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22화 (322/489)

격발 (2)

“과분한 처우를 해 주었건만 네 태도는 불손하기가 그지없었다.”

이번에도 아슬란의 수행원들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저 혼자 다짜고짜 들이닥친 아슬란은 의자에 퍼져 있는 클레이오를 경멸적으로 내려다보며 저렇게 첫마디를 던졌다.

클레이오는 방에 처박혀서 책만 읽던 자신이 뭘 불손했나 몇 초간 고민했다.

‘식사 때마다 남겨져 나가던 산해진미를 말하는 건가?’

클레이오는 담담한 무표정 아래에서 은근히 속을 끓였다.

‘그렇게 거창하게 차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들어주질 않는 걸 어떡해. 아슬란 네놈 명령이 우선이라잖아.’

제압구를 찬 탓에 「지각」이 제어가 되지 않아 빵 조금과 물로만 연명한 며칠이 억울해 미칠 노릇이다.

고급 향신료를 넣어 어려운 공정으로 만든 음식을 보기만 하고, 술 한 방울 못 삼켜본 식사 시간이 자신이라고 좋았겠는가.

‘탄탈로스의 형벌을 당한 건 난데 왜 준 물 안 마시냐고 시비네, 원.’

물론 클레이오는 그런 수더분한 하소연 따윈 하지 않았다.

그건 주방장에게 할 말이었지, 스스로를 천 년 왕가의 유일하게 유효한 후계자라 주장하는 2왕자에게 할 말이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고뇌가 사라지고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건 좋았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사로잡힌 상황에서도 단식 투쟁을 벌이는 꼿꼿한 인사의 것으로 여겨져, 사뭇 오연하고 담대해 보였다.

「이격」의 작용과 스러질 것 같은 외모라는 상반된 요소가 결합된 결과였다.

“술을 그리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거의 손대지 않더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차고는 맛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클레이오는 제압구를 먼저 가리킨 뒤, 베헤못이 욕하면서도 오다가다 한 방울씩 핥아 먹던 넓은 레드와인 잔을 손끝으로 가벼이 밀었다.

입구가 넓은 잔은 야무지지 못한 손에 부닥쳐 경쾌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피처럼 짙고 붉은 부디갈라 와인이 왕자와 마법사 사이의 카펫 위로 툭, 툭 흘러내렸다.

그러려던 게 아닌 클레이오는 ‘헉!’ 하고 놀랐다.

‘베헤못이 자고 있어서 다행인데….’

맛없는 술도 술은 술이라, 낭비하면 은근히 성질내는 묘가 무서운 클레이오였다.

그러나 그가 당장 상대해야 할 건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검은 머리털 인간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빈정이 상한, 권력자 인간.

클레이오는 방금 잔을 엎은 게 의도였던 것처럼 자연스레 손을 회수해 책등 위로 포갰다.

어차피 엎어진 잔, 놈을 긁어서 정보나 더 캐보자는 심산이었다.

‘못 먹어도 고인 거다, 인마.’

이내 클레이오의 제압구에도 와인만큼이나 붉은 피가 맺혔다. 아슬란의 칼끝이 클레이오의 목에 닿아 있었다.

「지각」이 펼쳐져 있는데도 아슬란의 움직임을 전혀 포착할 수 없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7레벨 맞아?’

클레이오는 벌벌 떠느니 마음을 대범하게 먹었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의 마법사는 제 머리를 매달고 있기도 버거워 보이는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제압구를 찬 그에겐 완드도 서클도 없었다. 아슬란이 손끝에 힘만 세게 주어도 절명시킬 수 있는 육신을 지닌 주제에 마법사는 위엄을 유지한다.

7레벨의 끝에 다다른 기사의 칼에 목을 겨눠지고 있으면서 보이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대범한 태도로 비춰졌다.

“회유가 안 되면 살해입니까? 전하의 그릇은 그저 이 정도인 것입니까?”

끼기긱.

견고하게 만든 검 손잡이가 아슬란의 아귀힘을 못 버티고 비명을 질렀다.

즉물적 살의와 실리적 계산 가운데에서 흔들리는 검날은 마법사의 살갗을 위태롭게 저며 놓았다.

아슬란의 검은 눈 속에서 마침내 분노가 지펴졌다. 오히려 그것이 클레이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차라리 분노하는 것이 그에게는 나을지 모른다.

분노에 불타 시대의 죄악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허나 왜 자신이 그런 역을 맡도록 되어 있는지 연원을 파고 들어가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미쳐버리게 된다. 멜키오르를 보라.

그러나 이전과 달리 침착해진 아슬란은 곧 감정을 차갑게 갈무리하고서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듯 딱딱한 설득의 말을 흘려놓았다.

