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북쪽, 수도의 원관념 (5)
힘들게 길을 뚫고 나와 보니 광화문 앞 해태도 어디론가 사라져 보좌만 그 자릴 지키는 게 보였다.
마침내 거북의 본체와는 광화문에서 부닥쳤다.
텅 빈 궁중에서 나온, 둔한 등딱지를 가진 거북이 한 마리가 괴이쩍은 비명을 길게길게 질러댔다.
첼의 스킬과 함께 클레이오가 [도약]을 써 보려 해도 그 고집스런 거북이가 8레벨로 영험한 놈이어서, 영역에만 들어가면 족족 스킬이 파훼되어 버렸다.
그래서 일행은, 검 하나 들고 흙더미를 파헤치며 길을 뚫었다.
마침내 세종로로 유인해낸 거북이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 모가지를 쭉 빼게 했을 땐 이미 늦은 오후였다.
구지가도 한 번 못 써보는 신세를 내심 한탄하던 클레이오는, 전투 동안 자기 몸 지키고 서 있기 바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경복궁에 불을 지르는 짓까진 안 해도 돼서 안심이 되면서도 허탈했다.
딴 나라는 던전이랍시고 신나게 부수고 다녔지만 아무리 기억된 세계라도 경복궁에 불내는 건 좀… 그랬다.
다섯이서 협공을 해 거북이를 잡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 서울 광장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때는 벌써 늦었던 거다.
“이럴 수가.”
“눈앞에서.”
“놓쳤음.”
“으!”
아슬아슬하게, 웨스틴 조선 호텔 1층을 가로질러 환구단 쪽으로 나가려는 순간 점등식을 하는 것처럼 한 번에 시내의 불이 밝혀졌다.
1층 바 바깥의 풍경은 분명 크리스마스 시즌의 꾸밈으로 보였다.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은 모두, 지독한 귀신들의 원한으로 빚어진 것이다. 동경과 원망, 성공과 질시의 빛이다. 지난 생애, 연말 시즌의 연회장 아르바이트를 하러 와본 이래 클레이오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기감이 예리한 아서는 그 심상치 않은 기운에 위험을 느끼고, 창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물러섰다.
이곳에서의 시일이 지날수록 창밖에 보이는 도깨비불 마수의 색이 짙고 화려해졌다.
4일째인 오늘 밤엔 도시의 낮보다 밤이 더 찬란할 지경이었다. 진정, 마도였다.
“놈들과는 맞서지 않는 게 좋겠어. 기다리자.”
“악! 짜증! 길 다 막아놔서 겨우 오니까!”
“미치겠네. 뭐 이래!”
쌍둥이들이 아쉬워서 죽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우아하게 꾸며놓은 호텔 레스토랑의 짙은 색 마루에 벌러덩 널브러졌다.
그 자리에선 환구단이 훤히 보이건만, 일출까지 하룻밤을 기다려야 했다.
고급스런 벨벳을 댄 의자를 리피가 괜스레 발로 툭툭 쳤다.
“여긴 또 괜히 호화판이라 더 열 받네. 여기 앉아서 손 빨고 구경이라도 하란 거임? 쳇.”
식민과 독재, 복잡한 근현대사의 얽매임 끝에 한 왕조의 유물이 호화로운 고급 호텔 한가운데에 자리하게 됐다.
그래서 이렇게 웃지 못 할 그림이 만들어지는 거였다.
확실히 코미디기는 한데, 검디검은 코미디였다.
딜레마 상황을 깰 방법은 물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는 크게 마법을 펼칠 일이 없어, 그릇 안을 뿌듯하게 채운 에테르를 확인한 클레이오가 말했다.
“가서 마지막 거울 조각을 찾자. 이 정도 거리라면 방어할 수 있어.”
아래에서 조명을 받아 현란한 단청이 드러난 환구단을 곁눈질하며 이시엘이 물었다.
“무리하거나 필요 이상의 에테르를 소비하는 건 아닌가? 진언 사용이 여의치 못하다고 들었다.”
“공격이 안 되는 거지 방어는 문제없어. 어떻게 할까?”
쌍둥이들은 벌떡 일어났다.
“가자!”
“가자가자!”
낮에 벌인 전투의 흥분이 채 안 가신 쌍둥이들의 머리 위로 투기가 풀풀 솟는 것만 같았다.
