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두 왕국의 가장 고귀한 핏줄 이으신 이(1)
아슬란 리오그난에게는 긴 세월이 있었다.
긴 인내와 고난의 세월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적통의 왕자, 두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이은 자.
그러한 이름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아슬란은 고통받았다.
그것은 그를 강하게 하면서 추락시키는 약점이었다. 이해를 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인생의 굴레.
힐레이다 시녀장이 기억하고 있듯, 아슬란 리오그난은 쾌활하고 밝은 어린아이였다.
더 자라서도 아슬란은 엇나가는 일 없이 의젓하게 굴었다.
그의 생활은 규칙적이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검을 수련하고, 장래의 통치자로서의 수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이 나라를 물려받을 유일한 적자였다.
환시를 보는 금발 어린애는 기차도 닿지 않는 먼 궁전에, 역시나 제정신이라곤 보기 어려운 미친 어미와 함께 유폐된 지 오래였다.
아슬란보다 먼저 태어난, 너저분한 혼외 관계의 결과물은 열 살 무렵에야 백치에서 벗어나 겨우 사람 꼴을 겨우 갖추었다.
그래 보아야 과거가 어디로 가겠는가.
종종 발작을 하며 의식을 잃어버리는 멜키오르는 여전히 아슬란보다 키가 작고 뼈가 가녀렸다.
그럼에도 아슬란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했다.
그의 성실함과 엄격함이 보답을 받은 것일까?
지위 낮은 이들은 성년이 될 즈음에야 에테르 감응력을 인지하는 것과 달리, 아슬란은 유년기를 갓 벗어난 나이에 검기를 돋워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에테르 감응력이 일곱 살에 발현된 천재라고 기대 받던 아이가, 아랫것의 농담거리로 소비되는 높은 분이 될 때 까지 걸린 시간은 꼭 팔 년이었다.
늘 묵묵하게 훈련에 매진하는데도 아슬란의 검은 이유 없이 정체되었다.
주변인들의 인사말에서 기대의 찬사가 사라지고, 조숙이 조로로 의심받게 되는 동안에도 아슬란은 하루하루 묵묵히 훈련에 매진했다.
2왕자의 유년 시절 성격은 성년기까지 유지되지 못했다.
아이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잦아들고, 까닭 모를 분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교육이나 자질의 문제를 따지기에는, 지나치게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검사 아슬란 리오그난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피를 검에 먹이지 않으면 결코 더 높은 성취를 이룩할 수 없는, 통한의 저주를 받았다.
그건 아슬란에게 따라붙던 소문처럼 ‘어둠의 기사’의 습성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고귀한 기사가 되기 위하여 검을 들었지, 타인의 피를 보기 위하여 검을 갈고닦지 않았다.
한때는 그렇게 믿었다.
아슬란에게서 에테르 감응력이 발현된 뒤, 팔 년이 지난 겨울.
2왕자의 검술이 진일보한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전혀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찾아왔다.
열다섯 살의 아슬란은 왕의 숲으로 사냥을 갔다. 필리프가 갈 수 있었던 마지막 겨울 사냥이자, 외유였다.
병약하고 무예에 재능이 없던 왕은 겨울 궁전의 풍경만을 즐겼으나, 막 청소년기에 접어든 왕자는 온 숲을 제 정원처럼 누볐다.
왕자는 저를 지켜보는 이가 없고 기대나 실망의 수군거림도 없는 숲속을 좋아했다.
하지만 익숙한 숲에서의 방심이 사고를 불렀다.
초겨울에 내린 비로 지반이 침하된 바닥을 못 본 채 사냥감을 쫓다가, 몇 년을 함께해온 준마와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아슬란은 능숙하게 [강화]를 사용해 스스로를 지켰다. 부족한 에테르 감응력은 순발력으로 채웠다.
그러나 짐승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 다리가 부러져 일어나지도 못하는 말은 모로 누운 채 버둥거렸다.