“회유라, 그래. 몇몇 이들은 너를 포섭해야 한다 간언하더군. 또한 몇몇 이들은 너를 절명시켜야 한다고 간곡히 간언하고.

나는 내 눈으로 충직한 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자를 확인해보려 했다. 너 역시 자신의 가치가 상당하다 여기는 모양이나, 너는 설득이나 처형이 필요할 만큼 의미 있는 인물일 수 없다.”

클레이오는 그 기묘한 판결의 근거를 눈치챘다.

다행이라 할까? 역사의 연기가 아슬란의 눈을 가린 것이다.

자신은 아슬란에게도 최초의 존재. 그러므로 2왕자의 희미한 기억이 경고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직접 죽일 가치조차 없는, 이 세상의 조연에 불과한 자.

그 후 얼마간 진부한 ‘협력 요청’이 이어졌다.

기디온으로 시작해 이시엘과 첼, 쌍둥이들을 차례로 걸고넘어지며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란 소릴 협박이랍시고 하는데 저 집 큰형이 하는 거에 비하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역시 뭘 좀 몰라야 사람이 덜 미친다고 생각하며 클레이오는 풀어지려는 표정을 괜히 진지한 척 굳혔다.

그러나 7레벨 검사의 감각을 속일 순 없었다.

아슬란은 절 앞에 두고 생명과 안위를 협박받으면서도 정신을 딴 데 둔 병약자에겐 검을 쓸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검을 검집 안으로 돌려놓았다.

“너는 제정신이 아닌 자로군. 감히 내 말을 듣지 않는 건가?”

“듣고 있습니다. 전하의 곁에서 마법사가 되라는 뜻 아니십니까.”

“그러하다.”

“그러면 제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가합니다.”

선선한 거절에 정적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방을 나설 것 같은 태도로 쌩하니 서 있던 아슬란은 무려 손수 의자를 빼내 클레이오가 책을 쌓아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진정한 의미로는 이 순간 처음 대화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제안은 네게 과분한 일 아닌가? 고작 상인의 아들에겐 감히 범접할 상상조차 못 해 볼 영광이건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경멸조인 아슬란의 어조에 의구심이 더해졌다.

눈앞의 황금과 주철 중 주철을 고른 이의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그런 종류의 의문 말이다.

이제까지는 진지하게 설득하기만 하면 얼마든 넘어올 수 있을 3왕자의 조력자 정도로만 취급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가 금이라 이거지? 누가 할 소릴.’

클레이오는 여전히 공손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으면 얼레벌레 대충 사는 두 금발의 왕자와 달리, 여기 흑발의 왕자는 보는 이가 클레이오 하나뿐이라도 왕족에게 기대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서고 앉는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오만한 기품이 있다.

이번 세기에 나지 않았다면 고귀한 군주의 상으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르는 태도이다.

아슬란이 말한다. 그의 목소리엔 반론을 황공하게 하는, 강압적으로 고상한 기색이 있다.

“나에게는 두 왕국의 왕관을 쓸 자격이 있다. 두 번째 왕조 귀환이 벌어질 터. 네가 따르는 그 얼띤 것은 결코 멜키오르를 저지할 수 없다.”

“어째서 멜키오르를 저지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 문답의 무용함을 탓하듯 아슬란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치켜올라 갔다.

“네 의뭉스러운 태도가 언젠가 네 목을 벨 칼이 될 것이다. 허나 이번만은 친히 답해 주지. 나는 그 천한 것이 한 말을 밤에 한 것이든 낮에 한 것이든 안다. 멜키오르의 목적은 고작 에테르의 폐지 따위가 아니다―.”

도청 카메오를 끄지 않았던 무도회 날 밤의 연설은 아슬란 쪽에 잘 접수된 모양이었다.

그에 더해 아슬란 측이 가진 정보가 술술 흘러 나온다.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스윽 그러쥐었다.

“―현존하는 세상의 멸망이다.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나뿐이다.”

뜻밖의 정답을 들은 클레이오는 박수를 안 치기 위해 다시금 두 손을 맞잡았다.

‘야아, 너도 제법 아네.’같은 대꾸를 해 버릴까봐 혼신을 힘을 다해 참은 거였다.

말을 듣기 전후로 전혀 변함없는 클레이오의 창백한 무표정을 마주한 왕자는, 이제 저 마법사가 가진 성흔에 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안다.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그 모든 벌어질 비극을 방기하겠다는 건가?”

“제 뜻은 변치 않습니다.”

“네게 주어진 유일하며 과분한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는군. 네가 역사에 올바르게 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말이다.”

말은 고상했지만 그 뜻은 그냥 ‘왜 놈은 되고 나는 안 되지?’이다. 그야 이 고귀하신 왕자님으로선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거다.