무려 8레벨 마수를 잡았는데도 이시엘과, 첼, 아서 역시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클레이오 본인 체력이 제일 문제인데, 그는 이 던전 안에서 밥밖에 한 게 없었다.
“거울의 마지막 조각은 거울 속에 있어. 저기, 제천 의식을 거행하던 팔각의 목조탑 안에.”
“과연 엄청난 에테르 반응이 느껴진다.”
이시엘 주변으로 둥글게 모인 아이들이 제각기 떠들어 댔다.
“이번엔 뭐가 거울을 지키고 있는 거더라?”
“일곱 발톱을 가진 두 마리의 용이야.”
“뱀도 잡고 거북이도 잡고 이제 드래곤도 잡네. 이럴 줄 알았음 그 모야, 마석 은탄환 든 총 갖고 들어올걸.”
“그건 명중해도 살상력 낮아서 안 됨. 우리가 레벨을 올려야 함.”
“으! 나도 쓰고 싶다, 진격의 원!”
들끓는 에테르의 기운으로 볼 때 레벨업이 멀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야 전쟁이 코앞이니, 이 애들을 상급 검사로 올려놓지 않아도 곤란했다.
여러 가능성을 가늠해 보던 클레이오는, 이번엔 과감하게 나서야 될 때라고 판단했다.
서브 퀘스트를 깨야 하는 던전이기에 장기 체제가 될 것을 각오했지만, 이렇게까지 전생의 삶의 추억에 맞춰진 여정이라면 이제는 됐다.
끝을 내야 할 때였다.
‘으음, 그런 비장한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고, 나흘 내내 인스턴트와 보존식만 먹었더니 슬슬 신선식품이 먹고 싶기도 하네.’
클레이오는 아서가 백화점 식품관에서 찾아낸 와인보다 열 배쯤 비싼 품목들이 깨지지 않고 갖춰져 있는 호텔 와인바의 스탠드 셀러를 흘깃 훑어봤지만, 좋은 와인이라면 아세르 저택 지하에도 엄청난 양이 소장돼 있다.
그는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상승합니다.
누적 비율: 75%]
눈앞에 떠오른 글씨가 고지하는 건, 그가 있어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좌표이다.
여전히 웃는 낯을 한 클레이오는 제법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내가 최대한 방어막을 펴 도깨비불을 막아볼 테니 그동안 너희는 용을 잡자.”
마법사의 어조는 경쾌했다.
아무도 ‘그게 그렇게 쉽게 할 말이냐?’고는 반문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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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쌍둥이들은, 열일곱 살에 환구단 천정에 살던 두 마리 칠조룡을 잡았다.
용은 7레벨 마수였다.
황금빛 몸에 붉은빛 갈기를 단 사나운 짐승은 이미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을 모신 신위를 잃었던지라, 보기만큼 위세가 대단하지 못했다.
두 마리의 용은 옅은 하늘빛과 흰색이 섞인 둥근 구 두 개로 남았다.
구름을 두 뭉치 뭉쳐놓은 듯 독특한 패턴이 아름다운 마석이었다.
“이거, 천지조화의 라리마래!”
“라리마는 귀여운데, 이름 엄청 거창!”
쌍둥이들이 신이 나 클레이오의 코트 양 주머니에 마석을 쏙쏙 집어넣고, 뒤처리를 맡은 첼이 청동 거울 조각을 턱 내밀었다.
“자. 얼른 하자.”
“그럼 거울을 맞춰볼게.”
지이잉―
일행 모두 둥글게 둘러서서 원형을 되찾은 청동 거울의 매끄럽지 못한 표면을 마주한 순간.
모두의 온몸이 붕 뜨는 듯 부유감이 들다, 끝도 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인파. 엄청난 인파였다.
클레이오는 온통 검은 머리뿐인 사람들 사이에 휘말려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날렵하고 키가 작게 느껴졌다. 본래 이전 생에서도 키가 큰 편이던 그였지만, 지금은 유별났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고개를 쭉 빼고 앞을 살폈다.
막 저녁이 내린 거리는 난잡하면서도 활기찼다.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향수마저 느끼게 해 주는, 오래된 레터링 글씨로 간판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번화가였다.
간판엔 영문과 한자가 같이 섞였고 작은 핸드백을 들고 양단으로 지은 한복을 입은 부인들이 종종 보였다.