쪼개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숨결마다 핏물이 울컥울컥 샜다. 쉬잇거리는 숨소리엔 지능 있는 동물의 고통이 묻어나왔다.
눈물에 흐려진 큰 눈 안에서 서서히 생명이 꺼져나갔다. 가망이 없었다. 기다림은 고통을 길어지게 할 뿐이었다. 아슬란은 결단을 내렸다.
늘 아껴왔던 존재, 부드러운 털이 남실거리는 말의 목을 꽉 껴안고서 소년은 제 모든 힘을 다해 검에 에테르를 밀어 넣었다.
짐승은 즉사했다.
검이, 한때 그가 귀애했던 존재의 피를 먹었다.
그 순간 아슬란 역시 3레벨의 검사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가 기다려왔던 성취는 온전한 축하 거리가 되지 못했다.
바로 그해에, 태어나 십칠 년간 검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멜키오르 리오그난에게서 에테르 감응력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감응력이 발현됨과 동시에, 멜키오르는 곧장 4레벨까지 치고 올라왔다.
꾸준한 단련도, 자질의 시험도 없었다.
훈련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말캉한 손바닥을 가진 존재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기를 펼쳐 3레벨 범위 안의 모든 것을 베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했다.
그 무료한 얼굴, 제 손에서 뽑혀 나온 검기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멜키오르의 눈빛은 아슬란의 분노를 혹렬하게 달구었다.
그것의 불길한 형상을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 불렀고, 그것의 불길한 목소리를 들으며 현혹된 자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아슬란은 평생 자신의 집이자 터전으로 여겼던 알비온의 궁성에서 연이어 일어난 일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까진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가 오늘은 알비온의 1왕자가 되는 것은 마치 악마의 농간처럼 느껴졌다.
멜키오르가 왕세자로 책봉되던 그 날.
아슬란은 이때 처음으로 모친 쥴레이카 역시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좀처럼 웃지 않았지만 흐트러진 모습 역시 보인 적 없던 귀부인,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분노로 전율하는 모습은 아슬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쥴레이카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 독도 단검도 미리 안 것 양 지나치고 흘려내니 그것이 어떻게 사람의 눈이란 말인가. 그 눈의 불길한 금빛이 이글대며 넓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독사이다. 사람의 형태를 입은 마수 같은 것이야!
마수보다 나쁘지. 마수를 숭배하고 마수의 발에 입 맞추고자 하는 자들은 없지만, 그것의 발치에는 무수한 이들이 조아리고 있으니. 그것이 변고이다. 아슬란, 네가 무찔러야 할 사이한 것이 이 궁성에 똬리를 틀고 있구나.?”
유모와 시녀의 손에 자라 모친의 체온이 낯선 아슬란은 저를 옭아매 붙든 모친의 등을 도닥여주지도, 그 가냘픈 어깨를 감싸주지도 못하고서 망연히 비탄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던 어머니 역시 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눈물은 뜨거웠고, 울분은 격렬했다.
쥴레이카를 여기까지 몰아붙여 놓고도, 멜키오르는 내내 초연했다.
수척한 꼴로 피를 토해내거나, 식사 중에 커트러리를 놓치며 발작을 일으킨 뒤에도 결국에는 목숨을 부지했다.
균열은 아슬란의 눈앞까지 다다랐다.
익히 알던 세계가, 테오발드 팰리스의 평온한 나날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열아홉 살이 된 아슬란은 왕의 숲에서 제 안의 분노를 온전히 자각한다.
어미를 잃고도 살아남아 십 대에 접어든 아서 리오그난은 학생 검술대회에 출전하여 3레벨을 이룩했다.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곧게 서서 힘 있게 검을 쥔 소년의 눈은 맑았다.
제 손에 쥔 것이 살생하는 도구임을 모르는 자의 순진성이, 아슬란은 증오스러웠다.
