나아간 일행의 앞에는 붉은 프록코트를 입은 너구리 캐릭터의 입간판이 푹 우그러져 있었다.

아직 생생한 너구리의 미소는 완전히 해맑았다.

‘재난 영화에서도 보통은 자유의 여신상이랑 뭐냐, 브라질의 예수상이 하는 역할인데 서울이 배경이 되니 롯데월드 마스코트인가….’

아주 먼 옛날, 텔레비전을 보던 동생이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옹알거렸던 놀이공원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되는 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을 줬다.

굳이 말하자면 슬프기보다는 얼떨떨했다.

‘분위기를 잡을 때도 아니지 뭐.’

7월의 환한 한낮을 배경으로, 신체 평균 연령 19세의 멤버끼리 롯데월드 앞에 도착하니 비장한 생존물보다는 현장 학습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이번 던전 보고서를 첼이 또다시 멋지게 써준다 한들, 지난번처럼 극장에 올릴 만한 소재는 못 될 것 같았다.

멈춘 차에서 팔짝 뛰어내린 리피가 주변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진 뿔 모양 유리탑이 있을 거라더니, 여신의 예언 어케 된 거?”

클레이오는 얕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탑 있잖아. 저 안에.”

마법사의 새하얀 손은 석촌 호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때 석촌 호수였으나 지금은 롯데월드 부지까지 침식해 마구잡이로 넓어진 엄청난 면적의 담수호를.

“호오.”

“와아.”

“우왓!”

프라이드 앞에 종종종 서 있던 세 친구가 제각기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상의 롯데월드타워는 부서져 폐허가 되었는데 호수에 비친 마천루는 위용이 웅장하고 기세가 당당했다.

“이쪽이 실체일 거야.”

클레이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면이 마구잡이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앗―

에테르 감응자들의 기척을 눈치챈 건지 잠잠하던 호수 안에서 마수들이 울렁울렁 일어났다.

완전히 물 반 마수 반이었다.

물가에 둘러선 친구들은 에테르로 안력을 높여 적을 파악했다.

“두 다리를 가진 물고기 떼랑.”

“초대형 해파리들인가.”

“물고기는 이가 날카롭고 해파리는 독이 있으니까 피해가면서 상대하는 게 좋을 거야.”

“마수는 마수네. 해파리 주제에 민물에 살고. 그럼 물 밖으로 꺼내면 어떻게 돼?”

“모르겠는데. 한번 해 볼게.”

아이들의 감상은 어딘가 느긋하게 들렸다. 마수들이 모두 6레벨인 탓이었다.

피식 웃은 클레이오는 공작의 완드를 현현시킨 뒤, 묵직한 마석 금 골드바를 코트 주머니에서 꺼냈다.

200m 범위인 6레벨 마법사의 서클 범위로는 호수를 모두 감쌀 수 없기에 이중 발진이 등장할 차례였다.

잘 먹고 잘 자서 컨디션은 좋았다.

6레벨의 서클 범위를 넘어선 [발열]과 [건조]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었다.

클레이오는 나름대로 힘차게 진언을 외쳤다.

“[우주를 창조한 불의 은밀한 따사로움이 가장 낮은 곳에 고여 그대의 젖은 발을 말리고, 이 밤의 찬 숨을 연인의 숨결처럼 감미롭게 하노라]”

스승이 뭘 알고 쓴 건지 모르고 쓴 건지 알 수 없는 낭만적인 진언이 멋없이 낭독된 결과.

…상한 생선포를 굽는 냄새가 천지사방으로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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