덜그럭대는 노면전차가 사람들 사이를 위험천만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없었던 클레이오는 곧 바삐 걸음을 옮기던 행인과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자, 행인은 뭐라 고함을 지르려다 흠칫 멈췄다.
깃이 넓은 셔츠를 양복에 받쳐 입은, 낯이 햇빛에 탄 사내였다.
‘뭐여. 머리 누런 게 한국말 해.’
‘아부지, 아부지, 이 사람 키 엄청 크다.’
인상이 험악한 사내와 애매하게 얼굴을 맞대게 된 참이라 클레이오는 상황을 적당히 모면하기 위해 입을 뗐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딥니까?”
“남대문도서관 앞서 그거를 물어요?”
“도서관이요….”
클레이오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남대문에 무슨 도서관이란 말인가?
“목전에 써졌네. 보시오. 말 하는데 글은 못 읽소? 사람 싱겁긴.”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들의 옷깃을 훽 잡아챈 사내는 성큼성큼 가던 길을 가 버렸다.
클레이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현판에 남대문도서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2층 양옥은 기와를 나란히 얹었고, 1층에는 같은 기와를 얹은 주랑이 쭉 둘려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소공동 시절 남산도서관이 분명했다.
‘저게 아직 남아있으면 60년대인 건가….’
그러리라 예상했지만 하나도 달갑지 않은 반전이었다.
그제야 지금 이 장소가 어디인지 감이 잡혔다. 환구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시기는 겨울 즈음. 주변의 광고판이나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딱 설 대목 직전이었다.
‘그러니 인간이 이렇게 많지.’
마치 진주의 도시처럼 사람들이 노니는 것에 놀라야 하는지, 이곳이 서울의 과거인 데 놀라야 하는지 순서를 정해야 할 판이었다.
‘제천의 거울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기억 속의 사람까지 불러낸 건지.’
클레이오는 아직도 자신의 두 손에 꽉 쥐여 있는 청동 거울을 들여다봤다.
사람을 삼켜놓고도 둔탁한 광택만 비칠 뿐, 대단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여기다 마스터 클락을 비춰야 한다 이거지.’
들어올 때 자신이 들고 있어서 그런지, 또 다른 아공간으로 들어와서도 거울은 여전히 손에 있었다.
지금 클레이오가 선 곳은 침입자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시대이지만, 아이들이 처한 상황은 다를 수도 있었다.
서울에는 오랜 세월 동안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은 늘 이렇게 즐거운 모습이지 않을 터였다. 누구든 난리에 휘말리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클레이오는 [도약]하기 위해 서클을 펼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멈춰 서서 수런거리며 구경을 시작했다.
“저게 뭐여?”
“서커스단 온 거예요?”
“어메, 이보쇼. 뭣이 터진 거 아니오?”
“신고해, 신고!”
갈색 머리에 큰 키를 한 클레이오는, 60년대 한국에선 끔찍하게 눈에 띄었다.
거기에 빛나는 서클을 펼치기 시작하자 구경꾼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압축된 군중은 거의 적의를 띠려 했다.
‘아무래도 마법은 안 되겠는데.’
눈치를 보던 클레이오는 기다란 다리를 겅중겅중 놀리며 열심히 인파를 헤쳐 나갔다.
버스로 몇 정거장 안 되는 거리인데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시대의 인파였다.
클레이오는 이와 비슷한 일을 레닌그라드에서도 겪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풍경이 전변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세기말까지의 시간이 들숨과 날숨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풀려나간다.
도시의 과거를 살았던 이들의 기억이 모여들어 이 엄청난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진주의 도시는 뮈토스의 홀이 이상을 일으켜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서울은 무엇을 핵으로 하여 이 모든 망령을 생동하도록 하였을까.
진주의 도시와 같은 목적으로 이러한 환경을 조성한 거라면, 역시 헛수고였다.
클레이오는 이곳을 알았고, 그러므로 이 장소의 내력을 거듭해 되찾고 추억하기보다는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한눈팔지 않고 턱에 찬 숨을 뱉으며 힘겹게 발을 옮겼다.
그렇게 소공동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키가 큰 마법사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붙들린 뱃사람처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잊지 못한 그 목소리. 소란 가운데에서도 꽂혀 드는 음성 때문이었다.
외견보다도 느리게 나이 드는 목소리는 오래도록 그녀의 젊은 시절을 보존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한 시절을.
‘어머니.’
이명화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80년대의 명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