아슬란은 자신의 검을 수없이 피로 적신 후에야 힘겨이 한 레벨, 한 레벨 올려 나갈 수 있었다.
산 것을 베지 않으면 검은 결코 노력에 응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만이 이러한 곡절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무언가가 아슬란의 운명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너무 높고 아득한 곳에서부터 가라앉은 어둠이라 시작도 끝도 볼 수 없는 암흑이.
종종 대련하는 상대인 피어스 클라겐은 2왕자에게 어설픈 아부를 줄줄 주워섬겼다.
아슬란의 검술 수준으로는 진작 5레벨에 올랐어도 이상하지 않고, 보통의 5레벨 검사들보다 왕자의 실력이 훨씬 빼어나다고 극찬을 해 댔다.
천박하고 얄팍한 인간이나, 피어스 클라겐은 소드마스터였다. 그의 검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아슬란은 자질이 넘쳤고 자질 이상으로 노력하는 검사였다. 그런데도, 레벨만은 쉽게 오르질 않았다.
왕의 숲에서 돌아온 밤, 시녀와 시종을 모두 물린 아슬란은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할 눈물을 어둠 속에서 떨구었다.
왜 그 천것은 고난 없이 영웅이 되고 그 자신은 살생을 해야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낑― 끼잉
충직한 개만이 주인을 달래주기 위해 다정하게 고개를 디밀었다.
루안은 늙었다. 바랜 털이 빠지고 눈이 멀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주인인 아슬란을 핥아 주고 보이지 않는 손끝에 코를 부비곤 했다.
아슬란은 새끼 시절부터 함께해 온 루안을 정말로 귀애했다. 늙은 개가 오르내리기 힘들지 않도록 부러 1층 침실을 계속 써왔을 정도로.
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개의 바짝 마른 머리와 살짝 누운 귀 위로 도르르 흘러내렸다.
축축한 절망을 뿌리치지도 않고 개는 아슬란에게 꼭 붙어왔다.
아슬란은 가족 같은 동물을 껴안았다. 커다란 개는 어느새 아슬란의 품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작아졌다. 아니 그가 자란 것이다.
루안은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였다.
그의 인생에 결코 많지 않은 친애의 대상.
그러므로, 바로 그래서.
아슬란은 그해 생일날 하사받은 발토스의 검을 칼집에서 꺼냈다. 폼멜의 흑요석이 어둠 속에서 기이한 광택을 냈다.
검은, 수천 수만 번 연습했던 경로를 따라 찰나 간에 개의 생명을 앗아갔다. 검기는 날카로웠다.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짐승의 숨이 잦아듦과 동시에 아슬란 리오그난은 5레벨 검사가 되었다.
이제껏 그 어떤 수련으로도 닿을 수 없었던 고지였다.
개의 피를 닦지도 않고 침실 밖으로 나온 아슬란은 어두운 침실에 눈물을 두고 나왔다. 스스로 살해한 자신의 유소년기는 개의 시체와 함께 썩었을 것이다.
아슬란은 더더욱 말수가 줄었다. 제 검술의 수준이 올라간 사실 역시 함구했다.
대신 더 많은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르고, 제왕이 익혀야 할 것이라면 무엇이든 열성으로 익혔다.
알비온은 기사왕이 건국한 나라.
필리프처럼 유약한 자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의 왈가왈부조차 잠자코 들어야 하는 왕이 된다.
아슬란은 결코 필리프 왕처럼 통치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다.
또한 그토록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희생이 정당화 될 수 있으리라, 그는 믿고 싶다.
이듬해 봄.
아슬란은 제가 깨달은 고통스런 진실을 모친에게 전하기 위해 니네베 호수의 궁전으로 갔다.
멜키오르가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왕비는 종종 니네베 성에서 그녀의 분노와 슬픔을 삭이곤 했다.