‘아서의 옆에 사람이 모이는 걸 여덟 번 겪고도 납득을 못 하는 거야. 그래, 납득 못 하는 게 다행일지도.’

아직까진 비교적 신사적으로 구는 아슬란이지만 언제 또 마음을 바꿀지 모를 놈이다. 이미 비틀리고 불쾌한 심사가 어절어절마다 배어 나왔다.

클레이오는 여전히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안 뗐다. 테헤란로도 대낮에 달려봤는데, 뭐 운전 이렇게 해도 안 죽더라.

“사방이 조용한 밤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시고 붉은 기운을 두른 전사들을 보내어 천한 어린 것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던 고귀하신 분께서 뜻한 바가 있으셨듯, 역시나 천한 핏줄인 저로선 천한 자의 곁이 편하니 어찌할는지요.”

사실 당신이, 세상 전부가 퇴색해도 아서에 대한 살의를 억누를 수 없듯 내가 그 앨 보위하는 것도 선택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신의 뜻이다.

그리고 아슬란에게는 결코 알도록 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신에게 대적하겠다고 나서는 미친놈은 멜키오르 하나로도 충분하고 넘친다고!’

“하. 실패작들은 결코 그 천것을 죽이지 못한다. 그저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길 바랐던 가르침의 일종이지.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바, 별무소용한 것이었으나.”

이번엔 정말 엄청나게 악역 같은 대사였다.

‘실패작’은 무고한 양민들이고,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는 ‘그 천것’은 이 세상의 주인공이자 온 세상에 다 알려진 클레이오의 절친한 친우건만.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게 누군데? 인체 실험을 해대던 미친놈이 지 동생한테 놈도 아니고 그것이래. 지시대명사 꼴 봐. 하긴 그러니까 애를 죽이지도 못할 암살자들을 자살 돌격시키지.’

클레이오는 학창 시절의 어느 밤, 부러진 검에 피 냄새를 흩트리며 테라스로 기어 올라오던 아서의 앳된 얼굴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좌절하지 않고 선의와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 애가 겪은 갈등과 고통을 아슬란은 모른다.

묘한 기분이었다.

아슬란은 아서의 방벽이 지독히 굳건하다 여기고, 그를 뒤흔들어 놓으려던 자신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클레이오는 아서가 말간 얼굴로 버틸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던 자신의 과거가 기특하기까지 했다.

‘암살자 보내는 게 타격이 된다는 걸 알았다면 아슬란은 끝도 없이 암살자를 보냈을 테니까.’

내도록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 클레이오를 내려다보던 아슬란이 냉랭하게 덧붙였다.

“어떤 이들은 대마법사가 왕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 하지만 그것은 헛된 옛이야기일 뿐. 멜키오르는 폐위될 것이다. 그 괴물은 제 것이 아닌 명성과 영광을 놓아두고, 누구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죽게 될 터. 네가 무엇을 노리든 삼왕자는 계승의 자격이 없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무려 킹메이커 취급을 받은 게 놀랍고 웃기단 생각을 했다. 물론 아슬란의 말뜻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2왕자가 기획 중인 것은 전면전이 아니라는 것.

그는 멜키오르를 죽이기 전에 먼저 정치적으로 살해하려 한다는 것.

상당히 좋은 계획이라 응수해 주려던 차.

콰앙!

타이밍 좋게, 검은 띠를 맨 기사 하나가 [강화]까지 두르고서 도약해 들어왔다. 그는 곧장 침실을 가로질러 주랑으로 들이닥쳤다.

그 서슬에 유리창이 모두 덜컹덜컹 흔들릴 지경이었다.

주변을 물린 아슬란의 명령까지 무시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엄청난 소식을 가져온 거다.

기사는 다급하게 무릎을 꿇은 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소리쳤다. 클레이오쯤은 벽의 장식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였다.

“전하, 마인라트의 프리드리히 공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또한 알비온 의회에서 국왕 대리의 자격을 묻는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며, 그 결과 전국의 교통 통제와 광역 룬데인 봉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한차례 놀라운 소식을 쏟아낸 기사는 숨을 고르느라 말을 멈추었다.

알비온의 철도는 모두 광역 룬데인을 중심으로 부설되어 있다. 국토의 어디로 가든 룬데인을 거쳐 가는 식이었다.

즉, 룬데인이 멈추면 전국의 철도망이 멈추게 된다.

“왕립 우편국의 업무 중지와 룬데인 봉쇄에 항의하던 평민원 의원들은 왕세자 근위대에 의해 구금되었고, 현재 수도방위대 기사단을 지휘하는 봉쇄사령관은 피어스 클라겐 경입니다. 현 시각 전화 역시 더 이상 사용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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