하얀 성 높은 꼭대기에서, 낮은 이들에겐 보일 수 없는 눈물을 숨기고 있던 어머니에게 우선 5레벨의 성취를 고하고.
또한, 오로지 피로 검을 씻어야만 자신이 위대한 검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란 사실 역시 담담하게 고했다.
“? 하지만 어머니, 이제 제 검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귀히 여기는 대상의 피를 묻힐 때에만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아슬란에게는 더 이상 죽여 피를 볼 만한 사랑하는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으로 저울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여기 5레벨이 그가 자력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검의 한계였다.
진실을 알게 된 쥴레이카는 울음을 그쳤다.
그 밤.
2왕자에게 젖을 주었던 브룬넨인 유모의 관이 밤중에 뒷문으로 나갔다.
마침내 6레벨에 오른 스무 살의 아슬란은 웃음도 눈물도 모르는 얼굴을 가졌다.
왕비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 따윈 얼마든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목숨을 바친다 해도 아들을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왕비는 젖은 뺨을 닦고서 아들에게 다가섰다.
“? 네 사랑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기에, 네가 사랑하는 이의 피로써만 검술이 진일보하는 것이란다.
가장 고귀한 이가 가장 준엄한 시험을 받는 법. 이 고난은 네 핏줄의 선택받음을 증명하는 것이야, 아슬란.?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모친은 브룬넨어로만 다정한 어머니의 말을 썼다. 알비온어로는 아들에게도 딱딱한 예를 표했다.
그러나 아슬란은 그 두 말 모두 어머니의 말이며, 자신을 위하는 이의 언사임을 알았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보물, 왕관의 보석과도 바꾸지 않을 아들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며 쥴레이카는 사람의 도리마저 잊기로 했다.
그녀는 카르멜라 여왕의 배우자인 어뉴어린의 비망록을 가지고 있었다. 리오그난 왕가의 광기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연구했던 마법사의 비망록을 말이다.
대대로 에테르 감응자가 태어나는 리오그난의 계보이기에, 어뉴어린은 에테르의 조성과 레벨에 영향을 끼치는 독에 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었다.
그 이름은 ‘히드라의 독.’
이야기의 시작은 다시 이십 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리오그난 왕가의 저주는 대륙의 왕족들에게도 암암리에 알려진 것이었다.
젊었던 쥴레이카는 자신의 자녀마저 그 혼외자처럼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 낯선 말들과 관습 속에서도 무엇이든 더 알고자 했었다.
그 과정에서 얻었던 어뉴어린의 비망록은, 오랜 시간 동안 발견된 그대로 그녀의 보석함 아래에 보관되어 있기만 했다.
명민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은 그녀에게는 알비온의 옛 문헌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쥴레이카는, 왕의 세 자식 중 자신의 아이만이 그 더러운 운명을 피해간 것에 안심했었다.
필리프 왕과 언약 맺지 않은 일을 후회하리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치적 격변 속에 그녀의 배우자가 된 알비온의 유약한 왕은 언약을 거의 두려워했다.
공포에 질려서, 쥴레이카에게 언약을 종용치 말기를 비루하게 빌었다.
그녀 역시도 그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인간의 법 이상의 규칙으로 얽매일 마음이 없었다.
아슬란이 태어나 자라는 동안엔 내내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새 성장한 멜키오르가 왕세자의 자리를 부정한 방법으로 걸머쥐었다.
이제 그녀는, 저 간악한 멜키오르에게 간원이라도 하지 않는 한 국왕 서고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그렇다 한들 어미가 어찌 멈추겠는가?
오히려 그렇기에, 국왕 서고를 볼 자격이 없는 그녀에게는 의심받지 않고 운신할 기회가 생긴 것이라 여겼다.
쥴레이카는 결연히 선언했다.
“전하께선 두 왕국의 적자이며, 비범한 기사이시니. 그리하여 두 왕국의 관을 함께 쓸 것입니다. 제가 그리되도록 만들겠어요.”